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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증이 있는 삶을 살라 (행 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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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이 있는 삶을 살라 (행 22:2~21)


“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

2006년 4월 중국 코스타의 가장 인기 강사는 당시 중국 대사였던 김하중 장로님이었습니다. 강사인 제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정말 기도를 많이 하는 분이었고 그런 분이 중국 대사인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이 분의 간증이 지난 주 [하나님의 대사]란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책을 소개해 드리는 것은 기도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놀라운 감동과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을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이 놀랍게 일으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란 큰 나라에서 그것도 남북관계가 민감한 때, 대사직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6년 반 동안 최장수 대사를 지내고 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쁨과 능력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는 주중대사로서 중국과 중국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기도하였는데, 매일 중보하는 기도 대상자가 300명에 달하고, 그 중에는 현직 장,차관급 인사도 있으며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15여 년에 걸쳐 만 번 이상의 중보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와 순종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하던 시기에 과감하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건의하고, 방중 계획 불과 이틀 전에 사스가 공식 종료되어 중국과 한국간의 외교 관계가 한층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에서 황장엽씨가 망명 했을 때도 기도하면서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는 많은 사역자들이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김하중 장로님의 간증 책을 먼저 소개해 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은,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라고 주신 주제가 바로 간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증이 있는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의 놀라운 체험, 그 분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간증을 하나님은 갖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간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우 강조합니다. 이미 여러분도 다 아시겠습니다만 제가 말씀을 전할 때는 ‘하나님, 이 말씀에 대하여 제가 증거할 것이 제 삶 속에 있습니까?’하고 항상 제 자신을 살핍니다. 

수없이 제 간증을 했습니다. 책에도 교재에도 기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간증 듣기를 좋아합니다. 모임 때마다 간증자를 세웁니다. 그 이유는 간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 같이 계시는구나. 예수님은 성경 책 속에 계신 분이 아니고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는구나.’하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은혜를 받고 또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읽을 때도 좋지만 간증 들을 때도 너무나 흥분됩니다. 그것은 그 때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간증 만큼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들어서 아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니 얼마나 전도가 강력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그저 알고 있는 정도를 누구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 예수님을 내가 직접 만나고 변화된 삶을 살면서 전도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간증의 기법을 제일 잘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 빼는 약이나 화장품을 광고하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그 제품을 사용하기 전과 사용한 후, 두 가지를 가지고 선전합니다. 뚱뚱할 때의 사진과 날씬한 사진을 나란히 싣습니다. 머리 숱이 없는 사진과 머리 숱이 많은 사진을 싣습니다. 그리고 약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야, 이런 효과가 있구나.’ 
이것이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증 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은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핍박자였던 자신이 전도자로 바뀌어지게 된 내용을 오늘 간증하고 있는데, 바울의 이 간증은 9장, 22장, 26장에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은 죄인의 신분으로, 결박을 당한 상황에서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명예를 얻고자 간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결박에서 풀려나려고 간증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도 옛날에는 당신들 못지 않은 교회의 핍박자요, 예수 복음의 훼방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정말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꼭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삶이 벌써 자신이 증거하는 내용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있어 간증이 있는 것은 엄청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간증은 전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너무나 유익합니다. 간증 만큼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평생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고, 죽임을 당할 환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긴증은 우리를 사도 바울처럼 살게 해 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면 성경 속의 예수님 뿐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죽음도 이기는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서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도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뜻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지만 전해 들어서 믿는 정도의 그런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요 다음 계획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 예수님을 여러분과 직접 만나는 계획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그 은혜를 받고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정말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만나지 못하면, 내면의 고민과 갈등과 두려움과 염려와 은밀한 죄 하나도 해결이 안됩니다. 
여러분, 이따금 참 안타까운 뉴스를 들을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다는 분, 훌륭한 존경받으시던 목사님들이 스캔들에 휘말리는 뉴스가 신문, 방송, 인터넷에 나올 때 다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오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신 분도 많이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예수를 잘 믿고 또 설교도 잘하시고 그렇게 믿음이 좋아 보이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윤리적인 죄, 돈 문제 때문에 쓰러질 수 있느냐?’ 
성도들은 왜 많은 목사님과 사역자들이 방황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세기의 성인 어거스틴은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패륜아였고 마니교에 빠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부흥사 조지휫필드는 15살 때 술집 바텐더였습니다. 인도 복음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윌리엄켈리는 평범한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5만 번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는 기도의 사람 조지뮐러는 온 동네 사람이 다 아는 좀도둑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때때로 존경받던 목회자들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환경 운동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인물도 아주 잘 생기셨고, 무엇 보다 삶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분은 하루 한끼만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많이 먹으면 배설을 많이 하고, 배설을 많이 하면 그 만큼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농촌 마을에 있는 집에 도둑이 왔다가 가지고 갈 것이 없어서 그냥 갈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총선 시민 연대의 대변인으로도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성추행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가슴이 탁 막혔습니다.‘다른 사람들은 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안 그럴 거다.’이런 생각이 들었던 분인데 그 분에게 그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믿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성경에 있는 내용의 예수님으로만 알았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아십니까? 우리 육신은 정욕이나 음란이나 욕심이나 명예욕에 다 약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게 되면 다 그런 죄에, 육신에 끌려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경우,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에 눈이 뜨인 사람은 그 사람도 역시 육신으로는 똑같지만 육신에 끌려 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육신적으로는 죄가 많고 타락해도 사람들 하고 있을 때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왜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아는 눈이 뜨여야 비로서 우리가 주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7장에 보면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47:10-11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여러분, ‘나 혼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 믿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혼자 있다. 그래서 외로워하고 우울해 하고 또 그것 때문에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이런 믿음으로는 하나님이 복주시는 삶을 결코 살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회를 다녀도 이런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는 안된다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심을 눈떠야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은밀히 행하는 죄, 문제, 작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죄의 유혹이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계시고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지 지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은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신은 너무너무 잘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살았습니다. 

3절-5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신을 소개합니다. ① 유대인이었다. ②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촌 사람 아니다. 대도시 출신이다. ③ 거기에다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 명문대 출신이다. ④ 게다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이 대단했다.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까? 나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까?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다 뒤집어졌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을 특별히 잘못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고.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비로서 자신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6-7절 말씀에 보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빛으로 임하는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그 빛을 받은 순간, 사도 바울의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당황하여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 때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울의 생각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이단자며 부활했다는 그 제자들의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몇 명만 죽이면 예수라는 이단도 정리가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열심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짓이었다는 대답이 하늘로부터 들려온 것입니다. 자기가 핍박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한 마디에 사울은 거꾸러지고 그 뒤의 삶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볼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안수할 때, 비로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자가 전도자로, 율법주의자가 복음주의자로, 이방인의 원수가 이방인의 사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 간증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도전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만나는 간증이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이 있는지도 모르고 죽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주변에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변화, ‘야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그것을 간증해주는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결신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막힌 일입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성경은 압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되고 천국 간다는 복음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천국도 믿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만나주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또는 어떤 영적인 체험이 있었지만 벌써 수년 전 일입니다. 지난 주간의 간증은 없습니다.

“나도 사도 바울같은 간증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간증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시려고 이런 특별한 체험으로 부르셨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 체험 이후부터는 우리와 똑같은 그렇게 주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평생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이미 내 안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주님을 만나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오늘 전도 집회 아니거든요. 만일 전도 집회라면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을 기대해야 되지만, 이미 주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시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일 마음대로 되지 않지요? 자식도 마음대로 안 돼요. 건강도 뜻대로 안 돼요. 사업도 생각대로 안 돼요. 세상에 무엇 하나 시원하게 되는 것이 없습니다. 속상하지요? 답답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바로 그 순간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기회로 여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문제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꼭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힘들어하는 그 문제 속에서 주님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왜 꼭 그렇게 하실까? 형편이 좋을 때는 주님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다 자기 힘으로 잘 사는지 알고 주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비로서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는 때가 됐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힘들어하는 이 문제, 내가 지금 괴로워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바로 이 자리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구나! 여기서 주님을 만나게 되겠구나.’ 믿으십시오. 믿음은 바로 가지셔야 됩니다. 

아이티가 대지진으로 끔찍한 재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재앙 속에 빠져있습니다. 그 곳에서 10년 동안 선교하시던 선교사 글을 읽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절망 중에 10년 동안 사역하셨답니다. “강력한 토착 신앙과 극심한 빈곤으로 10년을 선교해도 열매가 드러나지 않아 선교사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 부자세습으로 이어진 독재와 당쟁으로 얼룩진 정치로 국민 대부분이 진흙 과자를 주식으로 먹어야 하고 그것도 하루 한 번 밖에는 먹을 수 없는 곳이 아이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지진이 닥친 후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아이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적이 없습니다. 국제 원조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기도가 집중되고 있잖아요. 대안이 없고 소망이 없는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새롭게 쓰려고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하나님께 올려지는 민족이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되어야 기도가 바로 나옵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문을 계속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한번만 두드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눈을 너무 크게 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너무 귀를 넓게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너무 크게 보이고, 세상 음성이 너무 크게 들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말씀하셨는데도 못 듣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 성령집회 때, 한 남자 성도가 맨 앞에 기도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성령체험을 하기 원하여 천안에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간절함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이 분을 향하여 뭔가 역사하실 것이 크시겠구나.’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간절한데 돌덩어리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그 분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왜 내게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냐고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그 분이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특별한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체험을 갈구하는 것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어야지 복을 받으려고 하고 방언 등 은사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간증이 있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체험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원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미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마지막 예수님을 결국 만나게 될터인데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반드시 그때가 올 것입니다. “나는 네가 의심하던 예수라. 나는 네가 평생 동안 부담스럽게 여기던 예수다. 나는 네가 그렇게 외면하던 예수다.” 대답하시지 않을까요? 

여러분, 바른 믿음을 가졌다면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젊은이 교회 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고신대 부총장 안민 장로님은, 대학생 때 너무나 가난한 형편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새벽기도 때마다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응답 받기를 “먼저 너의 것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었답니다. 너무 답답하고, 낙심되어 기도도 하기 싫더랍니다. “하나님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치라는 것입니까?”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원한다. 내 몸! 내 미래를 내게 바치라.”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에게도 바칠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미래를 하나님께 바쳤답니다. 그 후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아직도 여러분의 눈이 뜨이지 않았으면 눈을 열어주시고, 아직도 무엇을 잘 모르면 가르쳐주십니다.
  
믿고 기도했다면 이제는 순종 뿐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처음 20년 동안은 칼카타의 가장 부유층 자녀가 다니는 사립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자신의 일과 신앙 생활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길을 가다가 한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됩니다. 즉시 병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환자였습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병원에서는 계급이 낮아서 받을 수 없다고 거절 당했습니다. 세 번째 병원으로 가는 도중 이 여인은 테레사 수녀의 품에서 죽어갔습니다. 그 여인을 보면서 그날 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원하셔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대책은 없었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어려운 사람, 죽어가는 사람 옆에만 있어 주기로 하고 시작한 것이 테레사 수녀의 사역입니다. 그 순종이 그녀의 전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주까지 어린이, 학생, 청년 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간증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성경캠프에 참여할 때 자원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부모가 시켜서 선생님의 권유에 못 이겨 참석합니다. 그러나 그 억지로 하는 순종이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성경캠프를 마치고 한 어린이가 금요 성령집회 때 간증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입니다. 저는 그동안 항상 죄를 지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캠프를 하기 전에도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고 어린이국 리더를 하고 있었지만, 죄를 지어도 깨달음이 없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도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름 성경캠프를 통해 예수님은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제 죄를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성경 이야기가 계속 생각났고, 주님의 사랑이 느껴져 눈물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죄 짓는 아이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바꿔 주셨습니다. 
사단은 저의 마음을 계속 흐트러지게 하려고 했지만 저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이제 더 이상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니었습니다. 
찬양을 할 때도 예전에는 창피해서 율동도 하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가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습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걸을 때나 공부할 때나 놀 때도 기도를 합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종으로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순종의 걸음을 내디뎌 나갈 때 주님이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나는 성경에만 있는 내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나야.’ 
오늘 이 시간 여러분, 간증이 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그 간증으로 저도 변화되고 세상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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