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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한 소득과 십일조 (창 1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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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소득과 십일조 (창 14:17~24)

 
창세기에는 아직 제도적인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없고 성전도 없고 율법도 없고 유대교도 없고 기독교도 없고 아직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개인의 믿음이요 가문의 믿음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초기단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십일조라고 부르지 않고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렷다고 말하지 않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헌금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헌금을 드린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송금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온라인 번호가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서 헌금을 수거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카톨릭 신부님과 개신교 목사님과 유대교 랍비가 있었는데 카톨릭 신부는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헌금을 던진 다음에 동그라미 밖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 것이고 안에 떨어지는 것은 내 것이다 그랬어요. 그런데 개신교 목사님은 똑같은 원을 그려놓고 동그라미 밖에 떨어지는 것이 내 것이고 안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 것이다 그랬어요. 그런데 유대교 랍비는 돈을 공중에 던지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 것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내 것이다 그랬더랍니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는 돈은 없습니다. 돈은 다 땅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종에게 드리는 것이고 믿음의 공동체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처럼. 이 원리는 창세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도 볼 것 같으면 성도들이 헌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헌금의 수신자에 대해서 헛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헌금은 결국은 사람이 받는 것이고 사람에게 지출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은 거룩한 것입니다. 헌금에는 성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드리는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고 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것이고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멜기세덱이 그것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멜기세덱 개인에게 드리는 돈이었다면 멜기세덱은 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례나 답례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라면 멜기세덱이 사양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마음으로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사양할 권리가 없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아야 될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것은 멜기세덱의 철학과 원칙에 따른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일조를 바쳤고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헌금을 할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새삼스러운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궁금해질 때가 있지요. 헌금을 왜 하는가, 헌금은 꼭 필요한 것인가. 그걸 말하기 전에 주목할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헌금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왕 같은 사람도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의 헌금을 받으셨습니다. 마리아 ․ 수산나 같은 여성들이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헌금을 칭찬하고 헌금을 축복하고 요청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도 자기 땅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에게 바쳤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물질을 바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물질은 물질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질과 신앙은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실 무거운 부담은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헌금을 받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하는 사람은 헌금을 하면 그의 일을 끝난 것이지만 받는 사람은 그것을 정당하고 합당한 일에 쓸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무거운 책임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책임입니다. 오늘날 만일 헌금을 함부로 취급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이후에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무책임하든가 교회가 오염됐을 때는 교회에 헌금을 안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교회가 헌금을 제대로 관리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헌금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당시 유대교 제도가 많이 혼탁하고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헌금드릴 의무를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도 성전 세를 바치셨고 그리고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대해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꼭 교회에만 헌금을 해야 되느냐, 내가 좋은 일에 좋은 일을 선택에서 거기에 기부를 해도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꼭 내가 다니는 교회에 헌금을 해야 되느냐, 미자립 교회를 선택해서 거기에 내 헌금을 보내도 되지 않느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정확한 분명한 가르침이 나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과 헌금의 구별이 애매모호했어요. 사도바울도 교회에 헌금을 해야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에게 헌금을 보내라는 말은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헌금이든 십일조에 대해서 절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굳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이 거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데 첫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이에요. 내가 가진 시간 ․ 재능 ․ 나의 물질 ․ 인생 ․ 몸 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가 아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로 내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면서 헌금하면 안 됩니다. 내 것을 내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고 헌금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감사함으로 드린다 이런 마음으로 드려야 됩니다. 거기에 겸손이 있고 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우리 헌금의 액수를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만한 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좀 더 구체적으로 나를 영적으로 먹이는 곳에 헌금을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내게 영적인 꼴을 먹여주는 곳에 내 헌금을 드리는 것이 옳다는 얘기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르침 받는 곳이 교회라면 교회와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나를 축복해 주는 곳에 헌금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으니까.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여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고 복을 받은 게 아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지 하나님과 거래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면 옳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드리면 하나님이 저만큼 주시겠지,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리고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바란 것이 아니고 그는 먼저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축복을 받고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십일조라는 제도가 모세의 율법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출애굽기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모세의 율법이 생기기 이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말씀이 나온 것을 보면 이 십일조라는 제도는 율법이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는 율법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우선되었던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제 설교를 들으시면 아마 기존의 기복신앙과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복을 비는 사람도 복을 빌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뿐만이 아니고 복을 받는 자도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왜 오늘날 기독교가 기복신앙이라고 비판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만 가르쳤지 정직한 소득과 정직한 십일조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보면 그에게는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돔의 왕이 그에게 와서 비즈니스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지요. 아브라함이 전쟁에 이겨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왔는데 물건은 네가 갖고 사람은 나에게 달라 아브라함이 그 모든 전리품을 킵 할 수 있었다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거부합니다.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소돔 왕이 누구입니까. 소돔의 왕이에요. 장차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의 지도자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소돔과 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속한 것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분간할 수 있었어요. what is and isn''t mine 그것은 옐로우 리본이라는 팝송의 가사입니다. ''I''ve got to know what is and isn''t mine'' 내 것인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의를 빚는 이유는 자기 것이 아닌 것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것인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네게 속한 것은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어요. 그 이유는 내가 아브라함을 부자 되게 했다 라는 말을 들을까봐 그럴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소득은 깨끗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좋은 일에 쓰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말씀을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좋은 일을 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까지 해서 좋은 일을 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해야만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할렐루야!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빌고 있지 않습니까.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불의한 이득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소득, 정직하지 못한 소득 이것을 거부하고 정직한 소득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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