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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삶을 사는 기초 4 - 단쌓기 (창 13:16~18, 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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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을 사는 기초 4 - 단쌓기 (창 13:16~18, 롬 12:1)
  

찬송가 338장의 4절에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 받아서...”라는 가사처럼 단을 쌓은 것이 하나님 예배의 시작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위해서는 단이 있어야 한다. 제단이라는 말인 ‘미쯔베아흐(mizbeach)’는 제물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며 후에는 이 일을 행하는 장소를 언급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의 시대에 단을 쌓는 것은 구약의 제사와 달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는 것인데 이런 저런 이유로 단을 쌓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나의 삶 속에 단을 수축하여 예배 드리기에 성공하는 것이 신앙 확립의 기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의 한복판에 예배 드리기를 위한 단이 없는 사람은 거룩한 삶에서 멀어진다. 단이 없는 생활은 세속적 영향에 이끌린다. 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아브람을 따라가던 롯을 보라. 그의 생애 중 단을 쌓은 흔적이나 기록이 없다. 결국 그의 종족은 무너지는 소돔성에 유하다 전쟁의 포로가 되었고 심판의 날에 겨우 구원을 받고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단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아브람은 단을 쌓는 일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의 제단 쌓는 일의 최고 절정은 창세기 22장인 모리아 산 제단이다. 

창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드리기 위하여 돌과 나무로 단을 쌓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순종하는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이 제단을 만든 것이다. 힘들고 바쁘고 어려워도 단을 쌓는 일을 좋아하고 단을 쌓는 일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으로 만드신다. 믿음의 아비가 되고 천하 만민을 위해 쓰임 받는 이름이 된다.

아브라함의 단쌓기, 그것은 우리 예배 생활의 거울이기에 단쌓기를 배우자.

1. 단쌓기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창12:7)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 세겜 땅 마므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다. 창12:7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하셨다. 그때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다. 아브람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 세겜을 보장해 주셨다. 그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이 할 수 있는 반응은 제단을 쌓는 일이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나타나주시는 계시 앞에서 단을 쌓으므로 감사를 표하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육적인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 단을 쌓는 시간에 돌아다니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께 단을 쌓는 일을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영적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 단을 쌓으므로 감사와 믿음을 담아낸다. 노아도 단을 쌓았다. 이삭도, 야곱도 단을 쌓았다. 모세도 마찬가지다. 영적 사람은 단을 쌓는다. 결국 신앙인의 삶의 고백은 제단 쌓기에 귀착되기 때문에 우리도 단 쌓는 일에 깨어 있자.


2. 단쌓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창12:8, 창13:3~4)

아브람은 창12:8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친다. 거기서 제단을 쌓은 아브람은 남방으로 옮겨가는데 기근을 만나게 된다. 기근을 극복하려다가 애굽으로 내려가 곤욕을 치르게 된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간섭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는 애굽을 뒤로 하고 네게브로 올라간다. 네게브에서 다시 전에 장막 쳤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위기를 만났지만 아무 탈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창13:4上을 보면 그 벧엘과 아이 사이를 가리켜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창13:4下에서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였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행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사실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하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교만하여 자기가 인생길을 주장하고 걸어간다고 으스대는 것이지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이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 단을 쌓아야 할 일이다. 단을 쌓는 일은 마땅한 일이다. 아내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 시험에 합격하게 하신 하나님, 우리 교회에 나오게 하신 하나님, 도산의 위기에서 모면하게 하신 하나님, 서수원 지역에 이사오게 하신 하나님, 그 어느 사건 하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된 것이 없다. 때마다 일마나 내가 서 있는 곳에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아야 한다. 단을 쌓는 일은 마땅한 일이다.


3. 단쌓기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대한 반응이다. (창13:17)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이 함께 우거하는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은 거하기가 너무도 좁았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거하는 곳이 협소하므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카 롯을 내어보내고 홀로 헤브론 산지에 서 있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해 오셨다. 

창13:14~15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브람은 신실한 약속 앞에 더욱 믿음으로 살 것을 다짐하였다.

그에게는 지금 자손이 없다. 그런데 자손도 티끌만큼 많아지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땅도 지금은 없다. 그런데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그 밟는대로 마음껏 모라자지 않게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땅으로 출발한 아브람, 그에게 말씀하시는 약속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 그 신실하신 약속을 부여잡은 아브람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자식이 없는 자에게 자식을 주고 땅이 확정되지 아니한 자에게 땅을 준다는 것, 그것은 최고의 소식이다. 정말 반갑고 목마름을 단번에 해소해 주는 소식이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 변함없는 하나님, 그 약속을 붙잡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것이 올바른 반응인 것이다.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약속에 대한 반응이다. 성취되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다. 단을 쌓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 믿는 자들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단쌓기를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섭리에 대해 환영하며 인정하며 순종하고 따라가는 신앙의 표현이다. 단쌓기는 그래서 신앙의 기초이면서 믿음의 척도가 된다.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제단을 수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영원한 속죄 제물로 삼으시사 죄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디서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그곳이 단이 된다. 돌단이 아닌 믿음의 단을 쌓자.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이 없다. 세 가지의 단을 쌓자.

① 생활의 단을 쌓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우리는 롬12:1의 말씀처럼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산 제사, 그것은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문을 열고 나가므로 시작된다. 삶이 곧 단을 쌓는 예배다. 삶이 거룩해야 한다.

② 시간의 단을 쌓자.

24시간 중, 모든 것의 시작인 새벽이 중요하다. 바이올린 연주회를 앞두고 조율을 잘 해둬야지 연주 후에 조율하면 아무 소용없다. 순서가 틀린 것이다. 새벽에 깨어 일어나야 한다. 시46:5의 말씀처럼 새벽에 단을 쌓아 무릎을 드리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 새벽 시간에 단을 쌓자.

③ 경건의 단을 쌓자.

경건한 신앙의 회복은 가정 예배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가정에서 단을 쌓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단을 부숴뜨린대로 방치한다. 가정에서 단을 쌓으면 온 집안에 경건이 살아난다. 가정에 단이 세워지면 공적 예배, 주일 예배가 살아난다. 단을 쌓는 자의 신앙의 절정은 예배가 회복되고 삶의 전체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사탄은 단쌓기를 못하게 한다. 역사를 통해 보듯 예배당의 문을 닫게 하므로 제단이 무너진 곳은 그 지역과 사회, 가정과 나라가 쇠락한다. 사탄은 단을 쌓지 못하도록 핑계를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단쌓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살아나고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축복의 빛으로 넘쳐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는 단이 당신의 삶의 자리에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는 오늘 이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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