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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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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계 2:18~29)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32KM 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자주 장사 루디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아시아의 두아디라 성 출신이었던 루디아는 마게도냐 지방 빌립보 성에 와서 자주 빛이 나는 고급 명주를 파는 사업을 하던 중 사도 바울의 일행을 만나 세례를 받은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본래 하나님을 공경하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빌립보 성에 들어와 어느 안식일에 강가에서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거기 있던 루디아가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복음을 들은 루디아는 그 즉시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울의 일행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에 머무는 동안 루디아의 집을 거처로 삼아 거기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고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가 된 셈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그곳에 복음을 처음 전하던 시절에 이 교회는 바울을 물심양면으로 힘껏 섬겼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빌4:10 이하).    

이처럼 초대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와 같은 충성스런 일군들이 주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열심을 다해 섬기고 사랑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아시아 지역을 방문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성령이 그를 강력하게 인도하여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진로를 변경하여 마게도냐의 첫번째 성 빌립보로 들어가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이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으며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두아디라 성을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던 적이 없으니 마게도냐의 빌립보 교회와 오늘 말씀 드리는 아시아의 두아디라 교회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루디아가 두아디라 성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두아디라 교회도 루디아와 같은 열심있는 일군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너무 비약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루디아가 두아디라와 빌립보를 왕래하며 옷감 장사를 하면서 빌립보 교회의 좋은 전통을 두아디라에도 전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 오늘 계시록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시는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내가 안다’ 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B.C. 3세기 경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군사적인 요충지와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산업 중에는 루디아가 종사했던 자주 빛깔 염료와 옷감 생산이 유명하였고, 금속 세공업이 성행하였으며 상술이 능한 유대인들이 이주해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이 잘 맞아떨어져 일찍부터 상인조합 조직 길드가 형성된 전형적인 상업도시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아디라는 제우스 신의 아들인 태양신 아폴로의 신당이 있는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두아디라의 상인 조합원들은 사업이 잘되기를 기원하며 절기마다 수호신들을 받드는 축제를 벌였는데 이때 신들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있었고 축제 중에 여사제들과 맺는 방탕한 유희는 우상숭배와 함께 성적으로 문란한 문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두아디라 성에 있는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눈이 불꽃같다 함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꿰뚫어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두아디라 성의 모든 죄악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또한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 점도 정확하게 아시고 잘 못하고 있는 점도 살피시는 공정한 눈을 가진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하였으니 잘 닦여 빛나는 청동과 같은 모습은 수 많은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빛이 나는 그 발로 굳게 서계심 같이 우리 성도들 또한 주님을 닮아 어떤 시련과 마찰과 고난 중에도 굳게 서있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불꽃 같은 눈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도 그렇지만 단련하여 빛이 나는 발 역시 강하고 엄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과는 다르게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됩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 살고 있는 두아디라 성 사람들이 섬기는 제우스 신의 아들, 그들이 태양신으로 받드는 아폴로 신당이 있는 두아디라 사람들에게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첫 말씀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버린 것 때문에 책망을 들었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루디아가 개인 집을 개방하여 예배와 성경공부 모임과 성도의 친교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 시작된 빌립보 교회처럼  루디아의 고향 도시 두아디라 교회도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사업이라 함은 무슨 옷감 장사나 청동제품 비지니스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선한 일들을 말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선한 사업에 앞장 선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가 가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정을 받을만큼 왕성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점입니다.    용두사미, 작심삼일이라고 시작은 그럴듯하였는데 얼마 가지 못하여 흐지부지 끝을 맺는 신앙은 뭔가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겨줍니다.    

오늘이 2010년 1월의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해 새 마음으로 시작한 여러분의 각오와 결단이 잘 진행 중입니까?    혹시 작심삼일로 벌써 포기하여 제 자리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울고불고 가슴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혼자 예수 다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금방 주저앉는 사람들에게 성급한 칭찬은 금물입니다.     좀 더 두고보면서 이 사람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는지 아닌지 기다리면 언젠가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사람이 진국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복음, 처음에는 몹쓸 인생으로 버림 받은 자 같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기쁨의 소식이 참 복음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솔직한 사람은 처음은 불품이 없고 미약했을지라도 갈수록 더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날마다 새로와지는 기쁨을 줍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어설프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때 훨씬 좋아진 상태가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그런 소망이 있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 교회에 치명적인 책망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일입니다.    용납했다는 말은 허용했다 또는 너그럽게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칭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로 가만히 들어온 이세벨이라 하는 이 여인은 믿음과 사랑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 이 좋은 교회를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더럽힌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이 이세벨인데 어쩌면 전직 여사제로 일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두아디라 교회에 등록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와서도 옛날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선지자 노릇하며 잘못된 리더쉽을 발휘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마치 전직 무당이 예수를 믿고 교회 출석을 하는데 아직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무당 굿판 벌이는 식으로 가르치던가 자기 집에 예배처소를 만들어 놓고 교인들을 불러다가 함께 굿판 벌이고 먹고 마시는 식으로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을 미혹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사이비 신흥종교 교주노릇을 하는 여인입니다.  

아니면 이세벨은 구약에 나오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상징하는 이름일 수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은 이방 나라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이스라엘을 역사상 가장 극심한 우상숭배 시대로 몰아넣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게 된 그 배후에는 이방 여인 이세벨의 간교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엘리야라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합과 이세벨에 맞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목숨을 걸고 일하였습니다.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에 이세벨이란 이름의 여인이 들어온 것을 보면 이 교회의 영적 질병이 대단히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왜 불꽃 같은 눈과 빛나는 주석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단의 강력한 활동이 있는 교회에는 그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셔야 했고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바로 잡아주셔야 할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 여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세벨이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극악하게 저항했는지 생각하면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 그 인내와 자비가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세벨 같은 사람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던지 불문하고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진정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사람을 두 팔 벌려 맞아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부르셨고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셨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충신 우리아까지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이 나단 앞에 보인 행동을 기억하시지요?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체면과 권위를 의식하며 짐짓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은근슬쩍 넘기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범입니다. 왕권을 악용하여 남의 아내를 탐한 자,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마저 최전방으로 보내어 적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악한 명령을 내린 다윗, 이런 추악한 죄인이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는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용서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참 편리한 종교라고 오해합니다. 무슨 죄를 범해도 잘못했다고 빌면 다 용서해주는 교리를 악용하는 기독교인들이 양심이 무디어져 더 못된 죄를 짓고 산다는 생각을 합니다. 회개하면 다 용서한다는 말씀은 죄의 댓가로 지불되는 영원한 형벌을 면하게 하심이지 죄의 책임까지 면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고 우리에게는 내가 감당할 책임만 지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덕분에 삽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 우리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여전히 똑같은 죄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악용하는 사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예를 보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는 태어난지 칠 일만에 죽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아들들이 서로 죽이는 왕자의 난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왕자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왕좌를 노리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다윗의 집안에 계속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죄는 용서되었지만 그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게 하심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은 감당하게 하시며 다시는 동일한 죄를 범치 않도록 경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나중의 행위가 처음보다 더 많다고 칭찬하셨으니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발전적인 믿음과 사랑과 섬김과 인내를 말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무도 모르는 듯 하지만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고집부리며 오히려 양심이 마비되어 회개하지 않는 이세벨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아합 왕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그가 타던 마차를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을 때 개들이 와서 그 피를 핥았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이 죽은 뒤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위를 이어 11년이 지난 즈음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죽였으며 이세벨도 그의 손에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예후가 요람을 죽이고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이세벨은 그 와중에도 화장을 하고 창가에서 예후를 기다렸다가 예후를 향해 조롱하며 악담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후가 이세벨 곁에 있던 내시들에게 이세벨을 창 밖으로 던지라 명하였고 내시들이 이세벨을 던져버렸습니다. 바닥으로 내던져진 이세벨의 피가 담과 말에게 뛰었고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발로 밟았으며 나중에 장사지내려 할 때 보니 개들이 그 시체를 먹어 겨우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최후였습니다. 끝까지 회개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던 악한 여인의 표본입니다.

두아디라의 이세벨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23절을 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운 경고입니다. 구약의 이세벨을 창밖으로 던지듯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침상 즉 병상에 던져 죽임을 당하게 하리라 하십니다. 추측하건대 이세벨이 문란하고 방탕한 성적 타락에서 얻은 질병으로 죽임당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 방탕한 여인에게 미혹되어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지금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질 것이며 그의 자녀를 죽일 것이라 하십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도리어 정당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인내가 통하지 못합니다.  기회를 보아 또 다른 죄를 범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 참고 기다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준엄한 형벌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 심판을 통해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하십니다.    

이것이 곧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시는 주님이 주시는 경고입니다. 선을 행한 자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으로 갚으십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그 악행대로 갚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로운 자들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25절에서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하십니다.     무엇을 잡아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지 주님의 칭찬과 책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음 주일에 한 번 더 이어 드리기로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며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선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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