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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사역의 진행 (행 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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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사역의 진행 (행 16:6~10)

 
내 용 

성령에 대한 칭호가 성경에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하나님의 성령’, 로마서 8장 19절에는 ‘그리스도의 영’, 요한복음 16장 14절에는 ‘진리의 영’, 히브리서 10장 29절에는 ‘은혜의 영’, 로마서 8장 2절에는 ‘생명의 영’, 에베소서 1장 13절에 ‘약속의 성령’, 오늘 말씀 사도행전 16장 7절은 ‘예수의 영’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모든 칭호는 한가지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그때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과 불과 바람 성격으로의 성령을 3주간 동안 설교했는데 그 외에도 성령님의 성격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한 구약의 문화는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직식을 했던 문화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성직자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주의 기름 받은 종’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름의 성격은 모든 것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기계는 기름의 도움을 받아야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름이 말라버리면 그 순간부터 기계는 고장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치유적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감람기름이나 알로베라 같은 기름은 가공 없이 직접 치유 효과가 나타나는 기름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제자들이 환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물에 참기름 몇 방울이 내는 효과는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줍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사역은 기름과 같아서 모든 거친 심령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갈 수 있는 효과와 변화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 속에 성령 충만하면 사람도 변화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시는 대로 사람이 변화하기는 힘이 듭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이 변하는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외국에는 이런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한때 우리 한국에는 깡패 세계 두목이 목사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주먹 깡패 아니면 목사가 안 되는 것 같이 유행했었습니다. 주먹 세계의 두목이 예수를 믿고 목사까지 되는 일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점이 있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이런 사람들이 간증 집회를 하면 아주 인기입니다. 간증 집회는 과거가 험악할수록 효과가 있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그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동기생만 해도 주먹 하나로 서울을 휩쓸었습니다. 20대 후반에 서울을 주먹 하나로 장악하고 자기 밑에 1,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향락생활을 하던 사람이, 내가 봐도 주먹이 보통 주먹보다 크기도 하지만 힘도 얼마나 센지 그거 하나로 출세해서 서울 장안에 내놓으라 하고 휘어잡았었는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성격을 이기고 성령의 임재가 부드럽게 나타나서 사람이 변해서 얼마나 거룩해지고 부드러워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가끔 옛날 버릇은 남아 있더라고요. 그런 왕초가 성령 받아 목사 되어 개척교회를 하려고 나갔을 때 일입니다. 열심히 사역하려고 하는데 자꾸 시골 조무래기 건달들이 사람을 몰라보고 건드립니다. “목사님! 술 한 잔 사주면 우리가 교회 나가지!” 툭툭 건드리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저런 것들은 옛날 같으면 반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와서 저렇게 나를 건드리네!’ 그런데 자꾸만 그러니까 화가 났습니다. 

실화입니다. 하루는 믿는 사람들을 툭툭 건드리면서 비아냥거리니까 “어휴! 하나님 안 되겠습니다.” 그 중에 대장격 하나를 잡았는데 목사가 두들겨 패면 안 되잖아요? “우리 기도하자.” 목덜미를 잡고 꽉 찍어 누르고 “하나님 아버지! 이놈도 나와 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얼마나 세게 조이는지 죽을 거 같거든요? “아이고! 사람 죽는다!” “성령이 역사할 때는 그렇다.” 놔주질 않은 겁니다. 

기도도 얼마나 오래 했는지 나중에는 그 다섯 명이 무릎 꿇고 거기서 빌었습니다. “제발 목사님, 살려 주십시오. 절대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아니다. 오래 기도해야 된다. 그 다음에는 네 차례다. 너 이리 와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모여 있을 때 이 목사님이 “다 같이 기도하자.” 하면 다 도망가 버렸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고 성격 참고 산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변화는 기름과 같아서 바르면 부드럽게 변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를 기름으로 표현한 겁니다.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 임직식 때 기름 사용해서 부어주었는데 무슨 뜻입니까? 성령 충만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33편에 나와 있잖아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젊은 제사장이 제사장으로 탄생하는데 임직식을 하잖아요? 

우리 교회에서도 목사 안수식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이 자리가 모자랐습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 임직식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선배 제사장이 후배 제사장에게 안수하면서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흐를 것 아닙니까? 얼굴에 흘러내리고 또 제사장들은 젊어도 수염을 다 길렀습니다. 수염으로 내려와서 뚝뚝 옷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광경을 보고 거기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가운데 우리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우리의 죄 지은 것을 속죄하여줄 제사장이 또 탄생했도다.” 그러며 좋아하면서 제사장 임직식을 했는데 이 기름이 곧 성령의 충만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임재가 제사장에게 임하여 이제 제사장 하나 탄생하는 기쁨을 다 같이 누리는 행복한 순간을 상상한 그런 시편의 말씀이 나와 있는데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설교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왜 상처에 그것을 붓습니까? 

기름은 치유적 물질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치유가 됩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치유 물질로서의 기름입니다. 더 확실한 성경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21~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기름과 성령을 동일시한 성경문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왕도 성령 충만해야 국민을 다스린다.” 그래서 왕을 세울 때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 위에 붓고 입 맞추매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이 네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가 왕을 기름 부어서 왕을 세우는 임직식을 해주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다는 것이 성령 충만을 의미하는 문화로 구약 때부터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머리 위에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면 왜 성령을 비둘기 같다고 표현을 했는가? 비둘기는 구약시대 하나님 앞에 사용되는 속죄 제물이었습니다. 

레위기 5장 7절에서 10절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비둘기는 죄가 없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희생시켜 피를 흘려서 뿌리고 목을 비틀어 죽이면서 “이것의 희생으로 네 죄는 사해졌도다.”라고 하는 속죄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는 인간 속죄를 위한 희생물입니다. 창세기 8장 6~12절을 보면 비둘기는 인간의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가 물 뿌린 세상에 비둘기 하나를 날려 보내니까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오니까 “아! 희망이다. 이제는 물이 빠져서 나뭇잎을 물고 왔도다.” 희망상징으로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하심으로 비둘기의 순결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러한 성경말씀 때문에 비둘기의 상징 문화가 생긴 것인데 세계 공통입니다. 평화의 상징입니다. 유엔이 하는 일에는 항상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습니다. 왜 비둘기 그림을 그립니까? 세계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지만 유럽을 가보세요. 도시마다 비둘기가 너무 많아서 도시 행정에 문제가 됩니다. 날마다 광장의 비둘기한테 먹이를 뿌려주니까 수많은 비둘기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그 도시의 새로 지은 건물, 시청 건물 할 것 없이 수많은 비둘기가 똥을 싸니 이게 얼마나 더러워집니까? 그런데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비둘기는 여인 같은 아름다운, 가장 편한 동물, 가장 선한 동물, 순결한 동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의 사역은 “비둘기 같다. 아름답고 순결하며 선하고 평안하다.” 우리 성가대가 예배 시작할 때 송영하잖아요? “비둘기 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 맘 어루만지사 위로의 평화 주소서” 아가서에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비둘기는 나쁘게 사용된 데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비둘기와 같습니다. 

그 다음에 가장 확실한 성령님이 나에게 사역하는 약속은 에베소서 1장 13~14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어서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성령님은 인치심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도장 문화가 제일 발달한 나라입니다. 도장으로 뭐든지 다 합니다. 성경에도 도장 문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든 계약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끝납니다. 땅을 사고 팔 때, 어떤 서류를 증명할 때, 무슨 상장이나 졸업장 할 것 없이 그 종이에 무슨 도장이 찍혀있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평가되는 문화가 도장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했으면 거기에 기록되는 모든 조건에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도장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함부로 사인도 안합니다. 왜 그럽니까?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그런 일이 없지만 미국에는 ‘콜사이너’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동차 사고 집 사고 그럴 때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되는데 “못 갚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럴 때는 갚을 만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것을 ‘콜사인’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못 갚으면 내가 갚겠습니다.” 사인해주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어쨌든 돈을 주니까 교인들이 저한테도 찾아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목사님한테 부탁하면 해줄 거 같으니까 와서 “목사님! 여기다 사인 좀 해주세요.” “그게 무엇입니까?” “콜사인이에요. 자동차 사려고 그래요.” “그거 네가 못 갚게 되면 어떡합니까?” “에이! 그럴 일 없어요. 그냥 사인만 해주세요.” 이민 와서 고생하면서 자동차 하나 구입해서 타고 다니려고 하는데 안 해주면 “목사는 사랑도 없어! 교인 콜사인도 안 해주나? 네가 무슨 손해 끼칠까봐. 어휴!” 이러잖아요? 그래서 ‘에이 모르겠다. 사인해주자.’ 그런데 어디로 가버렸어요. 

나한테 당신은 콜사이너라고 돈 내라고 왔어요. 꼼짝도 못해요. 저에게 이런 경험도 있습니다. 이 도장을 찍고 난 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뭡니까? “성령님이 너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도장을 찍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천국에서 인치심을 받은 자” 도장을 받은 자, 그 사람들만 천국에 온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30장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이것은 최고의 약속이며 최고의 행복이며 최고의 영광이며 최고의 권위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장은 성령님이 찍었기 때문에 성령님이 책임을 지신다는 겁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가 이해할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아시아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죠? 우리가 늘 들어온 말로, 바울의 1차 전도여행, 2차 전도여행, 3차 전도여행이 있습니다. 아시아가 자신의 선교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이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또, 7절에 보면 바울 일행의 전도 스케줄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전도하려고 계획을 짜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느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을 내가 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가?’ 이런 원망이 언제나 있잖아요?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은 계획이 있다 하여도 그것이 꼭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는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기록은 전도를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시아에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답을 얻어야 하잖아요? 나의 훌륭한 하나님을 향한 이 좋은 계획은 왜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항상 방해에 걸리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더 좋은 계획이 계심으로” 입니다. 

오늘 말씀 9~10절 아시아를 막으신 성령님은 이들을 어디로? 유럽을 열어주시지 않습니까? 여기 환상을 보잖아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일러라.” 마게도냐는 유럽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배를 타고 건너가서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에베소,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가 되었습니까? 유럽의 서구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이 다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바울의 발걸음이 아시아로 향하였다면 아시아가 유럽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럽은 인구의 90퍼센트가 다 기독교인입니다. 아시아는 90퍼센트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유럽 사람들이 건너간 나라가 미국이고 그래서 유럽을 통해서 서구 문명을 통해서, 서구 기독교 문명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그리고 미국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주었잖아요? 성령님의 사역 진행은 때로 우리의 계획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지혜로운 사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하고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어느 것이 성령님의 지시인가를 기다리며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역 예배 때 간증한 적이 있는데 제가 뉴욕에 있다가 LA로 온다는 말을 듣고 LA에서 즐거운 두 가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저에게 제1목회지와 제2목회지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 LA에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은 조건으로 기다렸는지 그때 제가 30대 초반인데 하나는 파사데나라고 하는 도시에 한인교회가 하나 있는데 거기가 얼마나 좋은지 LA에서 그 도시가 제일 먼저 생긴 고풍스러운 도시이고 그 도시 안에 한인 교회는 그거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건물 얻어서 예배드리는데 교인도 200명 정도가 되고 “목사님이 이 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30대 초반에 그 시절만 해도 35년 전인데 얼마나 좋아요? 그러자고 하고 신이 나서 기다리는데 또 한군데에서도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교회가 7개 있었는데 거기서 새로 개척되는 몇 사람이 모여서 잔디밭에서 예배드리다가 20~25명 들어가는 조그만 방 한 칸 빌려서 이제 시작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나한테 세례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만 모시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든지 모십시다.” 하면서 요청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거기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거기는 한인교회가 7개가 있는데 나까지 들어가서 경쟁하면 이민 사회는 좁기 때문에 와도 신경 쓰이고 가도 섭섭하고…. 그런데 파사데나는 교회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거기에만 마음이 쓰이는 겁니다. 그래서 잔뜩 기다리고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는데 방해 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급한 일이 생겨서 안 된다고 하고, 오라고 하신 집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무슨 문제가 생기고…. 만나지지를 않는 겁니다. ‘이상하다.’ 저는 영적으로 느낌이 왔습니다. ‘이게 뭔가 있는 거 같다.’ 또 한쪽에서는 와서 “목사님! 이번 주부터 우리 교회에 오시지 않고 뭐하시는 겁니까? 왜 꾸물대시는 겁니까?” “꾸물대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겁니다.” 사실 거기에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기도하러 가야겠다.’ ‘팜델’이라고 하는 사막 가운데 기도원이 하나 있는데 2~3시간 운전해 가서 이틀 밤 거기서 밤이슬 맞으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해 주세요.”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사막이라서 아주 건조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놓고 “나 이쪽 교회를 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세요.” 기도하면 기도 방해가 일어나는데 뱀 같은 것이 지나가는지 사각사각 소리가 나서 “어? 이게 뭐야?” 그러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에 들어가서 잠자고 또 기도하려고 하면 안 되고…. ‘이거 영적 방해가 보통 심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루 지나고 내가 가기 싫어했던 그곳을 놓고 기도하면 기도가 술술 나오고 얼마나 마음이 평안해 지는지 ‘너 왜 욕심 부리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할 텐데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지.’ 이런 생각이 나고 그러는 겁니다. 

‘아! 이거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한쪽을 접고 안 가려고 했던 그곳을 간 것이 제가 23년 동안 목회했던 교회가 된 역사가 일어났고 내가 가려고 했던 그 교회는 1년 만에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해서 분별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올 때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응답 받고 왔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이렇게 만남을 이룬 것이 이렇게 만나서 세계 선교를 이루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와 인도는 언제 나타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만나지 못할 관계입니다. 하나는 로마 사람이고 하나는 유대 사람인데 유대인 종교 지도자가 이방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법적으로 위법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28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내게 지시하사 만났다. 

왜 나를 불렀느냐?” “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당신을 초대하였나이다. 설교해 주소서.”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길게 했는데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자에게 내려오시니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 들을 때 우리 영 가운데 임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이 옆에 가는 데도 몰라 봤습니다. 그런데 언제 깨달았습니까?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설교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세 가지 확실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120성도들 성령 충만의 사건은 합심 기도 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의 여러 가지 사건은 설교 중에 성령님의 은혜 역사가 임재했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송 부르다가 초월적 기도의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어려워지면 교회는 끝난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가 정한 공식적 예배는 철저하게 참석하라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찬송과 기도와 그리고 말씀 강론은 직접적인 성령님의 은혜 체험의 시간이 되는 영적 은혜가 있기 때문에 예배만은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성령님의 역사를 잘 분별해서 따라야 하는데 어떨 때는 내 주관적 고집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소멸시키는 미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미련한 사람이라고 성경에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교회 대학부를 맡고 있는 전도사님이 학벌이 미국에서 한인들 가운데 제일 좋을 겁니다. 프린스턴을 졸업했고 하버드 박사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전도사였습니다. 그러니 좀 잘난 체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사람들은 미국 교인이나 한국 교인이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TV 목사가 있는데 베니힌 목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은사 집회를 합니다. 수만 명씩 모아놓고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 은혜 받은 간증을 하라고 하는데 나와서 걷지를 못하는 사람이 예배 참석해서 걷게 되었다고 하고 무슨 병이 있었는데 금방 나았다고 하고 나와서 기도 받으면 쓰러지기도 하는 집회를 하시는 분이거든요? 

미국에서는 유명합니다. 저도 그분 집회하는 것이 TV에 나오니까 ‘참 능력 있는 하나님이 쓰시는 이 시대 영적 지도자이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그 목사님을 매일 비판하는 겁니다. “목사님! 그거 다 가짜입니다. 다 짜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보면 어떻게 간증하고 아픈 사람이 항상 앞자리만 나와 있습니까? 이것은 다 짜고 하는 겁니다.” 대학생들 모아놓고 “그런 곳에 가지 마라. 다 사기다.” 늘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그거 다 짜고 하는 거 실제로 가서 보여주겠다. 

날 따라와라.” 그래서 대학생들 데리고 거기 참석했단 말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은혜 받았다며 눈물 흘리고 찬송 부르고 “성령의 은혜”라고 소리를 치는데 이 친구는 앉아서 계속 비판하는 겁니다. “저기 저 사람 잘 봐라. 이제 곧 나을 테니 잘 봐라. 저거 다 짜고 하는 거다.” 예배 도중에 거기 앉아서 비아냥대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이 전도사가 “꽥”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몸이 굳어져서 팍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변에서 “아니, 예배 도중에 사람이 왜 저래?” 말도 못하고 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돌멩이 같이 굳었습니다. 죽지는 않고 나중에 깨어났습니다. 

“목사님, 그게 뭐죠?” 제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너 죽지 않길 다행이다.” “하나님이 너는 전도사이니 살려주셨다. 그렇게 강하게 성령의 역사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그 현장에 가서 비아냥거리고 마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성령님이 너를 가만히 두었겠냐? 너 은혜 받았다.” 그 친구가 그 이후에 신학 사상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목회 잘 하고 있습니다. “너 좋은 경험했다. 지식 있다고 까불지 마라.” 그래서 이 친구는 그 사건 이후에 사람이 달라져서 얼마나 보수적으로 설교를 열심히 하는지 지금은 굉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조명하면 성령님이 어느 때는 나의 가는 길을 막기도 하시고 다른 길을 열기도 하십니다. 성령님 사역하실 때 조용히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 예배 때마다 성령 체험이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성령님께서 저희 영 가운데 함께 해 주사 하나님의 전으로 저희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말씀에 조명된 사건을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지금도 성령님이 나를 인치시고 가장 훌륭하게 사용하는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고 따르는 지혜와 영적 능력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시고 인도하시고 또 우리 교회에 지시하시는 영적인 음성을 조용히 들을 줄 아는 분별력이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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