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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8) : 갈릴리 해변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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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8) : 갈릴리 해변 (마 4:18~22)


예수님의 공생애의 본격적인 사역은 갈릴리 해변 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으시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시는 사역을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는 제자 후보생들에게 <나를 따라오라>(Follow Me!)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부르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오래 동안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불러왔습니다. ‘제자’란 말은 본래 희랍어의 mathetes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배우는 자’(learner)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자 평생을 통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형제)를 부르시고,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형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과 본문이 언급하는 몇 몇 제자들과의 의미있는 만남 그리고 부르심이 이루어진 장소가 ‘아름다운 갈릴리’였다고 기록합니다.

(갈릴리는 키네렛-하프라는 뜻, 게네사렛, 디베리아스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움/길이 21km, 폭 13km, 둘레 55km, 수심 40km의 호수/정경) 

그래서 오늘의 우리도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갈릴리 마을 숲속에서 주님 열한 제자 다시 만나시사”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남은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갈릴리 어부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냥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생을 마칠 그들이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 동료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며 갈릴리의 어부들을 생각에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떠오른 시 한편이 있었는데 김춘수의 시 “꽃”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갈릴리의 단순하고 우직한 삶을 살던 어부들, 그러나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들의 이름들을 부르는 순간 그들은 천국의 꽃이 되고 어두운 세상의 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을 소집하는 소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던 그분이 지금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21세기 그의 제자로 삼고자 함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갈릴리 해변이 아닌 서울과 분당, 수원과 수지의 아파트 정글에서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의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1.<예수의 제자도>의 구도는 공동체로 출발합니다.

제자와 유사한 단어 가운데 ‘도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 이라고 부릅니다. 도제는 한 사람의 스승이 많지 않은 한 두명의 따르는 자를 선택하여 그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제 훈련> 방식이 아닌 <제자 훈련>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그는 12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12명까지 가능한 공동체 훈련이었고, 그리고 단순한 기술만이 아닌 인격과 삶을 전수한다는 의미에서 도제 훈련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배울 뿐 만 아니라, 서로 서로의 부딪침을 통해 서로를 다듬고 빚어가면서 서로 서로 격려하며 사랑하면서 서로를 세워가는 가치를 중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교훈에는 특별히 “서로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나타납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자주 권면하시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 바울도 “서로를 용납하라”고 “서로를 용서하라”, “서로를 권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12명이라는 공동체의 구도안에서 그들이 제자도를 배워가는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또한 12명으로 구성되는 목장을 제도화하고 목자들의 안내와 교제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도록 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년 한해도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목장으로 다시 깊이 들어가 서로를 챙기며 서로를 세워가는 진정한 제자도를 배워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것만이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감을 배우는 진정한 제자도의 훈련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최인호는 최근 그의 에세이 <인연>이란 책에서 인간관계를 통한 인격의 빚어짐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합니다. 한 문단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밤 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이 별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 신의 섭리를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이 인연이 소중한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빛을 받고 너는 나의 빛을 받아서 되쏠 수 있을 때 별들은 비로소 반짝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한 것 같아도 혼자서는 우리는 결코 훈련되지 않습니다. 함께 하면서 우리는 기도를 배우고 함께 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함께 하면서 우리는 섬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편해 보여도 목장 공동체내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훈련이 중요한 것입니다.

2.<예수의 제자도>의 본질은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시겠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 명령과 약속이 있습니다. 명령은 무엇입니까? “나를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무엇입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를 따라 가는 삶의 궁극적인 결과는 사람을 낚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낚는 사람을 우리는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일 이 땅에서의 그의 마지막 분부를 통해 이 명령을 “가서 모든 족속(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나의 제자를 삼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딤후4:5에서 마지막 유언을 어떻게 남깁니까?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참으로 살고 있다면 내 영향을 받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 훈련의 궁극적인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본질은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예수의 제자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영향을 받아 구원받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예수의 제자인가를 충분히 의심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제자 삼는 삶을 날마다의 일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전도는 일 년에 한번 이웃 사랑 축제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 때 주께로 인도할 영혼들을 만나고 사귀는 일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VIP 리스트’를 지금부터 준비하십시오. 전도가 너무 힘들다고요? 그래서 함께 전도하도록 주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략을 세우고 함께 역할 분담을 통해 만남의 계획을 세우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목장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3.<예수의 제자도>의 실현은 헌신적 희생을 통해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기 위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아무런 대가가 없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피흘려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영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자, 처음 제자들은 어떤 대가 ,어떤 희생의 값을 치러야만 했을까요?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베드로와 안드레)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21절-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배와 그물이것은 어부의 밥줄이 아닙니까? 그것조차 헌신적으로 희생한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내 인생의 근원이 된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아버지조차 하나님께 의탁하고 예수를 따르는 길에 나서야 했던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궁극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더 많은 이웃들을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긍극적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저나 여러분이 복음을 위한 희생을 주저하는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설교가 스튜어트 브리스코(Stuart Briscoe)는 영어로 C 다음에 D가 나오는데 Christian이 참 Disciple이 되려면 거쳐야 할 3C가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Curiosity(호기심), 다음은 Conviction(확신) 그리고 궁극적으로 Commitment(희생적 헌신)가 있어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제자의 길은 처음에는 도대체 그 길이 어떤 길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제자의 길로 들어서려면 이 길만이 세상을 바꾸는 길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신에서 더 나아가 기꺼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이기심과 편안함과 특권을 포기하는 구체적인 헌신이 없이 아무도 제자의 길을 갈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독일의 나치와 대결하며 제자의 삶을 살았던 본 훼퍼 목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원인이 ‘싸구려 은혜’(cheap grace)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찬양하면서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헌신적 희생을 시작하는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를 붙잡는 그 날, 그 때 비로소 우리를 통해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금년 한해 우리가 영혼 구원의 삶을 살기로 작심하고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희생하며 그들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내 포켓을 열어 거금이 아닌 약간의 용돈을 희생하고 ,그들을 만나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귀를 기울여 주는 관심 정도의 희생만 할 수 있더라도(물론 그 이상의 헌신이 필요하지만) 세상은 얼마나 변할까요?

저는 오늘의 설교를 마치면서 다시 김춘수의 시 “꽃”을 생각해 봅니다. 그의 시의 마지막 문단입니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당신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가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이 되어주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제자도의 거룩한 부르심 앞에 누가 응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누가 응답하겠습니까? 지금 응답하지 않는다면 언제 응답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우리 모두 우리의 갈릴리에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그분을 새롭게 만나야 할 시간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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