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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닫힌 마음을 열어야 (막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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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마음을 열어야 (막 6:1~6)
  

시작하는 말

성도 여러분,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께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주현절 후 제 4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탄의 절기가 지나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구세주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현현.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의 성경에 나오는 사건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았습니다. 고향이란게 묘해서 누구에게나 설레임이 있습니다. 분주하고 피곤한 예수님의 공생애 일정에서 고향을 방문함으로 무언가 따뜻하고 평안함을 얻기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회당에서의 그의 가르침을 보고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를 메시야로 믿고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를 동네의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하는 사악한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참 모습도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우리 곁에 계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영접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몸 말

예수님께서는 지금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하나님의 확정을 다시 받으셨습니다. 그 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고 기도하시며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험을 거치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옛날에 보았던 예수의 모습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시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것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한 것을 절대적 가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고, 만지고 경험한 것이 허무한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어느 날 산책을 하고 있는데 저 만치 풀 숲에 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겁이 나기도 하고 해서 얼른 지나쳤습니다. 다음날도 이 철인이 같은 길을 산책하는데 같은 장소에 뱀이 또 있는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뱀을 위협해 보았지만 뱀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 뱀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놈 봐라. 그래 오늘은 아예 결판을 내자’하고 지팡이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가딱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난 데카르트는 큰 돌로 내리치고 그러고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오라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사흘 동안이나 속은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며 큰 충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는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내 눈이 나를 속였는데 누구를 믿으라는 말이냐?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믿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못 믿겠다고 하는 그 사실, 생각 하나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한 것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회의주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람의 사고, 이성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까? 인간의 이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이성에서 철학이나 학문적 결과, 특별히 과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오늘날 이간은 과학을 절대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적 판단도 절대적이 아님을 말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UCLA 의과대학 어느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있고, 어머니는 폐 결핵 환자이다. 여기에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환자요, 어머니가 폐 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균 환자요. 어머니는 폐 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마는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쓰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하였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고(思考)가 있습니다.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그 사고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고 하니, 보고, 듣고 경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보고, 듣고 경험해서 사고가 형성된 다음에 이것이 내부에서 하나의 틀을 만들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다시 새로운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이미 경험했던 지식이 앞서 가서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앞서 말한대로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굴절작용을 하고, 편견이 생기고, 오해가 생깁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고정관념이 되고 이것에 갇혀 있으면 구제불능이 됩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 들어보셨지요.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다. 운명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종종 말씀드립니다만 어리석은 사람이 소신껏 사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이미 가진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고집 부리면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zero base thinking 이라고 합니다. 아주 백지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군대 경험을 한 사람들은 아마 비슷한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1969년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 30연대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을 때 맨 처음 들은 얘기가 ‘제군들은 백지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돈이 있었건 없었건, 공부를 많이 했건 못했건 군인에게는 그런 것 필요 없다. 이제는 백지로 돌아가라. 개끗하게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라. 이렇게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아주 백지로 돌아간 사람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명령대로 순종하니까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내가 이럴 처지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뭐가 잘못되어서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거기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미치겠더라고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점사고로 돌아가라. 교육학자들의 심리학적 표현으로는 Paradigm Switch라고 합니다. 의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어느 처지에서건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똑같이 예수님의 고향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사도요한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요한은 같은 고향 사람이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하면서 공생활, 사생활을 지켜본 사람인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이 그의 고백이요 그의 결론입니다. 

같은 고향 사람인데 어째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린대로 오늘날에는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되어지는 일 하나 하나를 결코 예사로 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고를 바꾸려면 무엇보다도 성서적 맥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의 예수 빋는 사람들은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살았습니다. 사건마다 성경의 시각에서 봅니다.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역사하셨고, 또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고... 성경의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나타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생각해보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dpt 생각, 옛 관습, 옛 지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맙니다. 오늘 성경 말씀대로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희한한 이적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고작 ‘어찜이뇨?’입니다. 그것으로 다입니다. 놀란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대체 어디서 이런 능력을 받았는고’하고 맙니다.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할 뿐입니다. 

그로써 끝입니다. 여기서 생각이 더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공부라도 많이 했다면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지마는 바로 엊그제까지도 우리와 같이 있던 일개 목수가 이렇게 난데없이 능력을 보이다니... 그래서 무엇인가 생각을 달리했어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 아니냐. 별다른 사람이 아닌데, 거 참 신기하구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조금 알고 있다는 지식이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고 그들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보아하면 그런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사람이 가진 잘못된 편견, 얼마간의 지식이 결국은 그 사람을 버려놓고 맙니다. 저는 가끔 그런 분들을 봅니다. 좋은 학벌에 고등실업자인데 말하는 것을 보면 멀쩡합니다. 차라리 공부 안했으면 참 좋을 사람인데 아깝구나. 공부가 사람 버렸구나. 공부할 것이면 제대로 할 것이지 변변치도 않은 지식 좀 있다는 것이 오히려 탈이구나.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사람도 있습니다. 

그사람 그 공부 안했더라면 차라리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었을텐데, 그 변변치 않은 학위니 지식이니 하는 것 때문에 꼴이 말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무엇이 그렇게 대수로운 일입니까. 왜 그것을 깨끗이 비우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이 새로운 세대에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좀 더 생각해야 합니다. 좀 더 깊은 곳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학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볼 줄 알고, 신앙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깊은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 엄청난 정신적 혁명입니다. 내 잘못된 고정관념을 다 털어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깨끗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가까이 왔을 때 큰 사건을 만났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고, 좌우는 절벽입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된 백성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래서 그들이 원망을 합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데려다가 여기서 죽이려 하느냐’ 하는 소리까지 합니다. 하기야 말인즉슨 되는 말입니다. 그 앞에 있는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질 것을 몰랐거든요. 

여러분, 우리의 생각, 예측이 그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과거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다 안다고도 말고, 다 보았다고도 말고, 내 생각이 다 옳다고도, 또 옳을 것이라고 고집부리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뵙고, 오직 말씀 안에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실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나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람되고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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