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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자가 받는 복 (행 20: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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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가 받는 복 (행 20:33~35)
  

저는 개인적으로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 
선물을 사오는 것이 가장 힘든 일로 여겨집니다. 
그 사람이 무슨 선물을 좋아할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선물을 사 오면 
‘뭐 쓸데없이 이런 선물을 사왔느냐?’고 핀잔을 듣게도 됩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역시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탓임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는지 깊이 생각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는 
그것을 굉장히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을 줄 압니다. 
선물 받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기쁘죠. 선물이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들려주는 말씀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우선 준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있으니까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가진 것이 있다는 것은 이미 받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줄 수 있다는 것은 성숙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받으려고 합니다. 자기 것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성숙해 갈수록 주는 것의 가치와 보람을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꾸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면, 자꾸만 주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중심성을 버리는 사람일수록 성숙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도 주고 물질도 줍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받으려고 하는 이기심이 주는 것으로 극복되는 순간입니다. 

‘앨버트 뒤러’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에 무척 가난하여 학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신과 처지가 똑같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뒤러야! 우리 두 사람이 모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이렇게 하자.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렴. 
나는 식당에서 일을 하여 돈을 벌어 너를 돕겠다. 

네가 공부를 마치고 나를 지원하면 우리 모두 공부를 할 수가 있지 않겠니?”
이제 뒤러의 친구는 식당에 가서 열심히 일하여 매월 학비를 보냈습니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졸업할 즈음에는 그의 그림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뒤러는 자신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친구를 찾아 갔습니다. 
고마운 인사도 할 겸 이제는 그 친구가 공부를 할 차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때 그 친구는 식당 모서리에서 사랑하는 친구 ‘앨버트 뒤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친구 뒤러가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이미 제 손은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몫까지 뒤러가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친구의 모습을 지켜 본 앨버트 뒤러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고 사랑하는 친구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그 손은 노동으로 인해 거칠어진 손입니다. 
핏줄이 불룩불룩 솟아 있습니다. 손만 보면 결코 아름다운 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손은 위대한 손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사랑을 나누어 준, 희생한 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 모아진 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남을 위해 뭔가를 주는 자가 오히려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에게 뭔가를 주면 오히려 우리가 돌려받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 그것은 기쁨입니다. 보람입니다. 
받는 것이 표면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으로 승화된 기쁨입니다. 
받는 것이 일시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우리 여선교회 회원들이 김장을 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김장을 하느라 정말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지난해는 예년에 비해서 더 많은 김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시설에 있는 분들을 위해 김치를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백포기의 김치를 더하는 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김장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보니까 남자들도 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았습니다.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년에는 남선교회 회원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청할 것도 없이, 그냥 김장한다고 하면 자동으로 나오세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에게 김치를 전달해야 하는데 그쪽에서 요구하기를 
김치를 우리교회에 두고 가끔씩 조금씩 가져가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보관할 곳이 없다는 겁니다. 
고민이 되었지만 우리 여선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괜찮은 냉장고가 있어 
그것까지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을 그들에게 전달하는 날은 유난히 날씨가 추운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밤늦게 이종석 권사님과 이덕열 집사님이 전달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날씨가 추운데도 난방도 안하고 떨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난방비가 없어서 그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여선교회에서는 난방비까지 지원을 했습니다. 
또 김치냉장고가 부족해서 이덕열 집사님이 
자신의 집에 있는 것을 하나 더 주고 왔답니다. 

그런데, 여선교회 회원들이나 전달한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정말 보람 있는 일을 한 것 같다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김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여러 고백들을 듣게 되는데
임재순 권사님은 신망애 복지원을 다니면서 받는 은혜를 자주 나눕니다. 
정기적으로 그곳에 방문하면서 갈 때마다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많답니다.
주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베푸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주는 삶은 하나님을 닮는 삶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지으신 모든 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인들 주시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하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 예수님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는 마가복음 10:45에서 그가 오신 목적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뭘 줍니까? 물질 얼마가 아니라 자기 목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을 주셨습니다. 
주고 또 주어서 당신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돌아가셨을 때는 그를 위해 예비 된 무덤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고 가셨습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주시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은혜, 사랑, 믿음, 은사, 지혜, 능력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삶을 사셨기에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누구든지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33절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절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절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바울이 이런 삶을 산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는 문자 그대로 주는 삶을 산 하나의 모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바울의 삶을 본받아서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렵게 번 돈을 사회를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놓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난 21일자 국민일보에 보니 기부천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극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거금을 기부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10월 28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생면부지의 40대 남성에게 
신장을 기증한 김상훈 목사님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알고 보니 그 목사님의 사모님은 2007년에 이미 신장을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이 부부는 6명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 감탄할 뿐입니다. 
모두가 주님을 마음을 본받은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를 세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교회야사에 보면 동방박사가 네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네 번째 박사는 주님께 드릴 의약품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는 가다가 병들어 신음하는 환자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박사를 먼저 보내고 그 환자를 간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환자에게 자기 식량과 의약품을 사용하여 정성껏 간호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자 이 환자가 소생하였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소생하였을 때는 이미 
주님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의약품을 다 써버린 후였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박사는 환자 곁에 엎드려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메시아 되신 주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하여 
의약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곁에 있는 이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이 사람을 위하여 의약품을 다 써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없고 몸도 피곤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놀라운 사실을 
마음을 다하여 환영하고 경배하는 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그의 곁에 있던 환자는 놀랍게도 
주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주변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줄 때에 
그것은 곧 주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주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했던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23:5이하에 보면 저들은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받기를 좋아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주님은 저들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받으려고만 하였지 주는 덕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힘으로 통치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추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섬기고 나누고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줄 것입니까?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서 물질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을 주어야 합니다. 
먹을 음식을 주어야 하고, 입을 옷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우선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물질도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남을 도울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와주러 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옵니다. 
이렇게 도와주었다고 홍보도 해야 하고, 자랑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진을 찍히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물질의 도움은 주었지만 그들의 자존심은 빼앗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의 자존심도, 명예도 주어야 합니다. 
도움 받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보다 깊은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야 합니다. 
행3:6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수 천만 원을 준 것보다도 더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을 준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 주간, 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이티 국민들을 위해서 귀한 성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주는 자가 받는 복이 더 큽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시고, 그 은혜를 함께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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