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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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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눅 13:1~9)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한 지 약 2년 후에 작지만 자체 예배당을 구입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6월에 모든 계약을 마치고 7월 초에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첫 두어 달 동안 저도 이것저것 급하고 복잡한 일들을 거의 제가 직접 다 처리하느라고 꽤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새 주인이 된 까닭에 매일 온갖 종류의 우편물들이 우체통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는데, 저는 겉봉을 보고 대금 청구서인 경우만 처리하고 나머지 잡다한 광고물 우편들 즉 미국에서 소위 'junk mail'이라 부르는 것들은 따로 모아 놓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8월에 들어가서 그 쌓아 두었던 우편물들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들뿐이었지만 그 중에 뜻밖의 우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몽고메리 군청'에서 온 편지였는데, 이제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구입했으니 그 건물에 대한 교육세를 일 년에 몇 천 불을 내어야 하며 만약 이의가 있으면 몇 월 몇 일까지 이의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차 싶어서 달력을 보았더니 그 마감일이 이미 며칠 지나 있었습니다.
급히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신청 마감 기한이 지났기 때문에 올해는 어쩔 수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원래 교회는 비영리 단체이기 때문에 그런 세금은 면제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편지 하나 늦게 뜯어보는 바람에 돈 수천 불을 날리게 되었으니 정말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 우리 교회에 공인회계사를 하시는 어떤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께서 담당 판사에게 전화를 하고 청문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 주신 덕택에 결국에는 세금을 면제 받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여튼 저로서는 식은 땀 꽤나 흘린 경험이었습니다.
교육세는 그 몽고메리 카운티 내에 무슨 부동산을 사게 된 사람에게는 예외가 없이 일단 다 적용된다는 사실, 그리고 비단 세금 면제의 자격이 있다 해도 정해진 기한 안에 신청하여 미리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주 크게 혼쭐 한 번 나면서 톡톡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어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동시에 또한 반드시 '기한 내에 처리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적어도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사람이라면 예외가 없이 일단 적용되는 문제, 그것도 늦게 처리하게 되면 아무 효과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왜 사람은 반드시 죄 문제를 필수적으로 그리고 속히 해결해야만 하는지를 두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의 값인 사망'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까닭에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만 한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을 본문 1절부터 5절에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때 마침"이라고 한 것은, 바로 12장 끝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과 먼저 화목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시던 바로 그 시점에 이 "두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을 고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만 기록된 사건인 까닭에 정확하게 어떻게 생긴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반역죄 따위로 체포되어서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어 사형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들이 그저 예루살렘에 다니러 갔다가 빌라도의 군병들에게 하찮은 일로 시비가 벌어져 결국 그 지경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빌라도가 그들의 우상신에게 드리는 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은 실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이 소식을 전한 이유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빌라도 총독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고 어떤 정치적인 항쟁을 일으키게 만들자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죄가 많아서 그런 해를 당한 줄로 생각하면 크게 오산이다."라고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매우 보편적인 영적 문제에 결부시켜서 다루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재앙을 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는 생각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일반적인 생각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크게 볼 때, 사람의 죽음은 죄로 인하여 야기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 벌어지는 재앙이 사사건건 그 사람이 지은 죄의 경중과 똑같이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남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일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게 되어 있는 인생인 까닭에 누구든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결국 다 멸망에 이르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또 하나 인용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실로암 저수지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던 망대가 우연히 무너져서 사람들이 깔려 죽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면 그 때 죽은 "열여덟 사람"들은 정말 '재수 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 또한 마찬가지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사람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인용하셨습니다.
그 같은 일은 비단 '갈릴리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일인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남보다 재수 없어서' 일찍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은 우연이나 재수나 명운 따위들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결과로서 모든 인생에게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적용되는 벌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특별히 '남보다 죄가 더 많아서' 일찍 죽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일찍 죽은 사람이나 나중에 죽을 사람이나 둘 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통과해야 할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수 없게 일찍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나 아직 '요행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나 근본적으로는 둘 다 죄로 인하여 똑같이 망하게 되어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남다른 저주를 받은 것처럼 이 땅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 사람이나 별 탈 없이 인생을 무난하게 잘 사는 사람이나 어차피 마지막 날에는 둘 다 똑같이 자기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아이티의 대지진은 정말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천재지변이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런 재앙들이 생기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람의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서만 생각이 그치는 사람은 정말 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 역시 그와 똑같은 재앙을 지금 당장 받아도 싼, 그 재앙을 받고 죽은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조금도 없는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난 인간치고 이 죄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처음 듣게 될 때 누구라도 반감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본을 가장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정말 바로 이 사실부터 제일 먼저 깨닫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일깨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은 다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진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정확무오한 성경 말씀과 순결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서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 어느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자신이 죄인이되 '남보다 더 악한 죄인'인 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도 죄인이기는 하지만 저 사람보다는 내가 좀 더 낫다."라는 생각을 하면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을 가장 교만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던 까닭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볼 것 없이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되어 있던 죄인임을 깨닫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나야말로 남보다 훨씬 더 악한 죄인임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인생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죄 문제부터 회개로써 깨끗이 해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모든 인생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효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회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두고 6절 이하 9절의 말씀에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사실 포도원이란 문자 그대로 포도나무를 심는 곳이므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즉 그 주인은 포도 외에도 무화과가 어떤 용도로 필요했기 때문에 특별히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포도원은 포도나무뿐 아니라 무화과나무 역시 잘 자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다 갖추어진 과수원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그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는" 큰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게 실과를 구하되"라고 한 말은 '무화과나무를 심은 지 3년 후'라는 뜻이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어서 몇 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 등 일정 기간 동안 성장한 후에 이제 정상적으로 과실을 맺어야 할 때로부터 3년'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지금 올해뿐 아니라 벌써 3년 째 그 마땅히 맺혀야 할 무화과 실과를 기다려온 것으로서 그로서도 이미 기다려도 한참 기다려 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나무에 실과가 맺히지 않자 주인은 과원지기를 불러서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 포도원 주인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과목을 심으면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 포도원의 소중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벌써 몇 년째 물과 비료만 낭비하면서 아무 과실을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란 주인에게 보통 손해를 끼치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화과나무로서는 그렇게 도끼에 찍혀 땔감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고급 과실을 맺는 나무가 아무 데나 널려 있는 마른 나뭇가지들과 다름없이 취급되는 것은 과목이라는 최상급의 나무에서 최하의 존재 가치를 가진 나무로 전락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실과를 맺어야 할 때가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주인이 그렇게 찍어 불에 태워 버려도 전혀 항의 같은 것을 할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로서는 천만뜻밖에도 여기서 '과원지기'가 나섰습니다.
'과원지기'란 그 과수원에 상주하면서 1년 365일 내내 그 과수원 안에 있는 모든 나무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 과원지기가 주인의 당연한 처사를 인정하면서도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고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과원지기가 지금까지 그 무화과나무를 위해 주변의 흙을 일구어 주고 거름을 주는 일을 안 했을 리는 없습니다.
즉 그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이라는 최상의 공간에 심겼을 뿐 아니라 과원지기의 극진한 돌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과를 맺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무화과나무가 즉시 찍혀 버리지 않고 다시 한 해 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무화과나무 쪽에서는 전혀 요청할 염치도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순전히 과원지기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는 간청과 그것을 허락해 준 주인의 인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비유가 뜻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아직까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그 당연히 받아 마땅한 심판이 임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삼자가 볼 때에는 더 기다려 보았자 결코 회개할 것 같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서도 이처럼 한 번 더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실로 비상식적인, 실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가 작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직 심판이 임하지 않고 있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의 때는 실로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우리는 아주 의미심장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 비유의 제일 마지막에 덧붙여진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바로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 과원지기까지도 포기하고 주인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즉 지금 참아 주고 계신다는 사실이 심판을 아주 없애 버리신 것은 결코 아님을 일깨우시는 말씀입니다.
  
그 주인의 도끼가 일단 나무에 찍히게 되면 그 때는 더 이상 아무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즉 그런 은혜로운 새 기회가 무한정으로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무화과나무로서는 아직까지는 그와 같은 은혜의 기회가 주어질 동안 자기 생명의 존망을 걸고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용의자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될 때, 피고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대신 감형이나 관대한 처분을 기대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자기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 확실하고 법정에서 도저히 부인하거나 감출 길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처럼 '유죄 인정'(pleading guilty)을 하는 것만이 본인에게 최선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해야 유효합니다.
  
그러지 않고 처음에는 '무죄 주장'(pleading not guilty)을 해서 재판받을 것 다 받고 유죄 판결이 떨어지고 난 후에 그 피고가 "그 판결이 맞습니다. 본인의 유죄를 인정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같아도 그 시기가 늦게 되면 그것은 이미 그 받게 되어 있는 형벌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효력은 전혀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정작 눈앞에 벌어지게 되면 그 때 가서야 "아이구,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회개'라고 인정해 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시기가 늦은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마 25:30) 자책과 후회일 뿐, '죄 사함의 관대한 판결'을 얻을 수 있는 '유죄 인정의 회개'는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시효 기간 즉 하나님의 자비가 계속되면서 아직까지는 기다려 주시는 동안에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시효 기간이란 것은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촉박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겠지.'라고 여유를 부리는 것은 정말 큰코다칠 생각입니다.
  
주인의 도끼가 휘둘러지고 나무뿌리를 찍게 되면 그때에는 이미 '죽기 직전'이란 여유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 경향교회라는 '포도원'은 과원지기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돌보아 주시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기다려 주고 계시는 축복의 공간이며 우리의 생명이 아직까지는 영위되고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정말 소중하게 주어진 마지막 은혜의 때인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꼭 회개해야만 합니까?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로 말미암아 영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우리가 회개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지금 당장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시간이 지난 후 심판의 자리에 가서 하는 회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그 서약 제1조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마땅히 그 진노를 받을 만한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제2조 "예수 구원"이 의미가 있으며 정말 고마운 구원이며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뜨겁게 공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용서'가 별 죄도 없는 사람, 나름대로 양심껏 사는 사람을 구원해 주는 '싸구려 용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마땅히 진노를 받아야 할 죄인, 열 번 지옥에 가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을 무조건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실로 놀라운 사죄 은총입니다.
그러니 그런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넘쳐서 그 다음의 세례서약 제3조 '경건생활'과 제4조 '교회중심'의 삶이 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완벽한 치료를 위해서는 일단 병든 조직의 세포를 완전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남겨 두면 새로운 치료를 받아도 또 썩게 되고 재발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회개'를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죄를 무조건 용서해 준다는 십자가 대속을 받아들일 필요가 왜 있겠으며 고맙게 여겨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처럼 진정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는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옛 것은 깨끗이 사라지고 완전히 새 것이 된' 완벽한 치료이기 때문에 절로 건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을 공로를 쌓으려고 정말 '마지못해서' 선행을 한다는 사람과 그처럼 마땅한 진노 아래 있던 자신이 예수 십자가 공로로 완전히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게 된 성도가 '감사와 기쁨에 넘쳐서' 절로 충성하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가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타락 이후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 3:10) 때문입니다.
누가 '더 악한 죄인'이고 누가 '좀 덜한 죄인'인가를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미 '회개한 죄인'이고 누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한 죄인'인가 하는 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예외가 없이 누구나 꼭 하나님 앞에서 처리해야만 할 '필수 과제'입니다.
또한 회개는 각 사람이 심판주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지금 당장 해 두어야만 할 '최우선 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마지막 날의 심판을 두려움 없이 예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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