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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무엇으로 살까?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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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으로 살까? (마 4:1~11)   
  

<유혹으로서의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내용입니다.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는 가운데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test, 선생님이 학생에게 시험 문제를 주어서 실력을 측정하는 것과 같은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의 시험이지요. 둘째, trial, 시련과 연단의 의미로서의 시험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보려고 할 때 불같은 시험이 임하는데, 이와 같이 시련으로서의 시험은 우리를 연단시켜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셋째, temptation,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3절과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마귀에게로부터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유혹으로서의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마귀와 타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세 가지 유혹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역시 매일 이 세 가지 유혹을 받고 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어떤 유혹이었습니까?

첫째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리셨던 예수님께 이 유혹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식욕에 대한 욕구는 정말 큰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에는 빵조각처럼 생긴 석회석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시장기를 느끼셨던 예수님은 일순간 그 돌멩이들을 빵들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이지요. 

신명기 8장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뒤 광야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먹을 것, 입을 것,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등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가 중요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던 것이지요. 

이제 마귀가 예수님의 굶주리고 계시다는 가장 큰 약점을 비집고 들어와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어보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먹는 것,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기에 보면 떡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떡으로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셨다는 것이지요. 먹을 것, 입을 것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에 이것은 달리 말해서 돈의 중요성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먹을 것, 입을 것, 즉 돈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보다 먹을 것, 입을 것, 즉 돈에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해도 눈앞에 보이는 물질에 더 마음을 두고 거기에 굴복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즉 돈 몇 푼 때문에 마귀에게 굴복당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할 것입니다. 

맑스-레닌주의, 즉 공산주의는 사람에게 빵의 문제만 해결되면 다 잘된다는 유물론적인 사고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동구라파를 비롯한 공산권이 망했습니다. 빵의 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빵과 하나님의 말씀, 둘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앞세워야지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에서가 배가 고픈 나머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넘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들판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는 허기가 저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 야곱이 팥죽을 끓여 에서를 유혹합니다. 그 때 에서는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 32).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하냐며 팥죽 한 그릇에 굴복 했습니다. 사탄의 첫 번째 유혹에 걸려 넘어간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서 12장 16절은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경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돈이 참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욕심에 굴복 당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앞세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전 꼭대기로부터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습니다. 

5절과 6절 말씀을 봅시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귀는 시편 91편 11절과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전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하듯이 멋지게 뛰어내려도 하나도 안 다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한 마디로 쇼맨십을 하라는 유혹이지요. 사람의 눈과 귀를 적당히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가 되라는 유혹입니다. 어떤 진리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감각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인기 배우가 되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명하다는 부흥 강사님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나름대로 인기를 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귀의 유혹에 굴복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성전 꼭대기에서 땅에 떨어져도 발이 다치지 않을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 하셨지 사람의 인기나 끄는 어떤 기적적인 쇼맨십을 통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 번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온갖 물질적인 축복과 건강과 성공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처럼 광고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뒤, 한 번 떨어져서 머리털 하나 안 다치는 것을 보여주라고 유혹하는 마귀처럼 예수님을 우리 마음대로 테스트하고 조종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기나 끌기 위해서 마음대로 조종하고 시험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자유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유혹입니다. 

8절과 9절을 봅시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에게 절하면 온 천하의 영광을 다 준다는 유혹입니다. 이 세상과 타협하여 권세와 영광을 누리라는 명예욕, 혹은 권력욕에 대한 유혹이지요. 하나님의 뜻보다는 명예와 권력에 더 탐닉하여 세상과 야합하라는 유혹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와 결탁하면 온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다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이런 유혹을 수없이 받습니다. "나에게 절하면 내가 이런저런 영광과 권력을 주겠다." 분명히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우리는 순간적으로 굴복합니다. 마귀에게 절을 합니다. 하지만 마귀에게 절을 해서 일시적인 유혹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항상 비참합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이 아니라 천하만국의 수치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 앞에 절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한 분에게만 경배할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을 때 하나님만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고 해서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 일시적으로 천하만국의 영광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다 허무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여드리고 그 분만 경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오래 갑니다. 하나님 이외의 세상의 그 어떤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권력과 영광을 구하여 마귀와 타협할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게 됩니다. 오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만 높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넘어서>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한 1서 2장 16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서 '육신의 정욕'은 물질적인 소유욕과 관련됩니다. 마귀가 돌멩이들을 떡덩이로 만들어보라는 유혹이지요. 그 다음에 '안목의 정욕'은 허영심, 인기주의와 연결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쇼맨십을 보이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이생의 자랑'은 명예욕 혹은 권력욕과 연결됩니다. 마귀에게 절만 하면 천하 영광을 다 주겠다는 그런 유혹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유혹을 수없이 받으면서 생활합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들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진리와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유혹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했는데 유일한 공격 살상용 무기가 있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 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무엇으로 삽니까? 먹을 것, 입을 것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잠언서 18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서 29장 23절도 말씀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지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성실성을 가르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가정에서나 세상에서나 늘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베푸는 삶을 살 것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행 20: 35).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풍성해지고 윤택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광야에서 당한 유혹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 물리치셨습니다. 그 결과 11절은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우리도 마귀의 유혹을 다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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