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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 6: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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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 6:30~44)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얼마나 유명한지 사복음서 네 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어느 정도 훈련되고 나자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서 저 멀리 보내시며 사역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가서 정말 힘써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사역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바쁘게 사역했는지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저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거라.’ 

그래서 배를 타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적한 곳에 가서 쉴려고 했는데 비밀이 샜습니다. 백성들이 먼저 알아보고 배를 타고 도보로 떼를 지어 달려왔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피곤하심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들 앞에 나아가 온종일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은 그렇게 피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 앞에 또다시 서신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헬,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말씀은, 더 정확한 우리말 어감으로 번역하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는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였고, 기진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餓死直前狀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牧者)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롯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멋진 성전을 지어주고 그들을 위해 빵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외형적인 것을 약속하면서 자신이 좋은 목자이니까 자기를 따르라고 자신을 따르면 더 나은 이 땅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백성들에게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막상 오늘 이 본문 앞을 바로 보면 세례의 요한을 목 베어 죽입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주는 암시는 명료합니다. 

너희들이 세례의 요한 한 사람의 죽음을 신경 쓸 게 뭐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일에 크게 신경 쓰지 마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 성전을 지어주지 않느냐. 너희들에게 빵을 제공해 주지 않느냐. 그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다 하나의 마음이 되어 헤롯의 그 제안에 타협하고 맙니다. 그의 암시를 받아들이고만 거죠. 그래서 그들은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이건 자신의 영적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건 상관없이 외형적인 성전을 지어주고 빵을 제공한다는 그 말에 다 손을 잡고 헤롯 밑에서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는 참 목자가 없었어요. 진실 된 목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몇 일간 음식도 못 먹고 너무나 지친 상태에서 그 모여든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종일 빵이 아닌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목자가 없는 삶과 잘못된 목자를 따르는 삶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에스겔 34장 8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백성들의 고난의 이유가 무엇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목자가 없었어요. 두 번째는 거짓 목자들 때문이었어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예요. 우리는 속아 삽니다. 날마다 돈이 없는 것이 내 인생의 문제라고.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에요. 돈의 문제가 아니고, 질병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된 목자를 쫓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불행이 온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셨습니까? 단순히 배고픈 자를 먹이기 위해서요?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 예수님의 심중을 모르시는 거예요. 오늘 예수님이 단순히 배고픈 자를 먹이기 위함이었다면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배고픈 자들이 없었어야합니다. 오늘 우리의 주위에도 배고픈 자는 없었어야 해요.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불렀던 배는 잠시 후 다시 고파왔습니다. 

1.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백성들은 눈앞에 보이는 떡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단지 예수님이 주시는 육신의 떡만을 먹은 자는 그 다음날 다시 배고픔을 느꼈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떡을 주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양식이 없음이 아니에요.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에요. 질병이 우리들의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게도 낫기 원하는 병은 나은 후에 언젠가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참 목자가 없는 것이라고. 우리들이 잘못된 거짓 목자를 따르는 것이라고. 돈이 내 목자인줄 알고, 명예와 쾌락이 내 목자인줄 알고, 이 세상의 성공이 내 목자인줄 알고 쫓아가는 그것이 문제라고요. 예. 그렇게 우리는 종종 문제의 근원을 깨닫지 못합니다.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인데 나타난 외형적인 우리의 문제인 듯 신기루 같은 것을 쫓아다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러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알지 못하고 늘 외형적인 떡을 쫓아다녔습니다. 때로 떡이 그들에게 목자가 될 것이라고 착각하며 방황의 삶을 살았어요. 그 옛날 벳세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 목자이십니다. 아멘! 

그분은 우리의 방황을 끝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잠시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참 목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은혜도 주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풍성한 생명의 은혜로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고 살면 우리의 삶에 자꾸만 더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축복을 다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난에 찌들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늘의 기업을 약속받은 주님의 자녀답게 부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축복을 나누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건강하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면서 헌신된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온갖 걱정에 파묻혀 힘들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그 분이 제자로 부른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주어라!” 3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여러분 말이 되는 소리예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니요. 돈 한 푼 없는 제자들이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서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너희가 주어라하는 이말 앞에 제자들이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찾아 낸 것은 겨우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그것으로 장정만 오천 명, 합하여 이만 명을 먹일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여러분 우리는 다 압니다. 우리 안에 능력이 없음을. 우리에게는 장정 오천 명을 먹일 능력이 없어요. 다시 말해 참 목자가 될 능력이 없어요. 그날 제자들 역시 능력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말씀을 붙들고 그데로 순종합니다. 순종하면서 떡을 가지고 들판으로 나아갑니다. 

두려움도 있었고,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저들을 먹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이 순간, 그들은 주님만 붙든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 순간!! 자신들도 놀라는 일이 눈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끝도 끝도 없이 광주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 떡을 보고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바로 이일을 말씀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된 목자라는 것을 알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말씀 앞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이와같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말씀 앞에 순종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금 저 배세다 들?의 풍요로움을 보십니까?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기적의 식탁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의 가정에서 진정한 목자가 되기 위하여 애쓴다면, 우리의 가정은 얼마나 달라질 것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 명령에 엎드려 나의 직장에서 단순히 내 성공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고 진정으로 돕기 원하는 목자가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것이겠습니까? 41-43절 다시 한 번 볼까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니까? 이 놀라운 기적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해요. 아버지 되기도 부족하고, 어머니 되기도 부족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건 차라리 쉬울 수 있어요. 그러나 가정에 가서 내가 낳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내 자녀의 올바른 아버지 어머니 되기도 부족해요. 턱 없이 부족해요. 교회에서 목자가 되기에도 부족한데 더구나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목자가 되다니요? 여러분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차라리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말도 안 되는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능력으로 내 가족과 이웃을 살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린다면 목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내 삶을 작은 물고기 두 마리 같은 이 삶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린다면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고 본문은 약속하십니다. 

1955년 어느 가을, 미국 오레곤주, 저 시골 유게너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그 회관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어요. 농사짓는 농부들로 구성된 마을에 위로하기 위해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그 영화는 그들이 전혀 모르는 나라 동방에 전쟁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지금 아이티에 지진같이 그 나라에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고아가 버려져 있는 곳. 그 나라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어요. 한국이 어디일까?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부부의 마음속에 부담이 생겼어요. 그렇게 많은 고아, 처절한 거리, 영화의 장면이 마음에 남아있지만 그들 부부는 얘기했어요. ‘우리 같은 농사꾼이 뭘 할 수 있어.’ 그런데 그 음성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농터에 절반을 털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8명의 고아를 입양해 미국으로 데리고 갑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용기를 보고 그 아이들을 나누어 자기가 키우겠다고 두 명씩 두 명씩 다 데리고 갔어요. 다시 그 부부는 나머지 농토를 다 팔아서 한국에 나오고 마침내 그들은 농사를 그만두고 한국에서 고아를 데려다가 미국에 입양시키는 일에 자신들의 전 생애를 들였어요.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바친 거죠.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어요. 그들 부부를 통해 일만 육천 명의 한국의 고아들이 그들의 생애 기간 살아있는 동안 미국에 입양 되요. 여러분 그들 부부의 이름이 바로 헤리 홀터에요. 홀터 아동 복지회의 설립자입니다. 그들은 공부를 한 적이 없어요. 재산도 없었어요. 여러분 만일 홀터 아동 복지회가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버려진 고아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범죄자가 되어 우리나라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을까요? 수 만 명의 고아들이 미국에 건너가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홀터씨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름도 아무 관계도 없는 이 한국 땅에 수많은 고아들의 참 목자가 되었어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은 약합니다. 내 힘으로 내 가정과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주의 심정으로 목자없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내게 있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 앞에 드린다면, 헌신한다면, 이 우주를 지으신 주님이 나를 통해, 당신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경제관을 보십시오. 전부 소유의 개념이 나를 중심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보면 임금 한 삶을 먹이기 위해 수많은 신하와 식솔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5000명이 달려들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한사람이 5000명의 몫을 감당하는 게 복음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5000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이 땅에 그 생명의 예수님을 나누어야합니다. 사람이 궁핍해지면 나누기 싫어집니다. 나누려 해도 나눌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것이 적다 하드라도 그것을 주님께로 가져가고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면 다 풍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하고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풂에는 기적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를 베풀면 예수님은 거기에 손을 얹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열배 백배의 기하급수적 은혜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던 오병이어의 사건은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 역시 허기졌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숨기고 움켜쥐려는 당연한 욕구와 내면의 유혹을 억누르고 자신의 것을 내어 놓았을 때, 자신은 물론이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의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소년은 일평생의 삶의 뼈대가 되었을 베풂의 기적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우리가 가진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했던 일이 주님의 의해 차고 넘치게 이루어졌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님께 드려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헌신만 있으면 오늘 우리에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복된 신앙이 무엇입니까? 받고 드리는 게 아니고 드리고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로 한 해를 출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무엇으로 희망을 줄 수가 있습니까? 복음입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세상에 희망을 주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거창한 것 드리는 게 아닙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드렸습니다. 삼손은 마른 나귀뼈를 드렸습니다. 

오늘 베세다 들녘에는 어린 아이가 가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렸습니다. 능력의 신앙은 받는 게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지진으로 초토화 된 아이티를 향해 온정의 손길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에게 빵뿐만 아니라 빵과 함께 복음을 주는 오병이어의 역사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번에 우리 교회에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우리 교회 30여명 보냈습니다. 잘 섬기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무척 어려운 때입니다. 다 부족하고 궁핍한 때입니다. 이럴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고 인색해지며 남을 염려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너도, 나도 내 것 챙기기에 급급해지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주리는 이 음성 앞에 주께서 베푸실 넘치는 은혜를 여러분이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는 복된 공공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교회 안팎의 경제난도 넉넉히 극복해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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