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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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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무리의 본이 되라(교사임명주일)- 벧전 5:1~6

뉴욕에 가면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 우뚝 서있습니다. 프랑스 조각가 바르톨디(Frederic Auguste Bartholdi)가 10여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거대한 작품입니다. 바르톨디는 조각상의 제작을 요청 받았을 때 자유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았습니다. 미술 전문가들은 훌륭한 사상가나 영웅을 모델로 하라고 권했습니다. 여러 위인들을 떠올렸지만 별로 감동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을 낳아 기르고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했습니다. 존경할만한 어머니, 사랑의 마음이 넉넉했던 어머니를 모델로 자유의 여신상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뉴욕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조각가 바르톨디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자녀들이 모델로 삼고 싶을 만큼 본을 보이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소망입니다. 하지만 누구를 본받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배우느냐 도 중요하지만 '누구로부터' 배우느냐가 더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의 '본이 되라' 는 말은 '듀포스'라는 원어인데 '똑같은 모양을 나오게 하는 주물' 이란 뜻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살펴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비춰진 모습을 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말합니다. 탁월한 리더가 되려면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는 장로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칭합니다. 여기의 장로는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보다“성숙한 지도자가 된 사람" 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양 무리를 맡은 지도자는 성숙함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명령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주님의 피로 사신 양을 먹이는 일을 최고의 사명으로 여기며 감당했습니다. 아울러 함께 장로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일에 본이 되라 권면하였습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예수의 피로 사신 양들을 가르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장로는 높은 신분이 아닙니다. 계급도 아닙니다. 목자의 직분임 알아야 합니다.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양 무리를 치는 직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임명받는 교사들은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를 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지도자들입니다. 맡겨진 영혼을 이끄는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심정으로 일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양 무리의 본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백년 전의 콩고는 백인들의 공동묘지라고 불려졌습니다. 선교사역의 첫 기간이 끝나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콩고 선교사였던 조지 그렌펠(George Grenfell)역시 4명의 자녀를 무덤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렌펠 선교사는 우호적으로 지내다가 이유 없이 독화살을 쏘아대는 식인종들, 선교사를 대적하는 천주교와 벨기에 정부의 박해를 무릅쓰고 30년의 고통 속에서 선교를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그렌펠 선교사는 콩고에 부흥의 물결이 휩쓰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칼과 창으로 위협받고 쫓겨났던 곳에서 그를 환영하는 인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오직 양 무리를 치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쓰며 선교했던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은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에 직면하였을 때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기 원하시는 뜻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물결이 센 개울이 있었습니다. 개울을 건너던 부족들이 물결에 휩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을의 추장이 명령합니다. "이제부터 개울을 건널 때는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든지 어깨에 메고 건너라" 부족들은 그냥 건너가기도 어려운데 왜 무거운 돌을 지고 가야 되느냐며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추장의 말대로 돌을 메고 건너갔더니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맡겨진 사명은 부담이나 짐이 아닙니다. 복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뜻으로 여겨 불평하여 하지 말고 오직 순종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원함으로 행해야

오마이뉴스(Ohmynews) 대표인 오연호 기자의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80년대 반미(反美)기자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잘못한 일을 찾아내어 발표하는 일을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잘못을 취재하여 책을 네 권이나 썼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격심한 빈부격차와 도덕적 타락 등 수많은 사회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망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미국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그들의 저력이 무엇인지 연구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국은 바런티어(Volunteer) 정신이 있기에 망하지 않는다" 즉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시간, 한 달의 며칠은 자원봉사를 해야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정한 시간에 봉사하기 위해서 기꺼이 훈련도 받고 자원하여 일을 합니다. 자신의 형편이 어렵거나 가난하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 년에 약 4천만 명이 자원봉사에 나선다고 합니다. 자원봉사의 성적이 없으면 대학도 진학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무엇을 해도 자원하여 봉사하려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목자들은 예수를 사랑함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부득이함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의무감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양무리들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봉사는 자원하여 하는 일입니다. 수동적 봉사가 아닌 능동적 소명에 의해서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야 합니다.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것이 되면 즐거움을 빼앗기게 됩니다. 

양무리를 인도하는 목자의 직분이 겉으로는 고상해 보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양들을 겸손과 눈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눈물로 훈계한 바울에게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 일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양을 가르치는 일이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요, 하나님의 뜻으로 깨달아질 때 자원함으로 일하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주를 사랑하는 표현이 양 무리를 돌보는 것으로 알았기에 평생토록 양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자원함으로 일하게 됩니다. 부득이함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겨진 양무리들을 자원하여 섬기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장하는 자세를 버려야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드센(Bertel Thorvaldsen)은 예수의 조각상을 만들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모습을 승리한 왕의 형상으로 조각하였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 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입니다. 조각이 완성되던 날, 그는 자신의 작품이 걸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끼였고 물보라들이 열려진 창 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조각상을 보니 습기로 인해 조각품이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다시 조각을 시작하려던 그는 매우 난감했습니다. 그때 신비한 힘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예수상(Christus)을 다시 조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뜻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을 주장하는 자세가 아닙니까?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행동하고 자신이 노력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바로 섬겨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맡기운 자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기 쉽습니다. 주장한다는 것은 지배하고 주인 행세를 한다는 말입니다. 맡겨진 자들을 마치 종 부리듯 하는 자세입니다. 지도자들은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목자임을 명심하고 일해야 합니다. 양들은 앞서 가는 목자의 뒤를 좇아갑니다. 목자가 앞설 때 양 무리는 안심하고 따라갑니다. 개척 정신이 없는 양은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앞서가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양들이 따라갈 수 있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을 섬기는 자세로 인도해야 합니다. 명령이나 권위보다사랑으로 양무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는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는 것보다 종이라 부르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모습을 종의 모습으로 여겼습니다. 종들이 주인 앞에서 허리를 동이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낮은 자세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는 교사들과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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