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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과 영광 (막 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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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영광 (막 10:32~45)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곁에서보다도 성격이 사나운 사람 곁에서 겸손의 덕을 닦기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인종의 아름다운 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서 보다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덕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절대로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접받고 싶고 편히 살고 싶고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은 모두의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좋은 친구들과 이웃들이 항상 곁에 있으며 남들 앞에 결코 기죽지 않을 만큼 그렇게 지위도 갖추고 살 수 있다면 이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거기다가 맑은 정신에 건강한 몸까지 갖추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아 하나 더한다면 자녀들도 다 잘 되어야겠죠. 그래서 사방을 둘러봐도 평안이 가득하고 자리에 누운즉 아주 단잠을 이룰 수 있는 삶이요 자고 일어나면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좌절감에 깊이 빠진 사람이 담임 목사를 찾아가 신앙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고 부모님께 받은 상속 재산도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는 항상 열등의식과 좌절감, 자학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천한 저에게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노신사 한 사람이 접수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보시오, 이 호텔에서 제일 값이 싼 방을 안내해주시오.”
그런데 접수원이 이 노인을 보는 순간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대 유명한 거부 록펠러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당신은 록펠러 씨가 아니십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이 접수원은 “아니, 당신의 아들은 우리 호텔에 오면 언제나 제일 비싼 방을 구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제일 싼 방을 구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록펠러는 안경 너머로 접수원을 바라보더니만 “내 아들에겐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다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목사님은 “형제님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당신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인줄 아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아니,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고요”하며 놀랐습니다. “형제님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형제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네,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부요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십니까. 형제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은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 영광중에서 자기들이 좌우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지금까지 주님을 따르면서 한 수고도 있고 하니 한 자리를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한 자리씩은 주실 것이지만 그래도 그 좌우편 자리는 자기들 형제가 차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씩씩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말만 안 했을 뿐이지 그들 역시 속셈은 같았습니다. 

어디가나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줄을 대고 줄을 섬으로 해서 무언가 내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하면 그 줄서기를 싫다고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다른 제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배우고 함께 수고한 다른 제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자기들 형제가 좌우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말로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 기도처럼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여서 “하지만 모든 것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했다면 다른 제자들이 씩씩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이들이 과연 그런 자리를 요구할 만큼 합당한 수고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제자 12명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하지만 간혹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더불어 야고보와 요한 형제 3명과만 띠로 움직이실 때도 있었습니다. 변화산에 오르실 때가 그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주의 영광중에 가운데 자리는 베드로에게 양보하고 그 다음 자리인 좌우편의 자리에 앉기를 원한 것은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수고보다는 영광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권리만 생각했지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도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리는 누리려고 하면서 의무는 소홀히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대접을 받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수고와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누리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비난 밖에 더 따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지막 이들은 착각은 주님 나라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 따르는가를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게 되기를 원했지만 주님 나라의 영광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서 오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하는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주님 약속하셨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들 형제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제자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생존한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생각하던 영광과는 달랐지만 주께서는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자리에 앉도록 이들 형제를 희생과 헌신의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누가 나를 종 부리듯 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말고 왜 나만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런 수고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사람들은 환난과 시험이 닥칠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하고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는가?” 하고 물어보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금세기 초에 중국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루스 펙트 여사가 핀란드에서 같은 기차를 탔던 한 여인에 대하여 제일 먼저 느꼈던 것은 그 여인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곧 그 여인의 오른쪽 손이 없고 그 자리에 금속의 의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화 도중에 그 여인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폐병에 걸려 이제 본국으로 소환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여인은 고국 핀란드에 돌아와 농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중 어느 날 탈곡기에 손이 걸려 오른손이 절단된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오른손이 절단되었을 때 주님을 바라보며 “주여 오른손이 없는 나에게 이제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묻지 않고 “무엇을”이라고 주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이라고 묻는 여인에게 그 농장을 나이든 크리스천을 위한 양로원으로 개조토록 하셨으며. 그것을 통해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놀라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고 자기의 생을 바치는 순간 그가 첫 번째 한 일은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고 물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놀랍게 들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섬기는 종의로서의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니은 지금 고난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인데 그들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 받으며 채찍질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관심은 이 고난과 다시 살아난다는 것에 집중이 되었어야 합니다. 왜 고난당해야만 하는 것인지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묻고 깨달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온통 영광으로만 가득합니다. 

그것도 아무런 고통과 괴로움도 없는 영광뿐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반복해서 고난 받을 것을 말씀하셔도 그저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없다고 할까요? 어쩌면 그토록 주님이 고난을 말씀하시는데도 그들 누구 하나 그 고난당하신다는 데 대해 그토록 무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반드시 광야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경찰서에 끌려갔었습니다. 1930년 7월에 경찰서에서 풀려나온 후 평양 산정현교회 주일예배 때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내용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게 해주고 도리어 상 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용감한 신자도 넘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족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야 수년간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뿐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원한 영화의 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죽음은 오히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야고보 그의 죽음은 오히려 가장 쉽게 영광의 자리로 나아간 길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어떻습니까? 한 평생 당한 고난입니다. 죽기를 원해도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순교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도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는데도 그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죽어도 몇 번을 죽고도 남을 텐데 왜 자기는 죽이지를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 죽임을 당하는데 요한 사도는 어째서 죽이지를 않는 거지? 

혹시 저가 우리를 고발하는 변절자는 아닌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혼자서만 버림 받은 느낌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고생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게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자기를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영광이라는 것 섬김의 종이야 말로 영광중의 영광이라는 것을....

그렇습니다. 고난은 영광입니다. 누가 나를 외면하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는 감사할 일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이 고난이 없이는 대속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 길을 죽음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그게 바른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영원히 멸망할 길입니다. 그 길을 좋다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게 세상에 가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다고 쫓아가는 길입니다. 한데 그 끝은 멸망입니다. 영광의 길인 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까 낭떠러지입니다.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입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주님 안에서 우리를 허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좁고 험해서 그리로 가는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많은 비난이 따릅니다. 욕설이 난무합니다. 알게 모르게 당하는 불합리한 처사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불이익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될 때 이윽고 주님은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 미국인 부부가 독일의 오베라머가우에서 유명한 수난극을 관람했습니다. 공연 후에 그들은 예수 역을 한 배우를 만나려고 무대 뒤로 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편은 배우가 극중에서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사업사인 그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 줘요.” 그는 등을 구부리고는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며 낙담하여 그는 배우를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죠?” 배우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잔은 마시지 못하면서 그분의 옆에 앉게 해 달라고 바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만나게 되면 나는 내가 속이 빈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잔을,  고결함과 뜨거운 동정심과 용기 있는 신앙고백과 섬김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주님 앞의 좌우편 자리를 생각하지 말고 먼저 기꺼이 고난의 잔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부터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난이 먼저입니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될 수도 없고 영광의 자리도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먼저 고난의 종 섬김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시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메랑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사냥도구로서 던지면 다시 던진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부메랑 효과란 바로 자신이 한 어떤 행위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이솝 이야기에 늙은 사자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다. 생쥐가 사자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생쥐는 살려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하여 사자는 생쥐를 살려줍니다. 어느 날 사자가 덫에 걸렸을 때 생쥐가 그물을 갉아서 풀어줬습니다. 

성경은 온통 부메랑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고도 했습니다. 빈 평안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지 않으면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섬김과 베풂은 절대 공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베푸는 자에게 베푸십니다.
그러기에 결코 고난의 잔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를 힘들게 하거든 더 잘 해 주십시오.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거든 더 가까이 하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비결이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있는 길이자 동시에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은혜의 자리에 다 나아가시기를 그래서 기쁨으로 고난의 길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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