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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 (눅 4: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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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보내신 목적 (눅 4:16~19)

 
지나치게 열심히 일만 하는 어떤 남편이 있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출장도 자주 다녔습니다. 하루는 출장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도 오늘부터 사업을 하나 시작할래요."

남편은 갑자기 무슨 사업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양계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양계장은 무슨 양계장이냐고 남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수탉 두 마리와 암탉 한 마리를 가지고 양계장을 운영하겠다고 했습니다. 양계 사업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수탉 두 마리와 암탉 한 마리로 양계를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수탉이 너무 자주 출장을 다니니 한 마리가 더 필요하지 않겠어요?"

이어서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가정을 뭐라고 생각해요? 가정은 돌보지 않고 끊임없이 일만 하며 살래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일은 해요?"

우리 주위를 보면 이런 경우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그 많은 일들은 도대체 왜 하고 있는 것인지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일들이 알고 보니 사실 아무 것도 아니구나. 더 소중한 일을 제쳐 놓고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했구나."
뒤늦게 후회할 때도 많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 까닭은 대체로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알지 못할 것 같으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습니까?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그 험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느냐는 말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 때문에 오셨고 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 아니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분명히 알 수 있으셨습니까? 오직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에 알 수 있으셨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잉태되실 때부터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잉태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 충만함을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3장 21절, 22절 말씀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또한 공생애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실 때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
본문 말씀 앞에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4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습니다. 특히 성령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본문 18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오늘 우리도 삶의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런대 삶의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 알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일찍이 사도들도 성령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메시아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을 가장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흡사 괴물처럼 등장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합니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일터가 필요합니다. 먹을 것이 없고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음이 단지 구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두 번째 목적은 자유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자유를 생각하면 어떤 사람들이 머리에 떠오릅니까? 우선 종이나 노예가 생각날 것입니다. 또한 옥에 갇힌 사람들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포로 된 자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해방되고 옥에서 풀려나 자유를 되찾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포로라는 것은 단순히 종이나 노예, 또는 옥에 갇힌 것만 아니라 인간을 결박하는 모든 악한 것들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결박하는 악한 것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가난이 모든 불행의 뿌리인지 모릅니다. 돈에 얽매인 물질의 노예, 명예와 성공에 집착하는 노예, 정욕에 집착하는 노예, 그 밖에도 인간을 얽어매고 있는 악한 것들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강권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목적은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
실제로 시각 장애인들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은 그들이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눈 먼 사람이란 다만 육체적인 시력을 잃은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볼 수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은 다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이 곧 복음의 역사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에서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한 자와 복음, 얽매이고 눌린 자와 자유, 눈 먼 자와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눌린 사람, 눈 먼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즉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 택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섬김과 돌봄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교회가 이 사명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교회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교회는 꾸준히 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그런 삶을 살 때에 우리는 삶의 참 목적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살 집을 지을 것인지, 학교를 지을 것인지, 아니면 예배당을 지을 것인지... 예배당을 지으려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도록 지어야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라는 건물을 지어서 무엇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여기에 살게 하시는 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지 못할 것 같으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 삶의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주님이 그러셨듯이 가난한 이웃, 병든 이웃, 소외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참 사랑을 전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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