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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디옥 교회의 설립 (행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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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의 설립 (행 11:19-30) 
 
 
오늘 말씀은 최초의 이방인 교회이며 이방 세계 전도의 심장부인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누가는 안디옥 교회가 사마리아 교회처럼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자들로 말미암아 탄생했음을 밝힙니다(8:1). 스테반의 일로 환난이 일어났을 때에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먼저 “유대인에게만” 도를 전했습니다(19). 여기서 도를 전했다는 말은 복음 설교를 의미하지 않고 일상의 대화중에 말씀에 대해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구브로(키프로스)와 구레네(키레네)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어떤 사본은 이들을 헬라계 유대인들로 기록하고 있지만 19절과 대조되는 문맥의 흐름상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유대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을 이방인이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개종하지도 않은 이방인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다는 것은 상상치 못할 일이었지요. 이런 유대 기독교인들의 사고를 바꾸기 위해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고 예루살렘 교회에 한바탕 소통이 일었던 것을 11장 전반부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흩어진 자들 중에는 성령님의 비상한 간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음을 깨닫고 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도 아닌 일반 성도들이었고,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도피 중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5:26).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님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기 전까지는 이방인이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십자가로 새 언약을 완성하신 후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셨지요. 환상만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언약이 구속사를 통해 진전되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음을 깨닫고 성취된 의미를 따라 말씀을 순종하는 일 역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야단스럽지 않고 눈에 확 두드러지는 기적도 없지만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지요. 

흩어진 사람들은 정든 고향과 친척을 떠나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처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따지자면 자기 코가 석자인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일상의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합니다. 더구나 유대의 오랜 전통을 넘어서서 이방인들에게 말입니다. 비록 무명의 성도들이지만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 있어서는 베드로나 예루살렘 교회의 어떤 지도자들보다 선각자였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자신의 어떤 열악한 형편도 넘어서게 하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흩어진 자들”을 통해 사마리아 교회가 세워졌던 것처럼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음을 잊지 않고 기록해 놓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그들을 귀히 쓰셨음을 알립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그들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던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 기적이나 환상을 통해 쓰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본문처럼 유기적으로 쓰십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삶의 활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역사하시지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의 대부분도 초자연적인 황홀경 속에 있지 않고, 일상의 삶 속에서 각자의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셨지요. 

본문에서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주께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입니다. 동시에 흩어져서 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사실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사실이지만, 사람이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애쓰고 힘씀 없이 하나님의 능력만 기대하고 있는 신앙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워져 가는 일에 있어서 성도는 수동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의 곤란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전심전력으로 힘써야 마땅합니다(딤전 4:15; 딤후 2:15).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진 사람들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고넬료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미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지요. 성령님께서 기막히게 타이밍을 조절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즉시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자들처럼 구브로(4:36) 출신인데다가 헬라어를 잘 했으므로 적격자였겠지요. 바나바는 안디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했습니다(23). 바나바의 은사는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는 달리, 이미 복음을 영접한 사람을 잘 권면하여 더욱 성숙케 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배 아파하거나 자기와 비교해서 속상해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반면 바나바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인해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안디옥의 초신자들을 권면했겠지요. 성경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 평가하며 그로 말미암아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24)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 무리”는 ‘충분하다’는 뜻인데 21절의 “수다한 사람”보다 더 많은 수를 의미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양적인 성장으로 바나바 혼자서 사역하기에 버거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동역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갑니다(25). 이는 사울의 소명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 이방인들을 섬기는 적임자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찾으러”라는 말은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집 한집 물으면서 부지런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나바가 기필코 사울을 찾으려고 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무엇을 하기 원했을까요?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26a)라는 말씀에 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체계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권면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가르쳤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형태의 설교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에 묻고 답하는 형태의 성경 공부를 뜻합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일 년 동안 집중적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습니다(26b).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나사렛당이라는 의미의 ‘노쯔리’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이방인들이 붙였겠지요. 경멸의 의미가 담겼든 아니든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 같은 특성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 없이 곧바로 기독교인이 된 것이지요. 

기독교가 유대교와 뚜렷이 구별되었다는 사실은 교회의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교를 로마 제국 내에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기 때문에 보호를 해주었지만, 신흥 종교라면 보호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유대교와 뚜렷이 구별됨으로써 민족주의적인 배타성을 탈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이 세계로 확산되는 일에 꼭 필요한 일이었지요. 안디옥 교회는 이런 점에서 세계 선교의 모판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자기의 능력과 필요를 따라 할 수 있는 바를 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향으로 줄기차게 역사를 이끌어 가셨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한 눈에 볼 수 없습니다.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지요. 교회가 붕괴되어 성도들이 흩어질 때, 정든 땅 정든 사람들을 떠나 이곳저곳 떠돌 때, 방황하는 슬픈 심정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성실히 인도하신다는 진리입니다. 때로는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굽어 도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낮선 땅 낮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당신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셔서 당신님의 그림의 한 부분을 채우게 하시지요. 

안디옥은 B.C. 300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의 하나인 셀레우커스 니카톨(Seleucus Nicator)이 건설했는데, 그의 아버지의 이름(Antiochus)을 따라 이름이 붙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세 번째 대도시로 당시에 인구 50만이 넘었지요. 동서 문화를 통합하는 헬레니즘 운동의 핵심 도시 중의 하나로 동방의 로마라 불렸습니다. 그러한 대도시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일은 이름 없는 몇몇 깨달은 성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을 인도하시듯이 대규모를 조직적으로 움직이시기도 하지만 이처럼 어쩔 수 없이 흩어져야만 했던 성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진전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7-30절은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한 몸으로 연합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세푸스는 주후 45-47년경에 팔레스타인에 특별히 심한 기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때가 글라우디오(Claudius, 재위 A.D. 41-54) 황제의 통치기간이었습니다. 안디옥의 제자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지요. 안디옥 교회는 한 몸 된 다른 지체를 자원하여 돌아볼 만큼 성숙해가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 과정을 보면서 조용히 말씀을 깨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 집중적으로 말씀으로 양육 받는 성도들의 중요성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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