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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헵시바와 쁄라 (사 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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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시바와 쁄라 (사 62:1~5)


<부정적인 인생관을 넘어서>

TV 뉴스나 인터넷 신문을 보면 하루도 사건 사고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대개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훨씬 더 많지요. 정치도 경제도 해외 토픽도 긍정적인 소식보다는 부정적인 소식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날마다 주로 좋지 않은 소식들을 접 하다 보니 사람들의 심성도 점점 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훈훈한 미담보다는 아주 나쁜 쪽의 기사에 눈과 귀가 더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현대인들이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더 즐거워하는 이상 성격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참 많이 한다더라 하는 소문보다는 어떤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 큰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들은 이런 소식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언론이나 인터넷이 하도 이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만 들추어내다 보니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꾸만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들추어내고 비판만 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스스로 "나는 평생 전세로 살 팔자야", "나는 평생 고물차만 타고 다닐 운명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말이 씨가 된다고 이런 사람은 일평생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인 텍사스 주 휴스톤의 레이크우드 교회의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릴 적 친구 중에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는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좋은데 늘 비딱하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오랜만에 만나서 어떻게 지냈냐고 인사를 하면 "별일 없었어. 그냥 매일 조금씩 늙고 뚱뚱해지고 머리가 벗겨지지." 이와 같이 농담을 하더라도 늘 부정적인 농담만 하는 그런 친구였지요. 

그런데 이 네드라는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에 풋볼 팀의 스타였고 아주 튼튼한 체격에 아주 멋진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늙고 뚱뚱한 대머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친구였지요. 오스틴 목사님이 이 네드라는 친구를 한 2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전혀 못 알아 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의 그 멋진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늘 했던 부정적인 농담 그대로 늙고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TV에 보면 동안(童顔)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떤 여성은 40대 중반인데 긴 생머리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스무 살 난 아들과 함께 나가면 여자 친구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참 기분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동안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야지 어떤 강박 관념이나 초조함에서 나온다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아줌마의 경우 어떻게 해서든지 젊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말을 할 때 마치 석고 가면을 쓴 듯이 입술만 조물조물 움직일 뿐, 눈과 얼굴 근육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안이 되어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에 마음껏 크게 웃지도 못하고 인생을 살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동안 대회에 입상한 또 다른 여성은 젊었을 때부터 뺨이 늘어질까 봐 한 번도 옆으로 누워서 자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목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베개도 베지 않고 늘 똑바로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 이후에 한 번도 남편과 마주 보고 자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동안 콤플렉스'에 걸렸다고 할 정도로 지나친 분들이 아닐 수 없지요.

사람들이 젊어지기 위해서 운동을 하고 화장을 하고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지만, 어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자유와 순리를 어기고 거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나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인 인생관을 향하여>

오늘 저는 긍정적인 자아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백성들에게 선포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개돼지처럼 노예가 되어서 원수 나라에서 신음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와 언약 백성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마저 잃어버렸습니다. 패배한 노예 백성이라는 부정적인 자아상에 휩싸여버린 것이지요. 

그러던 유다 백성들이 지금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바로 이와 같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잡풀만 그득한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희망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말씀이 유다 백성들이 과거에 바벨론 제국에 끌려가 개돼지처럼 살면서 완전히 민족적인 자긍심을 잃은 상태였던 과거와 새 예루살렘의 재건이라는 미래 사이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희망의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은 잊고 희망과 영광이 가득 찬 미래로 나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이러한 새 출발은 무엇보다도 민족적인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유다 백성 개인에서부터 예루살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자아상을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의 논조는 기쁨과 흥분,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학교에서 일어났던 너무도 좋은 일을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전하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만큼 유다 백성들에게 기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1절에 보면 "잠잠하지 아니하며", "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온의 의, 즉 예루살렘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낼 때까지 예루살렘을 격려해야 하므로 잠잠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흥분돼서 계속 외치겠다는 것이지요.

지금 유다 백성들은 오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온갖 잡풀만 가득하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무엇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막힌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자세가 문제입니다. 노예근성, 열등감과 패배감, 부정적인 자아상, 이런 심리적인 장애가 훨씬 더 큰 문제였던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자아상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2절에 보니까 이방 나라들이 유다 백성들에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며 뭇 왕이 유다가 받는 영광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다의 회복과 영광과 번영은 유다 백성들이 얻는 새 이름으로 상징됩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됨으로써 과거의 세속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거룩하고 긍정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탈바꿈한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이 부정적인 자아상을 벗어던지고 긍정적인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이 무엇입니까? 새 이름을 살펴보기 전에 3절에 보니까 먼저 유다 백성들이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여러분, 면류관과 왕관은 누가 씁니까? 임금이나 왕비, 왕자와 공주가 쓰지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면류관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임을 잊지 맙시다. 

가나안 땅을 살피고 돌아온 10명의 정탐꾼들은 스스로 메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 33). 아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뚜기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 이들이 가나안 땅에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메뚜기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이요 '하나님의 손의 왕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바벨론 제국에 끌려가 개돼지와 같이 노예 생활을 했던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이 부정적인 자아상, 과거의 쓰라린 노예 체험에 묶여있는 한 절대로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건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면류관이요, 왕관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진 새 이름>

이제 하나님께서 면류관과 왕관처럼 존귀하게 여기시는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두 가지 새 이름이 있습니다. '헵시바'와 '쁄라'입니다. 이제 다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여기 '헵시바'(Hephzibah)는 히브리어로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My Delight Is In Her)라는 뜻입니다. 즉각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감탄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쁄라'(Beulah)는 히브리말로 '결혼한 여인'(married woman)이라는 뜻입니다. 헵시바는 신랑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는 신부, 즉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쁄라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든든한 보호자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전하고 축복받은 상태의 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헵시바는 사랑받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쁄라는 그 사랑받는 사람이 사는 축복받은 땅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헵시바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유다 백성을 지칭하는 이름이고, 쁄라는 그 유다 백성이 돌아와서 건설하게 될 축복의 땅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두 이름은 문학적으로 '버림받은 자'와 '황무지'라는 말과 각각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헵시바', 즉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이름은 '버림받은 자'라는 '아주바'(Azubah, Forsaken)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 다음에 '쁄라', 즉 '결혼한 여인'이라는 이름은 '황무지'라는 '셰마마'(Shemamah, Desolate)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랬습니다. 그동안 유다 백성들은 '아주바', 즉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원수 나라에 가서 소 돼지처럼 끌려 다니며 노예 생활을 했던 버림받은 자였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이름은 이제 '버림받은 자', '아주바'가 아니라 '헵시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즉 신랑이 신부가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듯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신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랬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돌아온 예루살렘 땅은 '셰마마', 즉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과도 같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황무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황무지 땅 예루살렘을 이제는 '쁄라', 결혼해서 남편이 보호해주는 축복받은 땅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아주바, 버림받은 자가 아닙니다. 헵시바,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신부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머물러 사는 땅은 이제 더 이상 셰마마,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저주 받은 땅이 아닙니다. 축복의 땅입니다. 쁄라,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든든한 신랑이 지켜주는 '결혼한 여인'과 같이 행복한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헵시바와 쁄라라는 두 이름은 저절로 정리가 됩니다. 헵시바가 사는 축복받은 땅이 쁄라입니다. 쁄라에서 사는 행복한 사람이 헵시바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헵시바는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저에게는 애써서 모아놓은 책들이 헵시바입니다. 먹을 것 안 사 먹고 입을 것 안 사 입고 사들인 진귀한 책들을 볼 때마다 헵시바, 나의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헵시바였겠지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헵시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볼 때마다 스바냐서 3장 17절의 말씀 그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오늘 여러분에게 쁄라, 축복의 땅은 어디입니까? 바라기는 여기 이 동산이 여러분의 쁄라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이 쁄라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쁄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신부 헵시바가 사는 땅이 축복의 땅 쁄라요, 하나님이 든든한 신랑이 되셔서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기름진 땅 쁄라에 사는 거룩한 백성이 헵시바입니다. 

<쁄라에 사는 헵시바>

그렇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부정적인 자아상을 벗어던지지 못해서 우리의 삶이 불행했다면 벗어던져야 마땅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은 자, 아주바라고 끝없이 속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바가 아닙니다. 헵시바입니다. 신랑 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이는 내 기뻐하는 여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셰마마, 저주받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사는 땅을 버림받은 땅 셰마마라고 끝없이 속삭이지만, 아닙니다. 쁄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성지, 쁄라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쁄라에 사는 헵시바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크 트웨인이 쓴 '왕자와 거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궁에서 무료하게 살던 왕자가 마을에 들어가 한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도 닮아서 왕자와 거지의 신분이 뒤바뀐 것이지요. 왕자가 거지가 되어서 다리 밑에 살면서 구걸을 하게 되었고, 거지는 왕궁에 들어가 호의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옷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왕자는 비록 거지가 되었지만 왕자로서의 품격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임금님의 아들이라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왕자가 된 거지는 달랐습니다. 늘 기가 죽어지냈고 구걸하던 거지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자아상과 자의식은 이다지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거지에서 왕자로 신분이 급상승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거지 근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거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왕자 신분에서 거지로 급몰락했다고 할지라도 왕자로서의 품격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왕자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통하여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헵시바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성전은 하나님의 쁄라, 축복받은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쁄라에 사는 헵시바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갈 때 공항 근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같이 굵은 소낙비가 나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과연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하고 염려를 합니다. 하지만 비행기가 이륙해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가 구름을 뚫게 되면 찬란한 빛이 들어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잔뜩 먹구름이 끼고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린다고 해서 그것만 보고 탄식하지 맙시다. 저 구름 뒤에 숨어 있는 해가 얼굴을 내밀고 또 다시 찬란한 광선을 비추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태양을 생각하며 오늘의 소나기를 뚫고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시면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당신은 쁄라에 사는 헵시바입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헵시바가 되시는 주님, 우리는 또한 주님이 헵시바인 줄로 믿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마귀에 속아서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살았습니다. 헵시바인 줄도 모르고 아주바로 살았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신부 헵시바로 살기 원합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축복하셔서 헵시바로서,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쁄라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늘 셰마마, 저주 받은 황무지로 오해해서 항상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헵시바인 우리가 가는 땅은 어디든지 쁄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교회, 가정, 직장, 사업장, 이 나라, 온 세계가 쁄라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곳 쁄라에서, 우리의 헵시바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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