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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삶을 사는 기초(2) : 기도 (창 18:22~28,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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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을 사는 기초(2) : 기도 (창 18:22~28, 32~3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 갔다. 말씀의 인도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순종하며 나아갔다. 아브라함에게서 배우는 또 하나의 신앙 생활의 기초는 기도 생활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읽어보면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묻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창18:23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물음을 귀담아 들으시고 대답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것이다.

창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결국 아브라함의 물음과 하나님의 대답하심이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이 본문 속에서 무려 6번이나 되풀이 된다. 성경을 보라. 창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창18: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창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창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창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정의의 하나님임을 드러내며 의인이 존재하는 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초지일관으로 말씀하신다. 결국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니다.

  
1. 기도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다. (창18:22~23)

기도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친밀한 관계처럼 유지되어서 무엇이든지 삶의 문제를 주고 받는 말걸기인 것이다. 나의 문제이든, 타인의 문제이든, 지역 도시의 문제, 소돔에 관해서든지, 친척 조카 롯의 문제이든 이야기 거리의 제한은 없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답하시는 분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창18:22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은 어떤 면에서 용감하였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창18:23) 같은 주제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계속 묻고 물었기 때문이다. 다만 50명의 의인이 없어서 소돔은 심판하신다고 할 때 숫자만 줄여가면서 45명에서 40명, 30명, 20명, 10명으로 줄여가면서 의인 10명이 있으면 심판할 것인지 물었던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에 두렵고 떨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과 떨리는 경외감 속에서도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정을 쌓아온 친구처럼 친밀감이 엿보이는 것이다.

기도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신과 인간이라는 경계선을 깨고 의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41:8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불러주었는지도 모른다. 기도는 벗이 우정의 친밀함 위에서 나누는 이야기이다. 무엇이든지 대화할 수 있는 물음과 대답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말걸기이다. 
  

2.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결이다. 

기도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이야기라고 할 때 긴장감은 없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선 치열한 긴장감이 있다. 그래서 창18:27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하였다. 창18:30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이 긴장감은 창18:31~32에서도 반복한다. 이것이 기도의 양면성이다. 기도가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 힘이 드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과 나와의 씨름이라는 점이다. 야곱도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다. 환도 뼈가 위골될 때까지 샅바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기도는 내 온몸을 내던지는 대결이다. 누구도 대신 끼어들지 못하는 단독으로서의 대결이다. 기도는 그래서 외롭다, 힘들다, 땀이 난다, 애를 쓴다, 두렵다, 감격한다, 슬프다, 즐겁다, 눈물이 난다, 찬송한다 등 다양한 기도의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관여하지 못하는 맞대결이기에 진정한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시작하는 것이다. 골방의 의미는 폐쇄된 방, 지하실 방, 외딴 다락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홀로 있음, 하나님 앞에 서서, 단독으로 서서 씨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과시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내던져져서 항복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져주시고 넘어져 주시든지 씨름하고 결판을 내려는 대결인 것이다.


3.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마음의 교류다. (창18:32~33)

창18:32을 보면 아브라함이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하고 이야기를 꺼낼 때 하나님은 그 마지막 아뢰임의 이야기에 대답을 하신다. 그리고 창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라고 하였다. 이런 면에서 기도를 대화라고 하고 대결이라고 했는데 기도란 인격 대 인격의 교류다. 아브라함 편에서 이번만 아뢰인다고 구체적으로 나올 때 하나님은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신다. 즉, 기도하는 자가 끈기 있게 매어달리면 끈기 있게 답해 오시고 기도하는 자가 포기하고 끝을 맺으면 하나님도 끝을 맺으신다. 

기도는 마음 대 마음의 교류다. 그 마음을 통해 입으로 내어놓은 이야기 뿐만 아니라 미처 내어놓지 못한 이야기까지도 알아채고 들어주시는 것이 기도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마음의 교류라고 할 때 구하지 못한 것, 토로하지 못한 것까지도 답을 주신다. 그래서 기도는 기도해 놓고 나면 좋은 응답이 주어진다. 넘치는 응답이 제공된다. 성령이 마음의 기도를 도와주셔서 미처 알지 못한 것까지도 대신 통역하여 도고해 주셔서 하나님은 다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소돔 성의 심판을 안타까워 하는 아브라함의 안타까운 마음. 그 마음 속에는 소돔 성에 사는 조카 롯이 심판 받는다는 아픔도 담겨 있었다. ‘심판을 지연하는 길은 없는가? 심판을 멈추게 할 길은 없는가? 심판에서 구원 얻을 사람은 정녕 없는 것인가?’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는 멸망 받는 자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출렁거렸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세계적인 지진 재앙을 볼 때 어떻게 기도할 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누구를 어떻게 구해달라고 하지는 못해도 한 사람이라도 안타까움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과 마음의 교류가 오고가는 기도를 통해 어떤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응답하시기로 하셨다.

기도는 몇 가지 방법으로 응답이 된다.

① 반드시 관철되는 응답이다. (눅18:1)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Yes”라는 응답이다.

② 기다리라는 응답이다.

③ 거절을 당하는 응답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나에게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이유는 가령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할 때이다. (약4:3)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 받은 것으로 사람을 해롭게 하고 나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고 잘못 된다면 거절을 당하는 것이 참된 응답이다. 

④ 순종을 요구하는 응답이다.

마26:39을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맞추셨다.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고 자신을 위탁하셨다. ‘Obey’의 응답이다.

기도는 이렇게 네 가지 방법으로 응답된다. 그러고 보면 응답 없는 기도란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 속에서 끝도 없이 막을 내린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기도!

그 기도는 너무도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 같다. 씨름하다 말고 대화하다 만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응답을 허락하셨다. 

창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기도하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 진노의 날, 심판의 날에도 기도하는 자를 염두에 두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심판의 한복판에서 내보내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중보기도가 무위가 되고 시간만 낭비한 것 같아도 땀만 흘리고 허공에 모든 부르짖음이 날아간 것 같아도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대화하고 대결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기억되었다. 마음과 영의 교류를 나눈 아브라함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남아 있어 구원해야 할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거룩한 것이다. 기도는 보배로운 것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시간 낭비가 아니다. 기도는 외로운 것이 아니다. 허공에 올라가는 연기같은 것이 아니다. 기도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그 열매를 취하게 된다. 기도는 덤으로 응답하시는 것이 기도한 것보다 더 크다. 이자가 원금보다 절대 클 수 없는 것이 은행의 법칙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응답의 법칙은 응답 받는 기도 이자의 법칙이 기도한 원금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떤 기도를 시작하든지 기도의 무릎을 주 앞에 드리자. 히4:16의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나의 죄됨, 나의 연약함, 나의 모습을 보지 말자. 언제나 말걸기에 만나주시는 하나님, 씨름하기에 샅바를 잡으시는 하나님, 마음의 교류에 숨겨진 것도 알아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해 다가서라. 그것이 기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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