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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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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계 2:8~11)

     
지난 주일에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첫번째 편지를 받은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내가 안다 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버렸으니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처음 행위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처음 받았을 때 감격하고 감사하며 형제들과 나누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 안에 거짓 복음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들어와 교회를 미혹할 때 악한 자들을 시험하여 드러내고 배격하는 과정에 형제간 사랑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순결한 신앙은 칭찬받을만 하였지만 사랑이 없는 냉랭한 믿음은 도리어 책망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순결을 지킨다는 이유로 서로 불신하며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그 사랑이 떨어졌는지 기억하여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옮기리라는 엄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촛대를 옮기신다 하심은 교회의 본질을 거두어가시겠다는 두려운 경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죄 사함의 용서와 긍휼을 저버리고 자칭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만일 거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허공을 향해 외치는 메아리로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이 말씀을 묵상하며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회복하는 일에 힘쓰셨습니까?  이단과 거짓 사도들의 거짓 행위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거짓과 죄악과 싸워 이기는 그에게는 생명나무 실과를 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불의와 죄악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한 성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두번째 편지를 받은 서머나 교회에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까?    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또한 세상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흥망성쇠하는 인간 역사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환란과 궁핍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정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알고 계시며 그리고 앞으로의 일까지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다.  너의 원통함, 너의 눈물과 고통과 억울함을 안다.    울음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남모르게 부르짖은 너의 기도를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네 환란과 궁핍을 내가 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이 무엇이었을까요? 고대 헬라시대부터 소아시아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중에 하나였던 서머나는 수 천년 동안 역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성하여 지금까지 이즈밀(Izmir)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터어키의 도시입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쓴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서사시인 호머(Homer)가 태어나 활동한 곳이기도 한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가는 부유한 항구도시로 물자가 풍성한 곳이며 시민들의 삶이 보편적으로 여유 있는 무역도시였습니다.    

이처럼 부유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빈곤감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주 잘 사는 사람들 곁에 살다보면 그런대로 괜찮게 사는 사람들조차 이웃과의 비교의식에서 나온 빈곤감으로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환란과 궁핍은 그런 종류의 빈곤감이 아니라 절대 빈곤층에 처했던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상황입니다.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고난과 궁핍으로 댓가를 치루게 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살던 서머나 교회 교인들입니다.   

오늘날 북한의 지하교회 교우들의 환란과 궁핍을 생각해봅니다.     국제 선교단체들은 북한의 기독교 인구가 약 40만 명이 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해방 전부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비롯하여 1990년대 이후 친척 방문으로 중국에 왔다가 기독교를 접하거나 한국의 기독교 방송을 듣고 자생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최근 국제 선교단체인 오픈 도어즈(Open Doors)에서 북한의 기독교인 약 4만~6만명 정도가 강제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매년 ‘기독교 박해지수’를 만들어 발표하는 오픈 도어즈는 북한이 기독교 박해 50개 국가 중에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환란과 궁핍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습니다. 누가 그들의 형편을 부러워하고 알아주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눈과 세상의 눈이 이처럼 다릅니다.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며, 더 넓은 집과 더 많은 연봉을 보장하는 직장과 자녀들의 성공을 위하여 기도하고, 더 크고 온갖 좋은 시설을 갖춘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를 피해 목숨 걸고 숨을 죽이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예배라도 마음껏 드릴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교회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내가 너희를 안다’ 하고 위로하실 줄 믿습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려하심이니라’(고후8:9) 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주님이 서머나 교회를 인정하셨습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다른 것은 잃었을지라도 부요하신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 부요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소유하고 그분의 가난함과 부요함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누구보다 부요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내가 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모임이다.’ 서머나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일찌감치 유대땅을 떠나 주전 3세기경부터 그곳에 자리를 잡은 부유한 상인들이었습니다. 로마 정부와 손을 잡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선 유대인들때문에 서머나 교회가 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혈통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 유대인이지만 참 유대인다운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새로운 혈통의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으니(갈3:29) 혈통만 자랑하던 유대인들과는 그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머나 교회를 훼방하던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모임이라 하셨습니다.   

요8:39-47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조상 아브라함이 한 일을 너희도 해야 마땅하거늘 지금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데 나를 죽이려하니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가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행동해야 할 것이 아니냐? 너희는 너희 아비 사단에게서 났으니 아비의 욕심을 따라 너희도 악을 행하는구나. 사단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을 말한다. 내가 진리를 말하지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유대인은 참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못한 사단의 자녀들인 것처럼, 너희가 서머나에서 유대인들에게 받는 훼방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훼방이니 너희가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내가 안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지금 당하는 고생도 힘든데 고난이 아직 끝나지 않고 더 있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 고난이 지속된다는 말입니까?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하루의 고난도 견디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한 고통 가운데 지낼 것에 비하면,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날과 비교하면 이땅에서 당하는 10일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을 상징합니다. 불을 통과하지 않고는 정금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은 정결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연단이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이 고난의 통로를 나를 알아주시고 이해하시는 주님과 함께 통과한 성도들이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시119:71).    

성도의 고난은 우리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시험입니다.17세기 영국 청교도 신앙의 기수였던 토마스 왓슨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고난이 임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평안할 때는 우리의 참 모습을 보기 어렵지만 고난이 오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마음의 부패한 본성을 인정하지 않다가 고난을 당하면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컵에 담긴 물이 깨끗하게 보이지만 불에 올려놓고 열을 가하면 찌꺼기가 끓어오릅니다.  사람도 형통할 때는 늘 감사하며 겸손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난의 뜨거운 불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즉시 조급함과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서머나 교회 초대 감독 폴리갑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전해지는 감동적인 간증입니다.    주후 156년 서머나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지방 총독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습니다.   이때 86세였던 폴리갑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적 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가 그를 살리기 위해 단 한 번만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고 끝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환란과 궁핍의 환경에서 네가 나를 부인하지 않고 나를 모른다 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너를 모른다 하지 아니하리라(마10:32, 33)는 주님의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내가 너를 안다’ 하신 말씀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우들과 이 땅에 고난 받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렸던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신앙을 다시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12)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16:24,25;  막8:34, 35; 눅9:23, 24) 하셨습니다. 이것이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외친 일사각오의 신앙이기도 합니다.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 순사들의 철저한 감시와 잔혹한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내가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하며  ‘일사각오’ 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은 교회인데 어느듯 세상이 주는 풍요로 기름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깨어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살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쳐지는 한국교회는 더 이상 부족하거나 가난하거나 곤고하고 가련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자들과 세상의 부요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차고 넘쳐납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고 핍박받는 약자가 아니라 권력과 물질의 힘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을 대신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께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탄식하신 주님의 말씀을 봅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7) 자칭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하지만 예수께서 보시는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남한의 부요한 교회보다는 차라리 환란과 궁핍 가운데 있는 북한 지하교회를 향해 네가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하십니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상황이 그렇다면 성도 개인들은 어떨까요? 세상의 즐거움과 인기를 잃으면 죽는 줄 알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친구하면서 말로는 나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잠시 잠간 받는 고난은 회피하고 외면하고 잠간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둘째로 밀쳐 두면서 자기 편리할 때는 예수가 나의 구주라고 말합니다.   참 편리한 신앙고백입니다.   

주일 아침에 친구 생일 파티에 갈까 예배드리러 갈까 둘 사이에 선택하라면 고민하고 주저할 필요도 없이 파티장으로 가는 사람이 목숨이 걸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과연 그리스도를 택할까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먼저 택하고, 파티장에서 만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그렇게도 중요시 하는데 주일 아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깁니다.   세상에서 누리고 즐기는 육체적 즐거움 그것 하나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면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평안할 때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능력이 없는 너무 허약한 교인들이 거친 환란을 어찌 견디고 이겨낼지 염려가 됩니다.   고난이 없는 신앙, 고난을 회피하는 신앙을 형통한 삶이라고 오해하지 맙시다.   

1장17절 하반절과 18절을 읽어봅시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죽음의 위협을 받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전에 죽었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영원토록 살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잘 못하는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시면 좋겠는데, 지금도 잘 하고 있는 교회에게 더 잘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허약한 사람들에게 힘겨운 일을 맡기지 않으시고 잘 할만한 사람에게 더 큰 기대를 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을만큼 충성해도 절대로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주인이 그 생명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앞서 죽었고 다시 살았으니 너희에게 다시 사망이 없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 죽음이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의 면류관이 너희 앞에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 말고 충성하라’고 격려하십니다(고전9:25/ 썩지 아니할 면류관, 딤후 4:6-8/ 선한 싸움 마치고 얻을 의의 면류관, 약 1:12/ 생명의 면류관).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하시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따르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둘째 사망은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는 날 선고받는 사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둘째 사망은 다시는 생명 얻을 기회가 없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비록 핍박자들이 성도의 목숨을 해칠 수 있지만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만나고 있는 고난이 어떤 종류이든 그것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고난과 궁핍이라면 두려워말고 약속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환란과 궁핍이  내 삶을 지치고 힘들게 하며 언제 이 고난이 끝날지 그 끝이 안보일지라도 죽기를 각오하며 그 믿음을 붙드는 자에게는 주께서 예비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이 한 주간 또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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