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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에 실패하지 맙시다! (창 1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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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실패하지 맙시다! (창 12:9~20)


아브람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새로운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하시는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람이 한 일은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높으신 분을 알고 그 분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약속이라면 매일 매일 기억합니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생각하며 노래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노래 부르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어디에서나 그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였습니다. 인간은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 예배자로 승리하던 아브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와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아내를 남에게 주어버리다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자와 자기 아내를 남에게 주어버리는 파렴치한 인간이 같은 사람 그것도 아브람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I. 발단

9절 말씀입니다.
: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브람 당시의 집은 천막입니다. 양을 치기 위하여 풀을 찾아 다녀야 하는 유목민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옮겨 다니기 쉽게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천막을 치려면 기둥을 세우고, 양털로 짠 천을 씌우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 끈으로 묶어야 합니다. 옮길 때에는 말뚝을 뽑고 천막을 정리하면 됩니다. 9절에서 ‘옮겼다’는 말은 ‘잡아 뽑다’는 말입니다. 밭에서 무를 잡아 뽑듯이 천막의 말뚝을 뽑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천막의 말뚝을 뽑았다는 말은 천막을 걷어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이라는 말도 ‘옮겼다’는 말과 똑 같은 단어로 ‘말뚝을 뽑았다’는 말입니다. 말뚝을 뽑았다는 말이 짧은 한 절 속에 두 번이나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9절은 “그리고 말뚝을 뽑아, 아브람이, 갔다. 그리고 또 말뚝을 뽑아, 남쪽으로”라는 말입니다. 말뚝을 박은 것이 아니라 뽑았습니다. 그리고 또 뽑았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들어와 그 땅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예배하였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배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서 조금씩, 조금씩 떠났습니다.
   
1. 조금씩 벗어났습니다.
   
말뚝을 뽑지 마십시오. 여기에 말뚝을 박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 땅이라고 말씀해 주셨음에도 떠돌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벌로 떠돌아다닌 것도 같습니다(창 4:16). 이제 그만 정착을 하십시오. 말뚝을 박으십시오. 계속 뽑아들고 다니면 유리방황하는 사람이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배에 실패하게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마침내 완전히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전에 이런 노래가 유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때 저의 어린  조카 녀석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한 번 먹고, 두 번 먹고, 자꾸만 먹고 싶네!”
   
지금 예배에 참석 안 하는 사람은 이러고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빼고, 두 번 빼고, 자꾸만 빼고 싶네!”
   
조금씩이 문제입니다. 서서히 떠나고, 서서히 병이 들고,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브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던 그즈음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기근이 너무 심해서, 아브람은 애굽에 몸 붙여서 살려고,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에서 ‘내려갔다’는 말은 ‘쑥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9절에서는 걷다가 10절에서는 떨어졌습니다. 조금씩 내려가다가 뚝 떨어졌습니다. 물론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도무지 예배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보다 상황이 주는 어려움이 컸습니다.
   

2. 상황에 지배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기근 때문에 예배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가는 곳곳 마다 예배드렸던 아브람이 이후 애굽에서 예배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예배당을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교회의 시간은 일주일씩 간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분들이 꼭 기억을 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시간은 칠일 씩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한 주일도 빠짐없이 매 주일 예배당에 온다고 해도 7일에 한번 씩 예배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빠지면 보름 만에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 빠지면 거의 한 달 만에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일주일이 지나면 감동이 사라집니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꼭꼭 드려야 겨우 예배의 감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이 되면 점점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더라고 상황에 지배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그 다음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이 어떻게 전개 되었습니까?


II. 전개

11절 말씀입니다.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람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의 말이 아닙니까! 아내에게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라니요. 이것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12절 말씀입니다.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아름다운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직 애굽에 도착도 하기 전에 걱정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아리따운 아내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될 것을 걱정합니다. 그렇게 아리따운 아내라면 목숨 걸고 지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람의 마음에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1.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황에 지배받게 되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때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기억하고 주시는 힘과 능력을 의지함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내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남편 아브람이 만들어낸 방법은 완전히 꼼수였습니다. 그것은 아내더러 아내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이 더 가관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라고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였습니다.
   
2. 길이 아닌 길을 갔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지혜를 동원합니다. 아브람의 말에 성경에 기록된 사라의 반응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때 사라는 “이런 등신! 이런 등신을 믿고 내가 어떻게 살아!”하고 탄식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조금씩, 조금씩 가다가 뚝 떨어졌습니다. 뚝 떨어져 ‘이왕 버린 몸!’하였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마약하는 사람이 자기 아내를 창녀로 팔아버린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보험금 노리고 아내 죽인 놈(?)이나, 자기 살겠다고 아내를 누이라고 한 분(?)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길이 아닌 길을 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일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14절과 15절 말씀입니다.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
   
애굽 사람들은 아브람의 아내를 보고 매우 아리따운 여인임을 알았습니다. 바로의 대신들이 그 여인을 보고 나서 바로 앞에서 그 여인을 칭찬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여인은 바로의 궁전으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걱정한 일이 그대로 맞아떨어졌습니까! 어쩌면 생각한 그대로 되었습니까?
   
3. 염려한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미리미리 대비하기를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 예상이 적중하였다고 쾌재를 불러야했을까요? 
   세상을 살면서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우리는 미리 미리 대비하는 준비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한심한 생각이 한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약속하시고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그가 의심하는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은 의기양양해서 아내에게 ‘그것 보라고, 그렇게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르지’하면서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아브람은 바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않고 자신의 꾀에 빠져 버린 어리석은 짓입니다.
   
두려움에서 걱정한 일이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포한 말이 이루어지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6절입니다.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애굽의 통치자 바로가 아브람의 아내를 받아들이고 아브람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바로는 아브람에게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종과 낙타까지 주었습니다. 이것은 결혼 지참금 조로 아브람에게 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가 주었다고 말하지 않고 아브람이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준 것이 잘못이 아니라 아브람이 얻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를 팔아먹었습니다.
   
4. 불의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문화는 영혼을 팔아서 물질적인 행복을 사는 시대입니다. 행복을 살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팔아먹습니다. 양심도,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어버이도 모조리 팔아먹습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겠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덕분에 아브람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된 것 같지만 왠지 찜찜하고, 행복한 것 같으나 불행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날 밤 아브람이 잠을 제대로 잤겠습니까? 차라리 실패만도 못한 성공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떠나도 성공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도 성공하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교회 안 나가니 편안하다고, 예배 안 드리니 더 잘되더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증인이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마누라 팔아서 재산을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영혼을 팔아서 물질을 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성공한 것이 영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실수에 어떻게 개입하셨습니까?


III. 결과

17절 말씀입니다.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 아브람이 하는 짓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잘못을 아브람이 하였는데 재앙은 바로가 받게 되었다고요? 아닙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브람의 잘못이 있었고 바로에게는 바로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두려워한 잘못이 있었고, 바로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모조리 차지하려는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잘못에 벌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그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람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그 아내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1. 보호해 주셨습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이런 경우를 아브람을 죽이자고 하였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특별 명령으로 애굽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아브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로를 막으시고, 아브람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참고 계십니다. 성도들을 위한 약속 때문에 오히려 아파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어느 때 어느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믿고 잘못을 저질러도 되는 것입니까?
   
18절입니다.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내를 지키지 못한 남편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9절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는 자신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브람의 거짓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왜 네 아내를 내 아내로 주었느냐? 네 아내니 네가 데려가라!’는 말입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아브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발 빠르게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던 아브람은 숨을 죽였습니다. 낯이 뜨거운 일입니다.
   
2.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마음 놓고 실수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아픈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미끄러지더니 마침내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정치판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한탄도 있습니다. 어떻게 세상에 얼굴을 들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한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피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면 희망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절망이지만 부끄러움을 알면 희망이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들어 우리를 때리시는 것을 깨닫고 아파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한 분을 알고 그 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중요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신앙은 점점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다가 마침내 뚝 떨어져 포기하는 인생이 아니라 점점 더 하나님께 올라가는 예배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여기에서 말뚝을 뽑지 마십시오. 예배의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으십시오.

말씀에 굳게 서서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예배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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