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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으로의 초대 (눅 1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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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의 초대 (눅 15:8~17)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이야기의 맥락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세 이야기 비유를 관통하고 있는 모티프는 ‘잃어버림’과 ‘되찾음’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목자의 이야기가 그렇고,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가출했다가 거지 신세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그렇고, 오늘 본문인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여인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이야기 비유 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비유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누군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탄생한 상황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5장 1절은 이 비유의 삶의 자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즉 유다의 사회적 세계에서 ‘불결한 사람’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었고, 스스로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 ‘국외자’, ‘방외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 멀리 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애당초 바깥사람이 없었습니다. 

죄인과 의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예수님의 마음에는 이런 가름이 아예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듯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세리’와 ‘죄인’으로 지칭된 이들이 주님께 나온 것은 그가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분 앞에 서는 순간 오랜 세월 그들을 괴롭혔던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위안이었고 치유였고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우리’와 ‘그들’로 범주화하고, 자신들이 더 나은 존재라는 우월의식으로 무장한 이들은 그 광경을 아름답게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2b)

이것은 판단의 언어입니다. 예수는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소외자들’은 분노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무시당하며 살아온 그들은 무력했습니다. 항거할 수도 없었고, 대놓고 비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는 참에 예수님은 아주 담담하게 세 가지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길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사랑을 전했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에게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없는 것은 신학 이론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정신지체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라르쉬 공동체의 창설자인 장 바니에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들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신뢰로 이끄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귀 기울이는 것이다. 특별히 상처 입은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Jean Vanier, <>, Orbis, 43ff)

•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오늘의 본문에 좀더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드라크마 열 개를 가진 여인이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로마 세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은화인데, 그 가치는 대략 노동자의 일일 품삯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데나리온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열 드라크마는 여인이 어려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비상금이었는지, 전 재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전 재산이었다면 그 여인은 한 두어 주간을 가족들과 더불어 겨우 버틸 수 있는 형편이었을 테고, 어려운 때를 대비해 마련해둔 비상금이었다 해도 그 또한 소중한 것이었을 겁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이 여인은 가난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들은 ‘그까짓 것’ 할지 모르지만 이 여인은 그럴 수 없습니다. ‘어디에 떨어뜨렸을까?’ 여인은 이리저리 생각을 궁굴려보고, 이곳저곳 찾아보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여인은 창문조차 없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집에 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빗자루를 들고 온 집을 쓸어봅니다. 

온 집이라야 방 한 칸에 불과합니다. 여인은 귀를 나팔처럼 펼쳐 금속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나 집중합니다. 그 애태우는 마음을 아시겠지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들의 황망스런 모습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제 아들이 아기 때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엄마는 얼빠진 사람처럼 시장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이러저러한 아이를 보지 못했느냐고 묻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별별 불안한 생각이 다 들었겠지요. 혹시 아이가 집으로 간 것은 아닐까 싶어 언덕을 치달아 오르는데, 저편에서 누군가가 쥐어준 아이스 바를 손에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의 당혹스런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때 엄마가 느꼈을 안도감과 기쁨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겁니다. 그때 아내가 집에 돌아와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였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런 애태움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질문을 바꿔 봅니다. 지금 여러분은 뭔가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잃은 게 참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USB를 잃어버려서 오랫동안 축적해온 자료를 날렸습니다. 그건 약과입니다. 저의 무관심과 냉정함으로 사람을 잃은 적이 부지기수이고, 젊은 시절에 타오르던 내면의 신성한 불꽃도 이제는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소명조차 잃은 것이 아닌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명(vocation)을 뜻하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목소리’(voice)입니다. 소명이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들어야 할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느라,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소외입니다. 뭔가 마음이 공허하고 스산한 것은 소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잃어버리고도 잃은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줄 모르니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불화가 깊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시간이 될 때면 EBS에서 방영되는 <세계테마기행>이란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부유한 나라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어려움에서는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른과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볼 때마다 욕망과 풍요로움에 오염되지 않은 천진함을 느낍니다. ‘내가 저런 웃음을 잃고 사는구나’ 싶어 속이 쓰립니다. 

• 즐거움과 기쁨

애태우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은 마침내 소망을 이뤘습니다. 여인은 안도감과 아울러 기쁨을 느꼈습니다. 어떤 생동하는 기운이 속에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기쁨이란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인은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말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여인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기쁨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사심 없이 기쁨을 나누는 사람들은 어떤 연대의 끈이 자기들 속에 생겨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교우들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아십니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이 소리를 꼭 듣고 싶습니다. 물론 그 말 뒤에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따라붙게 마련입니다. 그 문장이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든지, 삶의 방식을 바꾼 후에 경험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고백이라면 더 좋겠지요. 그러려면 자기 마음을 살필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

분주함이 신분에 대한 증명서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한가하다는 것은 왠지 무능력함의 징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우리 교인들 정말 바쁩니다. 바쁘다고 하면서도 그 일들을 줄이지 않는 것은 그게 즐겁기 때문일 겁니다. 이해가 갑니다. 가사를 돌보는 이들의 경우 가족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등교 혹은 출근시키고, 설거지 하고, 집안 청소하고, 잡다한 일들을 해결하다보면 내가 이런 일들을 하러 세상에 왔나 싶어 한숨이 나게 마련입니다. 

즐거운 소일거리를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재미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미의 최대의 적은 반복입니다. 즐거움을 찾는 이들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무한반복처럼 보이는 일상입니다. 하지만 그 일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어느 분은 현대 사회를 가리켜 ‘이벤트사회’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백화점 세일, 음악회, 전시회, 후원회, 각종 경품행사…이런 일들을 쫓아다니는 이들은 숨이 가빠 헐떡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재미를 찾아다녀 보아도 마음에는 허전함만 남습니다. 즐거움을 찾는 이들이 겪는 비애입니다. 그러나 기쁨을 추구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기쁨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의미 있다고 여길 때 우리는 힘들어도 힘든 줄 모릅니다. 지갑을 열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도와 그로 하여금 절망의 자리를 딛고 일어서도록 해 본 사람은 삶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하나님은 기쁨이라는 가장 값진 선물을 내 감정 속에 두신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 기쁨의 파장

기쁨이라는 생의 열매는 우리가 뜻한 바를 이룰 때도 찾아오지만, 나 자신을 누군가를 위해 내놓을 때 더 풍성하게 거둘 수 있습니다. 동화작가였던 권정생 선생님은 스스로 빈민처럼 살았지만, 책에서 나오는 인세를 모아 굶주리고 아픈 아이들과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순간순간 감내하면서도 값싼 위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숨겨진 만나가 있었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다짐, 그게 그의 만나였고, 그의 이름이 가리키는 바 ‘바른 삶’(正生)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거지 나사로를 품에 안으시듯이 그를 안아주셨을 겁니다. 살아계셨더라면 아이티에서 죽어간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 때문에 눈물깨나 흘리셨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인간임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 우리 교회도 아이티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은 생을 축제로 만듭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와 ‘그들’의 차이 혹은 차별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기쁨은 참 낯선 감정입니다. 자기가 아흔아홉 마리 양떼에 속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드라크마 하나쯤은 ‘그까짓 것’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찾은 이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던 큰 아들은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잔치를 준비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밖으로 나와 본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눅19:5) 말씀하셨을 때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그를 괴물처럼 혹은 오물처럼 취급하는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주님이 그에게 다정하게 건넨 말씀은 숨겨져 있던 그의 따뜻한 인간성을 불러내는 신비한 신호였습니다. 그는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눅19:8b). 예수에게서 삭개오에게 전달된 하늘의 온기는 삭개오의 주변세계에까지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축제입니다.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잃고, 우리 자신도 잃고, 이웃도 잃고, 자연까지도 잃었습니다. 우리 삶은 찾음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련의 비유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가름’에 근거한 삶을 살지 말고, 세리와 죄인들처럼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신령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나뉘었던 사람들이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살 때, 하늘의 천사들도 기뻐합니다. 땅의 기쁨은 하늘의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생의 신비입니다. 하루하루 우리가 지향하는 삶이 주변 세계에 기쁨의 파장을 일으키기를,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도 우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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