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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넉넉히 이기리라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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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이기리라 (롬 8:31~39)
  

메카타의 ‘두 발자국’이란 시가 있습니다.
잘 알려진 시이지요.

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네./ 주님과 함께 긴 해안을 걷고 있는 그런 꿈을./ 하늘 저편에는 내 살아온 인생행로가 영상 되어 흐르고 있었지./ 매 장면마다 나는 보았네, 모래위에 두 발자국을/ 하나는 내 것,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 아, 행복하여라.

그런데 내 인생 최후의 장면이 나타났을 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네.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을./ 아, 어찌된 일인가? 모래 위에 발자국은 하나뿐인 것을!

나는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른다고 했을 때 주님은 항상 저와 동행해주신다고 하였는데........ 보세요, 내 인생의 어려운 시련을 겪을 때에는 모래 위에 발자국은 하나뿐이잖아요.”

그 때 주님은 말씀하였네.

“내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여, 네 시련의 때에 나는 결코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모래 위에 그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나의 발자국이란다. 네가 힘들 때 나는 너를 안고 걸었단다!”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 시입니다.
이 시의 내용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는 사도 바울의 탄성과 어울립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롬1~8장은 기독교인이 믿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롬 9-16장은 기독교인이 살아가야할 윤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의 말씀은 기독교인이 믿는 진리를 설명하는 부분의 마지막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8장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차분하게 설명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찬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질문)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비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기독교인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늘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하나님이 내편이신데 뭘 걱정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살아갑니다.

바울사도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성을 ‘인침(도장을 찍다)’이란 말로도 설명합니다. 
로마시대에 노예의 소유주는 그 노예가 자기의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불도장으로 인을 칩니다. 
몇 군데 예를 들어보지요.

고후1:22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엡1:13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침’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① 안전(security)-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말씀이지요. 
② 보장(stamp)-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말씀이지요. 
③ 소유(ownership)-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란 말씀이지요.
바울 사도는 ‘인침’이라는 말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되어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나아가 자신의 구원까지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세 가지 장애물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1.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롬 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이런 필요들이 때로는 걱정 정도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하는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외아들’이란 말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곽선희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얘기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아버님은 4대 독자랍니다. 
가정 예배를 드릴 때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할머니 차례가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기도 서두에서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 하시고는 코를 훌쩍 거리신다는 것입니다. 
한참 울고 나서야 기도를 계속하셔서 어린 시절 곽선희 목사님은 그게 늘 못마땅했답니다. ‘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러나 후에 철이 들어 생각해보니 ‘외아들’이란 할머니에게는 콧등만 찡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후벼 파는 복음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었던 그 처지에 늦게나마 4대독자를 얻었으니 얼마나 그 아들이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외아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나를 위해 주셨다고 했으니 그 의미가 예사로울 수가 있었겠어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뜻도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 중에 귀한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돈을 준다한들, 빌딩을 준다한들 그 깊고 높은 의미를 담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여러분의 상식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없지요! 
아낄 것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 곤고함이 심해질 때 꼭 기억하시고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귀한 외아들까지 주셨는데 무엇을 아낄 것인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거야. 더 좋은 것을 주실 거야. 그것은 내 삶에 필요 없는 것일 거야.’ 하면서 넉넉하고 고마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축원합니다.

2. 여전히 죄인이라고 생각될 때

롬 8: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는 과거에도 죄인이었고, 오늘도 죄인이며, 또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때때로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고, 쉽게 분노하고, 까닭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고, 교만하고…. 
생각으로 짓는 죄가 끝이 없고, 말로 짓는 죄가 수그러들지 않고, 행동으로 짓는 죄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 ‘이런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 지은 죄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고, 내 감정이 ‘나는 죄인인데…’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끈끈이처럼 어떤 죄가 끊임없이 내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라는 자책이 심화될 때,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실까?’ 라는 회의가 듭니다. 

이에 바울사도가 대답합니다. 
바울사도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보라!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34절)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았는데 우리가 책임져야할 죄의 책임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② 하나님의 의롭다 하는 판정을 보라! 
“누가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니”(33절) 
즉 최고의 재판정에서 절대적인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No Guilty)!"라고 선언하시고 방망이를 세 번 두드렸는데 누가 감히 죄가 있느니 없느니 얘기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형사소송법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있습니다. 
유죄, 무죄, 불기소 등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하여 재차 공소제기를 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재판정에서 절대적인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셨는데 감히 누가 가타부타 하겠습니까?

③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인 되심을 보라!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변호인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수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할 도리를 못한 죄송스러움으로, 할 말을 못하고 더듬거리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서 우리를 변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죄인임이 분명하지만 그 죄의 값을 제가 대신 지불한 것을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 사람에게는 제 피가 묻어있습니다. 절대로 죄인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탄원하십니다.

얘기 하나 하지요.

(언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젊은 시절, 누구에게도 말 못할 죄를 졌답니다. 
신앙생활을 수십 년간 해오지만 가끔씩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없어지고, ‘이런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 장로님 친구 중에 산기도를 많이 하고 영이 밝은 장로님이 한분 계셔서 그 답답한 사정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자네, 하나님께 한번 여쭤봐 주게나. 내가 젊었을 때 지은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셨는지 아니면 아직도 용서하지 않으셨는지….” 
일주일 후에 친구 장로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네의 요청대로 하나님께 여쭤봤네만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죄로 인한 말끔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지워버렸습니다. 
사44:22절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죄에 관한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내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면 죄책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요한 1서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고후5:1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럴진대 누가 능히 고발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정죄하겠습니까?
죄가 아무리 커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압도합니다.

3. 시련이 겹칠 때

롬8: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어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대표적인 인생의 시련을 일곱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환난이란 외적인 환경에서 가해오는 압력과 고난을 말합니다.
곤고란 마음의 극심한 걱정과 불안을 의미합니다.
박해란 신앙 때문에 받는 모든 고난을 말합니다. 
기근은 굶주림을 말합니다. 
적신이란 벌거벗음을 뜻하는데 가난으로 인한 벌거벗음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소외까지를 포함합니다.
위험은 생명의 손상을 말합니다.
칼이란 순교자들이 당하는 목 베임과 같은 극한 상황을 일컫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참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분이 「연탄길 2」라는 책을 사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전부 실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웃들의 얘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그러하듯이 화려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텁텁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가슴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책 내용 중 ‘아빠의 편지’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병이 들어 애기가 첫 돌이 되기도 전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미안해. 너하고 아기만 남겨놓고 나 먼저 떠나가서. 아기가 태어나면 애기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줘.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아기 첫돌이 되는 날 내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어봐. 그것에 노란 봉투가 있을 거야. 그걸 아기에게 선물해 줘.” 
아내는 아기의 돌 날 노란 봉투를 열었습니다. 
봉투 속에 가족을 그린 남편의 그림, 예쁜 강아지, 인형, 돌 반지 그리고 분홍색 편지 한 통이 들어있었습니다. 

“아가야, 오늘이 네가 세상에 태어나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이야. 그래서 아빠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런데 너와 함께 있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아빠가 곁에 있었으면 동물원도 데려가고 예쁜 사진도 찍어줬을 텐데. 하지만 아빠는 언제까지나 너의 손을 꼭 잡고 있을 거야. 네가 눈물을 흘리면 맑은 바람이 되어 너의 눈물을 씻어주고, 네가 삶에 지쳐 쓰러지면 네 등을 쓰다듬는 따스한 햇볕이 되어줄게. 그리고 너를 보살피는 엄마의 힘겨운 걸음걸음마다 아빠는 늘 함께 할 거야. 아가야,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돼. 아빠는 별빛으로, 바람으로, 때로는 따스한 햇살로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아가야 안녕”
-하늘나라에서 너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가.

세상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시련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때조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시련이 점철될 때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것은 변장된 축복일 뿐이야.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①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 귀한 외아들까지 주셨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②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하나님의 의롭다하는 판정, 그리스도의 변호인 되심을 확인하십시오. 

③ 시련이 점철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시련은 변장된 축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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