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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6) : 광야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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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6) : 광야 (마 4:1~11)

  
신학교 초년생이 조직신학 첫 학기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관식 에세이 문제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도해도 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백지를 내고 나올 수 없었던 그는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성적이 어떻게 나왔을까요? 
채점 지를 받아보았더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100점, 넌=0점> 
인생의 딜레마는 하나님은 해답을 아시는데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이티 섬나라가 지진으로 초토화되었습니다. 대통령 마져도 도망을 갔었다고 합니다. 필립 얀씨는 이런 불가해한 재난을 당할 때 믿는 성도들조차도 그들의 마음속에 은폐하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과연 공평하신가? 둘째, 하나님은 도대체 왜 침묵만 하고 계신가? 셋째는, 하나님은 도망가신 것은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세 가지 질문 중 어느 문제에도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해서 가슴에 묻어 둔 채로 생존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런 재난들을 성경은 시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험의 유형만 다를 뿐 아무도 시험을 피해 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티 사람들은 그들의 시험을 당하고 있고, 우리는 오늘 우리만의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이런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이런 시험을 받을 때 놀라지 말고 이 시험을 잘 통과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벧전4:12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히2:18 말씀도 기억하시나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시험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 바로 성령에 이끌림을 받으사 광야로 십니다. 광야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광야는 유대 광야라고 불리워집니다. 예루살렘 동편으로 펼쳐진 이 광야는 무섭도록 아름답고 외로운 곳입니다. 

본래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편서풍 비구름이 예루살렘이 위치한 해발 600-1,000m의 서부 산악지대를 넘지 못하고 90의 비를 서쪽에 뿌리고 약 10 정도만 동쪽에 뿌리면서 서쪽은 비교적 비옥하지만, 동부는 광야 지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동의어로도 사용되지만. 굉야는 비가 오면 그래도 생물들이 살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험은 첫 사람 아담이 받은 시험이요, 이 땅을 살아가는 인생 모두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3대 시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시험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고 말합니다. 

1.육신의 정욕의 시험 

먼저 아담의 케이스를 볼까요?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면서 느낀 첫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먹음직 함>의 시험이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에게는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달라를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투자는 돌로 하고 거두어 드리기는 달라로 하라는 것입니다. 40일을 금식하며 주리시던 예수님에게 떡 소식은 얼마나 그럴듯한 복음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어떻게 승리하셨나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절) 그분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삶의 준거가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떡이라는 물질보다도 말씀이라는 영적 자산의 중요성을 더 확고하게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부당한 투기나 투자, 불의한 뇌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과 양심을 팔고 있는지요? 

어떻게 시험 준비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라고 말할 수 있도록 기록된 성경의 가치관을 내면화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의 실패는 교회에는 나오지만 우리가 붙들고 있는 가치관은 성경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우리 안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내면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 마귀의 유혹 앞에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힘들거든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때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향해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너는 과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말입니다. 


2.이생의 자랑의 시험 

첫 사람 아담에게 이 시험은 <지혜스럽게 탐스러움>의 시험이었습니다. 누구만큼 지혜로와 질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 만큼”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시험이 “성전 제일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5-6절)는 유혹으로 찾아옵니다. “그 후에 네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천사가 네 발을 들어 올리면 너는 내일부터 유명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소위 명예의 시험 혹은 인기의 시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pride of life''입니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한 생을 이름 석자 내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사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쁜 일이란 말입니까? 성경에도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택할 것이니라”(잠221)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물보다는 확실히 명예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는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특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청렴한 삶으로 재물을 모으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명예를 지닌 사람들을 우리는 아직도 존중합니다. 명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 잠221은 명예와 은총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진정한 명예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 받을 만한 인생을 살 때 자연스럽게 명예는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를 떠나 무리하게 자기 이름을 선전만 할 때 명예는 바람직하지 못한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는 구할 것이 아니라, 살 것입니다. 잘 살면 명예는 주어지지만 ,억지로 구하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명함에 많은 직함을 써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귀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출세와 명예의 대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내가 높아지기 위해 내게 이용되는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성으로 하나님을 높이면 그분이 나를 자연스럽게 높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 높이는 게임에 매달리지 말고 날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인생을 살면 됩니다. 내가 아닌 주님을 내 인생의 자존심으로 삼으십시오. 


3.안목의 정욕의 시험 

첫 사람 아담에게는 <보암직 함>의 시험이었습니다. 눈을 매개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8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그러나 이 말씀은 보여 주는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음 9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주리라” 결국 보이는 세상의 환상을 미끼로 사단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유혹입니다. 일종의 쾌락의 시험입니다. 우상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보다도 세상의 쾌락이 더 아름답게만 보일 때, 이웃에 대한 섬김의 삶보다도 이웃을 밟고 지배하는 출세가 더 매혹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때 , 그리스도안에 있는 내 존재보다도 내 소유가 나를 더 위로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안목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마귀는 예수님을 당시의 근동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였던 종려 나무의 도시 여리고 성읍이 가장 잘 보이는 여리고 맞은 편 <시험 산정>(Mt. Quarantal,희랍 정교회 수도원)에 세우고 예수님을 미혹했을 것입니다. 내게 절만 하면 이 도시의 문화, 이 도시의 쾌락, 이 도시의 영광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승리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10절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경배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나의 위로, 나의 기쁨, 나의 보람, 나의 만족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주일 경배는 이 고백을 확인하고 연단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주님, 저의 위로는 주님이십니다. 저의 기쁨도 주님이십니다. 저의 평화도 주님이십니다.” “저는 저의 만족을 세상에서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세상의 문화를 등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어느 정도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즐기다가 이 세상이 마치 나의 궁극적인 삶의 자리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아름다고 좋아도 세상은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 다시 요일2:15을 상기하십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믿음 생활 초기에 읽은 밥 포스터(Bob Foster)라는 분의 글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 분은 본래 성공적인 젊은 사업가이셨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중년기에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병으로 연속적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 시점에서 <무엇이 영원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대답을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모든 것이 지나가는데 세 가지만 성경에 영원한 것으로 기록된 것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고(벧전1:24-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리고 셋째로는 요일2:17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자신의 남은 생의 소명으로 발견합니다. 

최근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중 젊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제게 이 질문은 다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얼마 전 추천도서로 올린 <그 청년 바보 의사>가 생각났습니다. 

고려대 의학과 91학번 안수현그는 유행성 출혈열로 군의관 하다말고 예수님처럼 33세로 떠나간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잊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며 책을 만들고 그의 인생이 조용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 저 영원한 나라의 삶을 추구한 때문입니다. 

백혈병 걸린 아이와 친해지려고 무단히 노력하고 그 아이 하나를 위해 선물을 사들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모습, 간호사가 실수로 깬 의약품을 발품을 팔아 약품을 구하는 모습, 잠이 부족인 인턴 시절에 환자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는 그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의사들이 까운을 벗고 모두 파업을 할 때 왕따를 각오하고 환자의 곁을 지키는 그는 세상의 인정보다 자기의 주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나가는 인생 광야에 주님의 흔적을 남김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청년의 정욕이 한창인 때 그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꾼 바보-그런 바보는 또 없느냐고 주님은 묻습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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