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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구관대 (행 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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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관대 (행 11:1~18) 
 
 
11장의 전반부(11:1-18)는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어떻게 이방인 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습니다(1). ‘이방인들도’라는 표현 자체가 이 사건이 교회에 너무나 충격적이었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8장 14절의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표현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때로 사람으로서는 예상치 못할 뿐만 아니라 상상치도 못한 일일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은혜를 베푸실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며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해 나가는 일들이 목회 현장에서 많이 있습니다. 마치 홍해 가운데로 길을 내시듯이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길을 내시는 분을 보며 그저 감사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의 회심 이후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건의 소식이 먼저 전해졌고 나중에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에 기다리고 있던 “할례자들이 힐난”했습니다(2). 이들은 1절에서 언급된 ‘사도들과 형제들’ 전부가 아니라 그 중의 일부로 보입니다. 힐난하는 내용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입니다(3). 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나 세례를 준 것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할례 받지 못한 자들과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지요. 교회를 대표할만한 인물이 오랜 유대교 전통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갈 성질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할례자들은 앞뒤가 꽉꽉 막힌 수구골통들로 비췰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주장만 펼치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고집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변론을 잘 듣고 난 후에는 즉시 자기 견해를 수정했지요. 우리가 인정할 것은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증표로 주셨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표’와 ‘인’인 할례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지요. 다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의 그림자 기능이 끝나고 실체인 새 언약의 관계가 맺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정당한 이유도 없이 개방적으로 보이려고 혹은 진보적으로 보이려고 기존의 전통들을 과감하게 허문다면 올바른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적 신앙을 잘 보존하여 유지하고 계승하는 보수적 자세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제는 효용이 끝났음에도 지금까지 해오던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수하고 있다면 이 또한 잘못이겠지요. 개혁된 교회는 항상 말씀에 비추어 개혁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도적인 입장은 때로 균형 잡힌 시각이 되지만, 때로 혼합주의가 됩니다. 따라서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중도적이든 언제나 최종 결정은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할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차례로 설명”합니다(4). 10장이 사건 발생의 순서대로 기술되었다면, 베드로의 요약은 자신의 경험 순서대로 설명됩니다. 베드로의 요약은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반복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9),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12), “천사가 …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13),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점이 잘 드러나지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행하셨고 베드로는 다만 순종했을 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가 기둥 같이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갈 2:9).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는’ 절대 권력을 부여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한 사람의 성도로서 교회로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청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고서 힐난을 당했으니 상당히 억울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일을 행했을지라도 교회가 요청할 때는 교회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한편 교회는 그가 설명하는 동안 주의 깊게 잘 경청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그대로를 담담하게 설명했는데 ‘사실’ 그 자체가 강력한 변호가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 교회는 지도자를 기둥같이 존중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납하는 한 극단과, 묻고 따지면서 기둥 같은 지도자에 대한 존중심마저 상실해 버리는 또 한 극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권위를 가지되 권위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며, 권위주의를 비판하되 참된 권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참된 권위까지 무시하니 권위를 부리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를 부리고 있으니 참된 권위까지 무시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지요. 모두가 미성숙한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우선은 베드로처럼 기둥 같이 여김 받는 지도자부터 교회의 요청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겠지요.

베드로는 설교 중에 성령께서 고넬료의 가솔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면서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말씀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님을 목격한 것이지요. 15절에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라는 표현과 17절에 “같은 선물”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은 이방인을 유대인과 구별하지 않으셨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후 결론적으로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고 마무리 합니다. 베드로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막겠습니까?

베드로는 할례와 무할례의 구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할례의 의미를 무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할례의 전통조차 무시한 일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을 보수하기 위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고 강하게 반발했었지요(8).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분명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능히 막을 수 없었지요. 베드로는 옛 언약의 상징인 할례가 이제 새 언약의 피로 대치되므로 그 효용성이 종결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설명은 나중에 바울이 행할 몫이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통을 초월하여 행하기를 명하시면 언제든 순종한다는 분명한 자세가 있었지요.

자신의 행위를 이론적으로 잘 설명해 낼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고 했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 잘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는 일에 열등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할례의 신학적 의미까지 잘 말할 수 있는 사람만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은 아니지요. 베드로처럼 사실 그대로를 정직하고 단순하게 설명하기만 해도 교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큰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학적인 설명이 전혀 없이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했지요.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할례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 힐난하던 사람들이 힐난을 그치고 잠잠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그렇지’하면서 여전히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했지요. 마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베드로의 순종하는 경외심이 그들에게 옮겨진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넬료의 회심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확증하신 일입니다.

교회의 이방인 선교는 사람이 야단스럽게 단체를 결성하고 계획하고 추진해서 완성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지요. 먼저 한 사람 베드로부터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후에 변화된 그 한 사람을 매개체로 해서 전체 교회의 생각을 바꾸셨지요. 이를 보면 큰일을 하려기보다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할 상황이면 행동으로 순종하고, 설명할 상황이면 설명하되 그 모든 일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답게 행하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기존의 전통과 생각을 부인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누구관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잘 알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할 그분의 백성임을 잘 알았지요. 비록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다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실 때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이지요. 또한 베드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교회가 가진 원칙과 법을 마음대로 넘어설 수 있는 초법적인 존재가 아니었지요. 만약 베드로가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라는 자세로 힐난에 대응했다면 과연 18절처럼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문화는 평범한 존재(something)를 넘어 특별한 존재(something special)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유도합니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혐오하기까지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베드로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서 ‘내가 누구관대’(nothing)라는 겸손한 자기 인식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쟁들이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증시를 위해서는 ‘내가 누구관대’라는 겸손한 생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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