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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전통 (출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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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출 2:11~15)


믿음이란 단어와 순종이라는 단어 그 앞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믿음이 따라오고 순종이 따라와야만 합니다. 바로 신앙과 행위의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칼빈주의 사상은 넓은 의미에서 신구약 66권 전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은 로마서 11장 36절에 나타난 말씀 곧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 전통이 다른 교회와 다를 바 없다고 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첫째는 전혀 백지인 상태에서 분별력이 없는 경우이고, 둘째는 전혀 다른 신앙사상 아니면 혼합된 신앙사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교파주의자는 아니지만 교파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혼재된 신학사조 가운데 순결을 유지하기 원하는 개혁주의자들의 속성이자 성경의 절대적인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Ⅰ. 우리의 신앙 전통입니다.

1) 고려파 형성(形成)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고려파의 신앙 전통은 아벨, 셋,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세례 요한,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메이첸,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강줄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에서 고려파가 형성된 배경은 첫째, 정치적인 문제와는 상관없는 신앙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곧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신사참배가 '죄냐? 죄가 아니냐?'는 문제였습니다.

둘째는 '자유주의 신학이냐? 근본(개혁)주의 신학이냐?'는 진리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한점 여과 없이 수용해도 좋은 동인인 동시에 우리의 결과론적 입장입니다.
신사참배는 역사와 민족 앞에 죄 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다는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기선 목사는 설교하기를 "천조대신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잡신을 사랑하는 영적인 간음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주남선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까지 주신 사랑, 성신 주신 사랑, 계명 주신 사랑인데 이 사랑을 받은 자로서 어찌 배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 1, 2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곧 예수를 증거 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8.15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구속되어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출옥 성도들의 영적 혜안은 바른 신앙, 바른 신학 운동으로 한국교회를 다시 재건해야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고려신학교는 항도 부산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자유주의 조선 신학교(한국 신학대학 전신)와는 규모면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되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1946년 5월 20일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 세 분이 진해 경화동에 모여 신학강좌를 개강한 때부터 고려파는 사실상 태동되었습니다. 이때 신앙강좌는 성공리에 끝이 났고 여기에 힘을 얻어 고려신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1946년 9월 20일에 만주 봉천 신학원장으로 있던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모시고 부산 진구 좌천동에 있는 일신여학교 교실 하나를 빌어서 개교한 고려신학교가 마침내 이 세상에 탄생된 것입니다.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1947. 10. 14)한지 6개월(1948. 4) 만에 교장직에서 물러나 서울로 떠났습니다. 6.25와 함께 고려신학교는 온갖 세파와 싸워가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 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1968년 2월 28일 대학에 준하는 각종 인가가 나고, 1969년 9월에는 대학 동등 학력 인정 학교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970년 12월 22일부로 고려신학대학으로 설립 인가가 났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사실상 고려신학교는 폐교가 된 셈입니다. 1978년 4월 이사회에서는 고려신학대학을 고신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기로 결의하므로 부산에서 고려라고 하는 이름은 역사의 무대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2) 고려파 개혁(改革)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고려파 역사를 고려파 형성(形成)의 시대와 고려파 개혁(改革)의 시대로 보는 것이 고려파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는 저의 사관(史觀)입니다. 문제의 발단을 말하고자하면 지금 우리에게 할애된 지면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부산 고신대학에서 박윤선 박사가 교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시작된 문제입니다. 1973년도에 고신대학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부산 측에 한상동 목사와 마산(법통) 측의 송상석 목사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재산권 문제 때문에 벌어진 헤게모니(독, Hegemonie, 정치 운동에 있어서 주도권 싸움) 쟁탈전입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박윤선 박사가 교단을 탈퇴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박형룡 박사가 서울로 떠난 지 10년 만에 박형룡 박사의 뒤를 이어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박윤선 박사가 고려 신학교를 떠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 보다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고소를 하는 편은 항상 송상석 목사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상동 목사가 송상석 목사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문제는 성도간에 일어난 문제를 불신 세상 법정에 가서 고소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고린도전서 6장 1-11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성도 간에 일어난 문제를 불신 법정에 가서 고소할 수 없다는 분명한 성경의 대답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고신 대학 교수들은 불신 법정에 고소할 수 있다는 『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 』라는 논문을 낸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이 논문은 1973년 9월 13일 고신 총회를 앞두고 이미 불신 법정에 고소 해 놓은 상태에서 총회 이사회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총대들에게 비공개적으로 보낸 논문입니다.

당시 석원태 목사는 서울 경기노회로 이명한 후이기 때문에 비총대였습니다. 그래서 총회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신 교수들의 비 성경적이고 상황윤리적인 논문에 대해 좌시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회 개회 일주일 전에 전국 교회 앞에 경기노회에 소속한 경향교회 담임목사 개인의 자격으로 1973년 9월 18일 『 전국 교회 앞에 고려파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과 소송건 』이라는 공개 성명서를 배포했습니다.
따라서 총대들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제 23회 총회(1973. 9.20)에 참석했기 때문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소송은 중지하기로 가결 했습니다.

- 결의문 -

성도와 성도간의 소송문제에 있어 이의 신학적 해석이냐,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주장은 투표로 결정짓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성질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원인여하에 고사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소망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기본정신에 따라 금번 소송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교단의 평화와 단결을 위하여 또한 건덕을 위하여 총회 앞에서 유감의 뜻을 표하기로 하고 이를 사랑의 박수로 환영하므로서 이 문제와 노회장 회의가 총회에 보고한 관련건을 일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결의 동의한다.

제 24회 총회에서는 이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제 23회 총회결의(회의록 31페이지) 98항 "성도와 성도간의 소송문제에 있어 이의 신학적 해석이냐,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주장은 투표로 결정짓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성질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원인여하에 고사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소망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아니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이 기본정신에 따라 금번 소송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교단의 평화와 단결을 위하여 또한 건덕을 위하여 총회 앞에서 유감의 뜻을 표하기로 하고 이를 사랑의 박수로 환영하므로서 이 문제와 노회장 회의가 총회에 보고한 관련건을 일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결의 동의한다."를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라고 수정하자는 동의가 성립되어 가부는 투표로 하기로 하고 투표하니 가 72표, 부 7표, 기권 1표로 동의가 가결되었습니다. 
제 26회 총회에서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이라고 교묘하게 바꾸었습니다.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유일성과, 성경의 역사적 신임성과, 성경의 충족성과, 성경의 영원성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기수였던 고려파가 이게 웬일입니까? 성경을 파수함에 있어서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던 고려파가 아닙니까?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열린 조선야소교 장로회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1946년 6월 12일 서울 숭동교회당에서 일본의 비호 아래 성장한 자유주의 조선신학원을 남부 총회 직영 신학교인 조선신학교로 가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시대와 사건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이른바 상황 윤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부산 고신 교수들과 이사진들의 비윤리적 행위는 이상의 두 사건보다 더 큰 범죄사건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신자끼리의 재판은 성경과 교회법에 따라 처리될 것이므로 결코 불신 법정에 고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형제끼리 불신 법정에 가서 고소하는 것을 반대하는 항의적인 이름으로 반고소(反告訴)라는 명칭을 가지고 태동된 총회가 바로 반고소 고려측 총회입니다.
이미 1970년 12월 22일부로 숱한 공과(功過)를 안고 역사의 무대로 사라진 고려파 전통을 계승하고자 고려신학교를 1976년 3월 9일 서울시 서대문구에 소재한 영천교회당에서 복교하고 동년 4월 14일 종로구 평창동 산 111번지에 소재한 삼각산 제일기도원에서 고려신학교 현판식 예배를 가졌습니다. 

마침내 1990년 9월 13일 지금의 문산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 5월 22일자로 반고소 고려측에서 고려로 변경하여 부산측 고신과 구분키로 결의하고 이를 해당기관에 통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고려인의 신앙 전통은 첫째는 생활의 순결입니다. 이것은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에 있습니다. 둘째는 순교적 신앙입니다. 이것은 신행일치의 삶에 있습니다. 셋째는 목적적 사명입니다. 이것은 한국과 세계를 향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의 의지입니다. 넷째는 분명한 생활 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입니다.

따라서 고려신학교는 순교자의 고장입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운동의 산실로서의 고장입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운동의 산실로서의 시대적인 사명을 받은 학교입니다. 고려신학교는 바른 신학운동으로 시대적인 파수꾼 사명을 받은 학교입니다. 고려신학교는 세계선교의 센터로서 개혁주의 신앙의 한국교회 건설과 세계교회 건설의 시대적 사명을 받은 학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되는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의 길에 빠질 때마다 그들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7절에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일차적 교육기관은 부모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들로부터 과거 하나님의 섭리와 열조들의 역사를 배우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전통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4)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모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죽은 역사관이요, 죽은 전통입니다. 만약 그 역사가 자랑스러운 것이라면 교만해질 것이고, 치욕적인 것이라면 자포자기해서 절망의 늪에서 헤맬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전통과 열조들이 섬겼던 교회의 역사를 알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절대주권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체계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18세기 선각자였던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안다는 논어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보다는 한층 더 역동적인 말입니다. 박지원은 적어도 옛 것만을 자랑하다가는 다음 시기에는 반드시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선구자적 입장에서 설파한 말입니다. 법고와 창신은 각각 분명한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열조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새로운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패러다임(Paradigm)과 자기 확신이 서야 할 것입니다. 개혁을 오해한 나머지 창조니 개발이니 하는 미명아래 옛 것에 대한 무분별한 파기는 삼가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앙 운동은 옛 것의 파기가 아니라 옛 것을 쟁취하기 위한 이른바 새로운 영적 패러다임 (Paradigm)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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