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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보좌 앞으로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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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으로 (히 4:14~16)


옛날 배를 타고 여행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영국에서 증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배 삯을 간신히 마련해 배를 탔습니다. 여러 날 항해하는데, 파도가 거세고 멀미가 나는데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배 삯을 치렀기 때문에 돈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도 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고 싶을까봐 식당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았습니다. 4일째 되는 날까지 집에서 가져온 건빵을 조금씩 먹으며 버텼습니다. 

이젠 그나마 떨어져서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청년은 체면을 무릅쓰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입구에 서 있는 매니저에게 이렇게 통사정을 했습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배고파 죽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손님들이 남긴 음식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지배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말합니다. “아니, 그럼 이제껏 굶었단 말이요? 이런 세상에! 배 삯에 식사대금이 포함되어 있는 걸 몰랐단 말입니까?”

여러분, 이 청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에 저런 멍청한 친구가 다 있나? 이렇게 생각하시죠. 그런데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의 특권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불쌍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게 바로 ‘기도의 특권’을 잘 모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살 동안 사용하라고 주신 소중한 특권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영적인 무기를 주신 겁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도록 개설해 주신 핫라인(Hot Line)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중에 꼽을 수 있는 중요한 것은 기도를 잘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범사에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금년 한 해 기도 생활에 승리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기도의 특권 : 예수님 때문에 얻은 축복 

우리가 기도에 관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진리는 기도의 특권이 어떻게 주어졌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얻은 축복입니다.

본래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축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이 곧 영적인 사망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는 하나님과 상극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듣지 않고 만나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정화수 떠놓고 손금이 지워지도록 빌어도 하나님이 듣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누가 필요합니까?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 주는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란 단어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인데, 다리 놓는 사람(Bridge-Builder)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제사장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제사장입니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 승천하신 분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겁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예배)할 때 일반 백성은 스스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중보자인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도 정해져 있었는데, 성막(성전의 전신, 모형)입니다. 성막의 마당 한 가운데 방이 두 개 있었는데, 첫째 방이 성소이고 둘째 방은 지성소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성소까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하나님의 임재 경험하는 곳)로 1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이스라엘 종교력 7월 10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바친 짐승의 피를 갖고 들어갑니다. 그 피가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인고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고, 피로 속죄 받은 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성막의 지성소(至聖所) 안에는 언약궤(혹은 법궤)라는 궤짝이 있습니다. 그 뚜껑 부분이 속죄소(贖罪所)입니다. 이곳에 속죄의 피를 뿌립니다. 속죄소를 가리켜 뭐라고 부르냐 하면 자비의 자리(Mercy Seat) 혹은 은혜의 자리(施恩座 Seat of Grace)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인간 대제사장은 불완전합니다. 1년에 겨우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고, 죽으면 다른 대제사장으로 바뀝니다. 즉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완전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분이 오시기까지 예고편을 보여준 겁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가면 죽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함으로 누구든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으면, 그로 인해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가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실 때 놀라운 기적이 있었죠. 막15:37~38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대제사장 외에는 누구도 두려워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성소가 훤히 들여다보이게 된 겁니다.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이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 된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롬8:34 “ ...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유일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므로 기도를 가능하게 해 주신 분입니다. 요16:23~24 “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을 통하면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본래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보좌는 접근할 수 없는 멀고 먼 곳이었습니다. 무서운 심판의 보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부활 승천 이후에 스스럼없이 접근할 수 있고, 은혜를 구할 수 있는 은혜의 보좌가 된 것입니다. 

[2] 기도의 실천 : 은혜의 보좌 앞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게 곧 기도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편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15절 보세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신인양성(神人兩性)입니다. 

신성과 더불어 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과 시험을 훤히 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아시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체험적으로 아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천한 목수의 아들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셨습니다. 조롱과 핍박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예수님의 경험 범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십니다. 동정한다(sympathize)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와 우리 사이의 거리는 공간적으로는 멀고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전혀 거리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바로 앞에 하나님의 보좌(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① 때를 따라 :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편에서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는 것은 언제든지 항상 자유롭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전화 거는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죠. 요즘 전화 사정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통화중’일 때는 별 수 없습니다. ‘부재중’일 때도 답답하죠. “지금은 외출 중이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 주십시오.” 한창 바쁠 때 이러면 난감합니다. 자동응답기도 있는데, 설치한 쪽은 편리할지 몰라도 이용자 쪽에서는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버튼을 계속 눌러야 합니다. 용무에 따라 번호를 불러주면서 버튼을 누르라고 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잘못 물러서 몇 번 다시 시도해야 될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통화중일 때도 없고, 자동응답기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살전5:17 뭐라고 말씀합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다가 절박할 때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면 크게 소리쳐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귀가 먹어서 소리치느냐 그러는데, 우리 편에서 절박해지고 긴급할 때는 저절로 소리치게 됩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평소에, 고난의 때에 열심히 기도하라는 겁니다. 

② 담대히 :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는 말은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입니다. 성도는 이미 기도의 특권을 받은 자들이므로 확신하라는 겁니다.

가정에서 보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당당해요. 뭐 이러나 싶을 때도 있지만, 시실은 이게 정상입니다. 우리 집 아이가 한참 사춘기 겪을 때 한번은 무얼 요구했는데, 제가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계속 졸라도 안 들어주니까 나중에는 이렇게 대꾸하더라고요. “그러면 왜 낳았어?” 혼을 내 주고 사과를 받음으로 마무리했지만,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아이 말이 딱 맞습니다. 부모가 무능력해서 그렇지,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위해 피 흘려 죽으셨고, 우리가 그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에 당당한 겁니다. 물론 그 은혜에 감사해야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일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정반대였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에게 등록금 달라는 말을 안 했어요. 형제들이 여럿 있었는데, 고지서가 나와도 내놓질 않았어요. 그러면 답답하신 어머니가 책가방을 뒤져서 고지서를 보신 후 돈을 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항상 1등으로 등록금을 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이상한 성격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과적으로 형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등록금을 냈으니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제 아이들과 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비교해 보니까 오히려 제 아이들이 부모에게 맡겨 놓은 것처럼 요구할 때가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부모로서 능력이 없어서 다 해 주지 못해 그렇지, 그렇게 요구하는 게 오히려 즐거운 일입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죠. 하나님 마음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좋아하십니다.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the confidence)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사하되, 이런 당당함과 확신을 갖고 기도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기도의 종류 : 간구, 도고(중보기도), 합심기도(통성기도)

① 간구 :

흔히 기도할 때 ‘ACTS’를 기도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A는 찬양(Adoration), C는 고백(Confession ), T는 감사(Thanksgiving), 그리고 S는 간구(Supplication)의 약자입니다. 기도는 무조건 요청만 하는 게 아니죠. 먼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죄에 대해 고백하고 사죄를 구해야 합니다. 또 사죄의 은총과 각종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기도 중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게 간구인데,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누릴 귀중한 특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리고 가급적이면 입을 크게 벌려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시81:10 “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제비 새끼 주둥이! 둥지에 새끼가 여럿인데 어미가 먹이를 구해다 어떻게 골고루 먹일까요? 입을 크게 벌리는 순서대로! 물론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을 크게 벌려 간절히 기도할 때 더욱 더 신속하고 풍성하게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탈북 여성 중에 한국 대학(이화여대)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애란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만 해도 어려운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분의 간증에 의하면 기도로 가능했다는 겁니다. 그녀의 집안은 평양 창동교회 출신으로 북한에서 차별을 많이 당했습니다. 탈북을 결심하고 압록강 넘었고 베트남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탈북자들이 그렇듯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제일 어려운 게 영어였습니다. 

하도 어려워서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무료로 좋은 강사를 붙여주셨습니다. 토플을 5번 응시하던 끝에 500점(PBT)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석사 과정일 때 논문을 써야 되는데 늘 퇴짜를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새벽기도 40일을 작정했습니다. 눈물로 하루하루 기도하던 중 37일째 되는 날 방언이 터지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연구 모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도교수의 승인을 받고 석사 논문을 거뜬히 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는 겁니다.

② 도고(중보기도) :

우리는 축복을 나눌 축복의 통로의 사명이 있는데, 기도생활 가운데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를 위해서 간구해야 되지만, 더 나아가 ‘이웃을 위한 기도’의 책임을 감당해야 됩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를 성경에서는 ‘도고’라고 부릅니다. 딤전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 Intercession)와 감사를 하되” 도고를 흔히 중보기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중보기도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작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특권을 받은 자로서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모든 문제들에 관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선한 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의 사명이며 이웃에 대한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의 폭이 신앙의 폭입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의 크기가 신앙의 크기입니다. 

가족 사랑 중에서 제일 큰 사랑은 기도입니다. 자녀 뒷바라지 중에 최고도 ‘기도 뒷바라지’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교회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어르신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매일 신문을 보면서 기도하신다는 거예요. 신문이 ‘기도책’인 셈입니다. 오늘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큰 선교입니다. 북한 선교하는 목사님이 그래요. 기도는 돈도 안 들고 위험하지도 않은데 왜 안 하냐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숨 걸고 북한에 들어가는데, 기도도 안 해 주냐고 말하는데, 마음이 찔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n중보기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③ 합심기도(통성기도) :

‘합심기도’는 여럿이 어울려 기도하는 겁니다. 나를 위한 간구든,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이든 어울려서 하면 좋아요. 소리 내서 하면 ‘통성기도’입니다. 특히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미국의 연합감리교회 예식서에는 기도의 종류 가운데 Tongsungkido(통성기도)가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18:19~20 “19 ...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합심 기도는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이런 겁니다. 성냥개비와 장작더미의 차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장작더미입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개인은 성냥개비입니다. 어느 쪽에 축복의 역사가 더 풍성하게 나타나겠습니까? 

여러분! 기도는 성도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느 것이라도 기도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당신이 기도한 후에는 기도보다 더한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기도할 때까지는 기도보다 더한 것을 할 수 없다.”(존 번연)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기도는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은 은퇴하면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 ”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특히 중보기도를 하지 않는 게 죄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금년만큼은 이전보다 더 많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도모임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고 나누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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