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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의 생각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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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생각 (눅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19~31)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진리는 무엇일까요. 부자는 지옥에 가고, 이 세상에서 고생한 거지는 천국에 간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부자는 나쁘다’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꼭 영적인 것만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부(富)와 귀(貴)를 하나님에게서 받아 누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본문의 앞과 뒤를 같이 살펴보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될 것입니다.  성경이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앞과 뒤를 같이 보아야 그 바른 의미를 알 때가 많습니다.   또 예수님이 이 말씀을 지금 누구에게 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지금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게 불평을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일차적으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앞의 눅15장을 보면 3가지 잃어버린 것을 찾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마침내 찾은 목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아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 까지 부지런히 찾아내는 여인의 이야기,   집나간 둘째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려 마침내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가 잃어버려진 사람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세상과 신앙의 중심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義)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자기 생각, 자기 정의, 자기 철학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자 부자인 오늘 본문의 주인공 부자도 그랬습니다. 그도 자기의 생각, 자기신념, 자기철학대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 내 정의가 아니라 성경의 생각, 성경의 정의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이어서 16장 1-18은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의 결론은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재물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부자는 나사로에게 냉정했고 개들조차도 주인을 닮아 나사로를 괴롭혔습니다.  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시 바리새인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인 19절-31절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3,1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돈은 축복’이요,  ‘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은 저주’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많은 돈은 자기들의 좋은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법적으로 돈을 좋아했고 돈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생각이 옳은 생각인가요? 물론 지금 이 시대에도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진 이런 생각이 우리들에게 많이 남아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바로 뒤이어서 17장 일절에 이렇게 이어서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17;1,2)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한 부자(富者)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는데”  저는 이 성경의 첫머리부터 막혔습니다.  이런 부자가 있나요? 부자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부자가 될 수도 없고 가진 부를 유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이렇게 날마다 연락(宴樂)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호화로이 연락을 한다고 했습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르긴 하여도 이 부자는 죽을 병에 걸렸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몸, 쌓아놓은 재물이나 다 쓰고 죽자’이런 마음이 아니면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베푸는 이 행동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이 부자는 자기가 모은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아마 자녀를 낳지 못했던지, 자녀가 병이나 사고로 일찍 죽었던지...) 지옥의 불꽃 중에서도 자기의 형제 5명을 부탁을 하면서도 자기의 자녀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자식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매일 연락(宴樂)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지요.  그 부자의 대문에 잊혀 진 채로 누워있는 거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라도 배불리려 했으나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핧더라고 부자의 철저한  냉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는 배불리 먹어도 사람은 거지라는 이유로 개에게서도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부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다는 것이요, 두 번 째는 그 즐기는 중에서도 자기 집 대문에 있는 나사로는 철저히 냉대한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하라고 해도 하기 어려운 차갑고 인정 없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삶과 생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인가요? 가난한 사람은 내 집에서 기르는 개보다 못하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곧이어 두 사람의 죽음이 나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천국에 있다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아마 여기서 이미 어떤 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다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듣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 듣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유대인입니다. 특히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전혀,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 율법과 스스로의 경건에 찌들은 사람들,  동시에 부(富)에 집착을 하는 부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연히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특히 부자인 자기들은 선민중에서도 특별한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선민이라고 다 같은 선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 받은 선민이 있고 저주받은 선민이 있다. 나는 복(福)받은 특별한 선민이다. 그 증거는 나의 부(富), 즉 내가 돈이 많은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부자도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부자는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라는 말씀대로 그는 나사로를 실족시킨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실족시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았습니다.  이제 부자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성도여러분, 이 부자는 살았을 때 신념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부자의 신념은 바로 앞의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의 신념이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신념대로 살면서 나사로를 실족케 했고 그 댓가로 지옥 불 가운데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나의 궁금증은  나사로가 천국에 간 이유를 잘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이름이 하나의 이유는 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셨다’입니다.  그는 극도의 가난과 학대에서도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름 말고는 전혀 다른 어떤 설명도
      없습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죽어 천국에,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우리는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① 지옥과 천국은 있다.  
② 지옥과 천국은 땅에서의 삶과 연결 된 곳이며, 땅의 삶을 심판하는 장소이다.   
③ 지옥에서도 천국에서도 뚜렸한 ‘의식’이 있다. 고통의 감각도 느끼며, 아브라함도 나사로도 알아보는 ‘지각’이 있다.  
④ 지옥에도 소원이 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가 없는 소원이다. 
⑤ 지옥에서도 형제사랑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형제들이 자기처럼 지옥에 오는 것으로 끝나는, 세상과는 단절된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다.    
⑥ 성경말씀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기적으로 회개가 안 됩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부활로도 회개가 안 됩니다.

 성도여러분, 놀라운 것은 지옥에서 부자가 두 가지를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확신은 지옥에서도 변함이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호칭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친근하게 “예(야)”라고 대답을 합니다.

두 번째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자기가 지옥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부자처럼 살면, 바리새인처럼 살면, 예수님 잘 믿는다 하는   우리도 지옥에 간다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부자는 땅에 있을 때, 자기의 재산이 자기만의 것이며, 그것이 자기를 즐겁게 해준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 확신대로 살았던 결과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자는 ‘내가 왜 이 지옥에 와야 하는가? 나는 잘못이 없다’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해봐야 소용도 없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지옥에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도여러분,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심판은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이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 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는 사실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녀(子女)라는 것의 바른 의미는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인 것은 알지만 자기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자녀(子女)인 것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자기처럼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이 아브라함의 자녀인 나사로에게, 즉 형제관계인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했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남이라고, 철저한 타인으로, 아니 자기 재산을 욕심내는 원수라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아까웠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했겠지요. 

그는 두 가지를 몰랐습니다. 

① 인생이 사후(死後)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죽음 후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후의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땅에서의 삶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지식으로는 알았겠지요.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을 했던 것입니다.   

② 자기에게 유산을 물려줄 자녀가 없다는 것만을 알았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녀 인 것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나사로와 자기가 형제인 것을, 한 가족 인 것을 몰랐습니다. 자기 자식, 자기 핏줄만이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게 나사로는 집에서 기르는 개보다 못한 철저한 타인이었습니다.   그에게 인생은 철저히 이기적이었고, 자기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작정을 하고 자기 돈으로 자기 인생을 즐깁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宴樂)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기 잘못된 신념대로 후회 없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인생을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전도사님이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예수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예수님 지금 천국에 목사님이 한분 들어 오십니다’ 하니 예수님이 버선발로 뛰어 가더랍니다.  하도 섭섭해서 ‘예수님 천국에서도 목사님과 여전도사님을 차별하십니까’ 하니 예수님 말씀이 ‘아니다. 예야, 여전도사들은 천국에 자주 오는데 목사는 하도 오랜만에 와서 너무 반가워서 그랬다’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목사님을 비난하는 이야기인가요? 아니요. 목사님이 이러면 평신도들은 더 심하다 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부자가 주는 교훈과 같지 않나요?  부자처럼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도, 목사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평생을 외친 사람도 지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박용규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한 간증에도 수많은 목사님들이 지옥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냥 교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 부자가 지옥에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가 맞습니다. 그러면 생활도 그래야 합니다. 16장 14절부터 봅시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16;14-17)  

우리의 생각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확신 보다, 우리의 인생관보다,  성경의 진리를 따라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말합니다.  여러분, 길다 면 길고 짧다면 별것 아닌 짧은 인생을 살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살려고 합니까?  

성경을 기준으로 사십시오.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특히 이단들을 주의하십시오. 그들은 반드시 자기들만이 옳다고 합니다. 자기만이 옳은 성경을 받았고 다른 이들은 다 틀렸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틀렸고 자기들은 어떻게 옳은지 절대로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비교하면 죽는 줄로 알고, 무조건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진리가 어디 있나요.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임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이 중요합니다. 

저는 부자의 말이 마음에 계속 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가 지옥의 불꽃 가운데에서 처절하게 외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그의 절규입니다. 왜 그는 불꽃 가운데서야 그때서야 아브라함이 “아버지”인줄을 알았을까요. 아브라함이 아버지면 나사로는 그의 형제인 것을 왜 그는 살았을 때는 몰랐을까요!!!

우리는 지옥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낮은 신앙이 우리의 삶과 기도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봅시다. 성경은 얼마나 가까이 합니까? 기도는 어느 만큼이나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고 있나요?  혹시 성경은 6일 동안은 먼지가 덮혀 있지는 않은가요? 식사 때만 기도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요?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주제는 ‘삶’입니다.  믿는다 하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잘 맺히고, 감사가 충분히 있고,   간증할 수 있는 시간을 살고 있나요?  이웃 사람들과의 사이는 어떤가요? 아니 교회안의 같은 믿음의 식구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가족입니까? 아니면 철저한 타인입니까???  부자처럼 처절한 절규의 주인공이 나 자신이 되지는 않을 수 있나요?  

우리의 신앙은 삶이라는 열매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단들이 정말 틀렸다고 확신을 합니다. 이단에 빠지면 꼭 여자나 남자나 가정을 버립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버립니다. 학교를 떠나고 직장을 떠납니다.  여러분,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신앙이 옳으면, 그들 때문에 깨어진 가정이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집나간 자녀가 돌아와야 합니다.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학교로, 직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은 삶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왜요? 하나님과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은 사람은 깡패가 목사가 되고, 집나간 자녀가 눈물을 흘리며 부모에게로 돌아옵니다. 바람 피고 가정을 돌보지 않던 남편이 잘못했다고 회개하면서 착한 가장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회복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증거입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남을 살리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한1서 4:1) 영이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을 구별하고, 영들이 주는 교훈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부자가 나 자신이 아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그들도 전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도는 천국 문을 닫고, 지옥자녀들을 만드는 전도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만큼 잘못된 삶,  외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과연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나요?  현재의 우리의 삶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는 오늘 말씀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아보지 않으면, 철저히 ‘너는 너고 나는 나’이면,  그런 사람이 오늘 성경의 부자처럼 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이웃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나누어야 합니다.  남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입니다. 우리는 한 몸의 각 지체이며 한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장 큰 사랑은 바로 ‘전도’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간증을 해도 안 믿습니다. 죽어서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와서 간증을 해도 안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말씀을 가지고 행동으로, 사랑으로, 전도하면 믿습니다.  사랑愛 만이 정답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지옥 보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한해를 마치는 이 시점에  전도의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큰 사랑은 바로 ‘전도’입니다.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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