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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앞장선 자의 축복 (창 4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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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선 자의 축복 (창 49:8~12)


요즘 우리나라가 세계무대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철강. 조선, 건설, 자동차, 전자, 반도체, 핸드폰이 그렇습니다. 세계일류입니다. 
의료계에 있어서도 서울아산병원 외과 이승규 교수팀은 간이식 성공률이 96%로 세계최고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의 수십 개국 의사들이 그의 수술을 배우려고 아산병원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아산병원에서 수술한 간이식 누계가 2500건을 넘었는데, 이는 일본전체 병원의 누적 실적인 2300여건 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스포츠 분야도 그렇습니다. 요즘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가 세계 피겨 스케이팅 여왕이라 불리어 지는가 하면, 세계적인 축구스타 박지성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도에 있었던 북경 올림픽 경기에서 영광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수영의 박태환 선수, 역도의 장미란 선수, 9승 전승으로 우승한 야구선수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 기량을 보인 선수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분야에서 남다른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우연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남다른 사랑과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린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가 신앙생활에 앞장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열두 지파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은 지파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지파입니다. 이 유다지파에서 다윗을 비롯한 대왕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지파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유다지파가 이렇게 큰 축복을 받아 누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지파는 매사에 적극적인 자세로 앞장선 지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어떤 공로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춰진 인간의 모습에 대해 로마서 3장 10절~12절에 기록하기를“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축복은 행함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축복은 철저하게 심고 거두는 자연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앙행위를 심고 거두는 자연의 법칙에 적용하여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6절 말씀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운데 유다지파는 무엇을 어떻게 행했기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Ⅰ. 유다 지파는 매사에 앞장섰습니다.

열두 지파가운데 유다지파가 어떤 일에 남달리 앞장을 섰습니까?

1. 유다는 생명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찬송”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9장 35절에“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했습니다. 유다는 이름처럼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나 다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자식에게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야곱은 이름처럼 살아서 하나님께 찬송이 되었습니다. 찬송이란 뜻의 유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열한째 아들 요셉을 시기하여 미워하다가 마지막에는 우물에 빠뜨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때에 요셉의 생명을 구한 사람이 유다입니다. 창세기 37장 26절~28절에 이 사실을 기록하기를“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요셉의 이복형들이 요셉을 기어이 죽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유다의 말을 들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는 대신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것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요셉을 살리는 길은 노예로라도 팔아넘기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긴 후 아버지 야곱에게는 맹수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고, 요셉은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근동지역 전체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지혜로운 요셉이 나라를 다스리는 애굽에는 양식이 풍성했습니다. 이때에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형들을 알아본 요셉은 지난날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함께 온 시므온이라는 형제를 구금시키고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시므온을 구금하면서 내 건 조건은 야곱의 막내아들이며, 요셉의 친 동생인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은 아픈 기억을 되새기면서, 요셉을 잃었고, 이제 시므온까지 애굽에 감금되었는데, 막내아들 베냐민마저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애굽에서 구해온 양식은 다 떨어졌습니다. 모든 가족은 다시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도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설득시켰습니다. 

아버지 야곱을 설득시키는 장면이 창세기 43장 9절~1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를 설득시킨 후 양식을 구하고자 다시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굽 총리인 요셉이 형들의 마음을 저울질하고자 막내 동생 베냐민을 또 감금시켰습니다. 이때에도 유다가 나서서 다시 요셉을 설득시켰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 창세기 44장 31장~34절에 기록하기를“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유다는 항상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을 때에 요셉의 생명을 건진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시므온이 애굽에 감금되고 애굽에서 구해온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에 아버지 야곱을 설득시켜 만일 시므온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그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한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막내 동생 베냐민이 애굽에 감금되었을 때에도 요셉을 설득시킨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생명을 건지고자 몸부림 친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와 그의 후손들에게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앞장서서 살려야할 영혼들이 없습니까? 많이 있습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의 약 60억이 넘는 인구 중, 죽어가는 사람이 하루에 약 21만명 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숫자를 좀 더 세분하면 한 시간당 8,700명, 1분간에 150명, 1초에 25명가량이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매일 죽어가는 21만 명 중에 90%가량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영혼들을 권면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유다지파는 광야를 지날 때 앞장섰습니다. 

민수기 10장 12절~14절에 보면“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신 것을 좇아 진행하기를 시작하였는데 수두(首頭)로 유다 자손 진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진행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시나이 광야를 지날 때 구름이 장막에서 떠오르면 진행하고 구름이 멈추면 진행을 멈췄습니다. 구름이 떠오르고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진행한 것이 아니고 지파별로 나뉘어 진행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메마른 광야, 언제 어디서 어떤 족속이 나타나서 가는 길을 막고 해칠지 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언제나 선발대는 후발대보다 위험합니다. 이러한 위험한 광야를 진행하는 동안 언제나 선발대로 나아갔던 지파가 유다지파였습니다. 이렇게 유다지파는 전진에 앞장섰습니다. 유다지파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데 앞장섰습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항상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주의 몸인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역사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유다지파가 우리에게 보여준 삶의 지혜이며, 축복의 비결입니다. 

3.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에 앞장섰습니다. 

사사기 1장 1절~2절에“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고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희생당하는 경우는 앞장선 사람입니다. 전쟁에는 아무나 앞장서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을 앞에 세웁니다. 잘 훈련된 사람을 세웁니다. 상륙부대인 해병대가 그렇고, 특수부대가 그렇습니다. 담대한 사람, 강한 사람을 뽑아 훈련시킨 뒤 최전방에 투입합니다. 유다지파가 이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가장 담대한 믿음을 가진 지파였습니다. 하나님은 겁 많은 사람은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사사기 7장 3절에 전쟁에 나갈 사람을 뽑되 무서워하는 사람은 제외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고했습니다. 유다지파는 이처럼 믿음 안에서 담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습니다. 믿음대로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능력 밖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간 능력의 범주 안에 갇혀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은 이 믿음을 함양시키기 위해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얻는 길은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교회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깊은 사람을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 

4. 유다지파는 성전 건축에 앞장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사람이 유다지파 다윗과 솔로몬이었습니다. 이들은 온 정성을 다해 예루살렘 성전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잘 건축했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건축은 다윗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동식 천막 성전을 바라본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자 나단 선지자와 의논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절~2절에 이에 대하여 기록하기를“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궁궐은 백향목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궁궐인데 하나님의 성전은 천막으로 되어 있는 것이 죄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 성전을 잘 지어야 하겠다는 것이 다윗의 심정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살피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무엘하 7장 4절~9절에“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무엘하 7장 7절에“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도 성전을 건축하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었거늘 이렇게 자원하여 성전을 건축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한 없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건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성전건축이 마치 세속에 물들어 타락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제와 선교를 강조합니다. 구제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성전건축은 그보다 우선되어야할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유다지파가 앞장서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토록 기뻐하시면서 네 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내가 너를 존귀하게 하리라(사무엘하 7:9). 둘째, 평화와 안정의 복을 주리라(사무엘하 7:10). 셋째, 장수의 복을 주리라(사무엘하 7:11). 넷째, 후손의 복을 주리라(사무엘하 7:12)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8절에 이러한 기사가 있습니다.“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를 지켜본 가룟유다는 왜 낭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구제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마리아를 향해 잘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마태복음 26장 6절~13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 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팔아 구제하교 전도하는데 사용하지 왜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하셨습니다. 극찬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었으므로 성전건축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어떻겠습니까?“예수님은 책 한권도 쓰신 적이 없으므로 누구든지 책을 출판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또한“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된다.”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예수님은 집을 가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집을 가지면 안 된다.”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육신으로 계시면서 사역하실 때에는 예루살렘에 헤롯이 지은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정성을 다해 잘 지어진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전과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기록이 신약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건축을 하는 대신 구제와 선교에 힘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자기가 거처할 집은 고급저택이나 고급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이것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성전 사랑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구제도, 선교도 중요하며 시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더 많은 구제와 더 많은 선교를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청교도에 의해 세워진 미국의 교회가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성전건축에 앞장선 유다지파를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Ⅱ. 매사에 앞장선 유다지파가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1. 후손 번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한 후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전쟁에 나갈만한 20세 이상의 남자를 계수했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총인구가 603,550명(민수기 1:46)이었습니다. 이를 평균으로 계산하면 한 지파 당 5만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74,600명(민수기 1:26~27)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앞장선 유다지파의 인구가 가장 번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 유다지파의 번성을 예언하기를“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라고 했습니다. 사자 새끼라는 것은, 어미 사자가 먹이를 가져다가 새끼에게 주면서 그 새끼가 다 먹을 때까지 어미 사자가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암사자와 수사자란 그를 당할 자 없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유다는 생명을 사랑하는 더없이 유순한 인품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사자처럼 강하게 하셨습니다. 

2. 존귀함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유다지파에서 왕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본문 10절에“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유다의 후손가운데 대대로 고관과 지도자들이 나올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홀은 왕권을 상징하는 증표로서 왕이 공중 집회 때에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항상 휴대했습니다.“치리자의 지팡이”도 다스리는 자의 지휘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유다지파에 20명의 대왕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대왕이 가장 많이 배출된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3. 평화와 물질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11절~12절에“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매사에 앞장선 유다지파에게 평화와 축복이 풍성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셨습니다(마태복음 21:5~9). 본문에서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고 했습니다. 짐승은 보통 잡목에 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에 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포도나무가 매우 흔하므로 나귀까지도 포도나무에 매어두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유다 자손들이 누리게 될 평화와 풍성한 축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포도주가 풍성하므로 거기에 옷을 빨아도 될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곡식이 풍성하므로 함께 나누는 기쁨을 비유한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며, 평화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넘치는 축복이 약속되었고, 이루어졌습니다.“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삶, 평화를 이룩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지파로 오셨습니다. 

본문 10절에“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실로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유다지파로 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유다는 생명을 건지고 살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영혼 구원에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유다는 광야의 전진에 앞장섰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메마른 광야, 언제 어디서 다른 족속들이 나타나 가는 길을 막을지 알 수 없습니다. 선발대는 후발대보다 위험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광야를 진행할 때 선발대에 선 지파가 유다지파였습니다. 유다지파는 전진에 앞장섰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데 거룩한 일에 앞장섰습니다. 꿈을 향한 적극적인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유다지파였습니다.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가장 담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지파였습니다.

유다지파는 성전건축에 앞장서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지파를 사랑하셔서 후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숫자만 번성한 것이 아니라 존귀케 하셔서 왕위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평화와 물질의 풍성한 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메시아까지 유다지파로 오시므로 유다지파를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유다지파가 하나님의 일에 앞장선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유다지파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한 축복을 함께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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