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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불신앙 (막 1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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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불신앙 (막 10:28~31)


2006년도에 개봉된 영화중에<오만과 편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원작은 소설입니다. [키이라 나이들리]라는 여 배부와[매튜 맥퍼딘]이라는 남자 배우가 나오는 작품인데 지적이고 영리하지만 자존심 강한 여자 주인공이 친절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무뚝뚝하고 잘난 척하며 신분이나 가문을 중시여기는 남자주인공과 사사건건 맞닥뜨리면서 묘한 감정의 스파크를 일으킵니다. 서로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지만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 대해서 오만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남자 주인공은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는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내지만 서로에 대한 깊은 오해 때문에 반감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리는 감정에 결국은 오만과 편견을 무너뜨리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해피엔딩의 영화입니다. 

2006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시상식에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영화로 제목 그대로 남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만과 여자들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편견에 대한 갈등을 잘 묘사한 영화입니다. 결국은 이 오만과 편견이 무너지고 행복이 자리 잡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있을 법한 것이 오만과 편견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내가 아무리 옳게 여기고 오래 동안 신조처럼 생각했던 것이라도 오늘 와서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그걸 잊어 버려야 되고, 의식을 바꾸어야 되고, 생각을 고쳐야 되는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을 우리가 씁니다만 개혁이 무엇입니까? 개혁이란 변화에 응하는 적극적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저절로 변화되는 변화가 아니라 선택적이고 의식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그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그런데 개혁 가운데 가장 어려운 개혁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을 뜯어고치는 겁니다. 모든 게 다 바뀌고 무엇이든 뜯어 고칠 수 있지만 생각이 여전히 그대로라면 문제입니다. 생각만 좀 바꾸면 자유 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겠는데 그 생각 하나를 돌리지 못해서 한평생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이 편견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속이 편할 때가 있습니다. 모르니까요. 그런데 알아서 탈입니다. 너무 알아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누가 더 불행한 것입니까? 누가 더 괴로운 겁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이 말씀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대로 보면은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그리고 대단히 의미심장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의 이 말씀에는 먼저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깨뜨리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됐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먼저 알았다는 것입니다. 지식에 대해서, 경험에 대해서“내가 다 해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된다.”,“안 된다.”를 내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 위험한 일입니다. 경험을 했으면 얼마나 했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데 뭐든지 다 알고 경험해 본 것처럼 말합니다. 몇 가지만 알면서“다 그렇지 뭐!”라고 말하는 말하자면 이<보편화>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도대체 내 경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불완전한 것인가를 모릅니다. 그러면서“먼저 다 경험했다.”라고 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지식, 자기 경험, 그리고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자기가 먼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심리학자[골든 올포트(Golden Allport)]라는 사람이 말하기를“편견을 만드는 것도 종교요. 편견을 깨뜨리는 것도 종교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기 생각이 굳어지고 교리화 되면서 무서운 편견, 즉 고정관념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편견을 깨뜨리는 회개 운동도 역시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우리의 뜻을 바꾸고, 우리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온 자기 의지까지 다 바꿉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낡은 고정관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돈이 행복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또 많이 배워야 출세한다는 것도 똑 같습니다. 그런데요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내가 돈 있어 보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르고 내가 못 배워서 그런 건지 몰라요. 어쨌든 돈 있는 사람이 꼭 행복 한 것이 아니고 배운 사람이 다 출세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게 다 편견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라는 것이 기득권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보장된 그 무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배경이 되고 있는 인물들 중에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시에 자타가 인정하는 소위 먼저 된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믿고, 성경 많이 아는 전문적인 종교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 기득권, 바로 이 먼저 됐다는 고정관념을 깨지 못해서 저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가진 비 신앙적인 기득권이 신앙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으니 아무리 먼저 되었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잘난척해봤댔자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중 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 얘깁니다. 조금 아는 성경이 문제요, 또 좀 거룩하다고 하는 게 문제요, 남보다 좀 깨끗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그게 바로 문제였습니다. 그것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영원히 나중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편견이 나를 망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자꾸 멀어지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마21:31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이 말씀 역시 오늘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진리입니다. 우리 역시 고정관념을 깨야 됩니다. 뭐 잘 안다는 거 묻어 두세요. 무엇에든지 먼저 됐다고 하는 생각을 깨끗이 잊으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이 말씀의 깊은 뜻은 미래의 가능성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됐다고 해서 반드시 마지막까지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나중 됐다고 해서 늦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미래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그 행복이 영원한 것이 아니요, 지금 재산이 있다고 자손만대에 그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또 나중 됐다고 슬퍼 할 것 없습니다. 벌써 운명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혹 지금 내가 불행하고 내가 지금 비참하다 하더라도 나중 된 내가 먼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행복과 밝은 운명이 공평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위장되고 위선적인 헌신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28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는 말이 나옵니다.“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앞부분에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대답이 28절입니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자신 있는 대답이고 그래서 칭찬들을 만한 말입니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에는“정말 네가 다 버렸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묻는 심정이 들어있습니다. 정말이지 제자들은 직업도 버렸습니다. 자기 가정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허영심이나 명예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 버렸다고 자신 있게 대답은 하지만 들여다보면 여전히 욕심이 있고,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35절 이하를 가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앞에 청원하기를“좌편에 우편에 앉게 해 주세요.”라는 욕망을 내비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럴 때에 다른 열 제자들이 화를 냈다고 41절에서 말합니다. 왜 화를 냈겠습니까? 열 명 모두에게 아직도 허영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는 것이거든요. 다 버린 것 같으나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게 주를 따른다고 했지만 가만히 보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 다 버렸다면 남이야 무엇을 원하든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따르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정확하게 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잊어버리고 깨끗이 잊어버리고 주를 따르기로 했다면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 먼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중 되었다가 다시 먼 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새기십시오. 먼저 되고 나중 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의 현재성입니다. 오로지 섬기는 마음으로, 오로지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고 신앙의 내실을 기할 뿐입니다.“으뜸이 되느냐 뒤로 가느냐!”,“먼저 되느냐 뒤가 되느냐!”,“크냐 작으냐!”,“우편이냐 좌편이냐!”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진실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여기면 될 일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이게 다냐?”,“이게 답니다.”빼앗은 물건은 가지고 가고 칸트의 아버지는 놓아주었습니다. 무서워하면서 얼른 도망을 하는데 팔에서 무엇이 덜렁덜렁 거립니다. 가만히 보니까 금덩어리 몇 개를 혹시 잃어버릴까 해서 옷소매에다 꿰맨 게 있었는데 그게 덜렁거리는 겁니다. 그때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아차! 내가 거짓말을 했구나. 가진 것 다 준다고 했는데 이걸 잊어버렸네!' 하면서 이 금덩어리를 가지고 다시 강도한테 가서“아까 내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기 보니까 금덩 어리가 여기 있는데 다 줬다고 했습니다.”그랬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금덩어리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일평생 잊을 수 없게 괴롭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도로 갖다 주었더니 이 말을 듣고 강도들이 다 회개를 했답니다. 남들에게서 빼앗았던 금덩어리들을 다 내놓고 회개하며 기도해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정말 위대한 진실입니다. 돈 몇 푼 얻기 위해서 영혼이 썩어가는 거짓말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위대한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기와 질투,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끗이 버리고 순수한 겸손과 오직 은혜의 사람이 될 때에 위대한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여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이 혹시 무엇에 먼저 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끝까지 지킬 것이요, 나중 되었습니까? 무엇에든지 충분히 먼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현재의 내 신앙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위대한 역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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