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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 (히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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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 (히 11:1~4)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는 소망을 품고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轉機가 되었으면 합니다. 창세기 5, 21을 보면 아담의 계보 중, ‘에녹’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나이 6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특별한 전기를 맞이합니다. 마침 그 때,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삽니다. 하나님이 그런 에녹을 너무 귀하게 보시고는 그를 살아 있는 채로 데려가 버리십니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합니다(창 5, 21-24).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던 에녹의 삶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삶’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단서까지 붙여놓았습니다. 바라기는 2010年度가, 우리 모두에게 에녹의 나이 65세와 같은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오늘 이 시대의 時流․風潮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굳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나가서 찾을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 삶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본문은(창 4, 1-15배경말씀),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가? 할 때, 그 最優先順位, 零順位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싶으지요? 그렇지 않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禮拜입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아니, 예배하기 위해 처음부터 창조 받은 존재입니다. 좀 더 욕심을 내서 말씀드리자면, 참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구원받았고, 참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 되기를 원하시는지요?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셨습니다(고후 1, 20).

예배에는 두 가지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도 있습니다. 그것은, 全的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에덴 동산에서는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지 않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땅을 갈게, 수고하게, 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 증표로, 그들이 받은 첫 번째 福이, 자식을 낳게 된 福입니다. 맏아들, 가인(ן󰖹󰙍)을 낳습니다. 

아담이 가인을 낳고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得男하였다”(ןיק). 가인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아우, 아벨(헤벨, לבה, ‘호흡’, ‘헛됨’)까지 낳습니다. 갑절의 복을 받은 거지요. 하나만 낳아도, 感之德之인데, 아들을 둘씩이나 낳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행복했을까요? 低出産時代인 요즘, 한 생명 한 생명 태어나는 것 얼마나 귀합니다. 당시,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는 사건은, 그저 두 아들을 낳았다는 그런 감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갈 希望이 있구나, 과연 역사의 과연 未來가 있구나, 이제 드디어 우리가 살았구나…, 그런 감동적인 사건이고, 사인입니다. 

그러나 그 감격, 그 희망, 그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기치 않던 사건으로 또 중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어버린 바로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希望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죽지 않고 살아갈 희망, 새로 움돋는 역사의 희망, 미래, 그것이 과연 무엇으로부터 지속될 수 있는 겁니까? 그것은, 참예배자로 서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여기에 집중하십시다. 참예배, 참예배자 이것은 아무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희망을 말하고 싶으십니까? 꿈을 말하고 싶으십니까? 미래를 여는 새싹(萌芽)을 틔우고 싶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참예배자가 되셔야 합니다.

창세기 4장의 증언을 보면, 가인은 農事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동생 아벨은 羊 치는 목자였습니다. 아버지 아담의 家業을 일찍부터 계열 분할해서 맡았던 것 같습니다(아버지는 땅을 갈고, 목축도하는 사람; 가죽 옷). 아들 代에 와서, 두 系列을 완전 분리한 모양입니다. 창세기 4, 3이하 말씀 보시면 이런 증언을 합니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불행하게도, 범죄 후, 참예배자와 거짓 예배자가 나누어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각자의 삶의 자리, 직업, 경제력 다 다릅니다. 그 다른 형편과 처지에서 각각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섭니다.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職業의 貴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직업, 일이 좋은 지 나쁜 지, 優劣을 가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文化命令, Cultural Mandate). 가인이 물려받은 企業, 농업이 나쁜 것 아닙니다. 아벨이 더 나은 企業을 물려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까? 

겨우 지펴놓은 ‘희망의 불씨’를 또 다시 꺼버리는 일이 왜 벌어졌습니까? 거짓 예배자 가인이, 참예배자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한 동안 역사에는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린 채로 흘러갑니다. 참예배자가 또 다시 언제 등장할 지, 難望입니다. 아벨이 죽임을 당하자, 아버지 아담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 ‘셋’을 주십니다. 그 셋은 아들 ‘에노스’를 또 낳습니다. ‘에노스’ 시대가 되자, 드디어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에노스 시대가 오자, 다시 역사의 희망의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한 거지요(창 4, 25-26).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도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 모두 아벨과 같은, 에노스와 같은, 참禮拜者로 서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참禮拜者로 서야, 역사의 희망의 불을 피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가인은 거짓 예배자가 되고, 아벨은 참예배자가 되었습니까? 흔히들 오해합니다. 가인은,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이고, 아벨은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생각이고, 너무나 교리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을 깊이 보셔야 합니다.

다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5대제사에는, 피의 제사(즉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 燔祭, 和睦祭, 贖罪祭, 贖愆祭)도 있지만, 穀食으로 드리는 제사(소제, meals offering)도 있다는 것 아시지요? 또 더 놀라운 것 하나는, 여러분, 속죄제사를 드릴 때(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 동물을 잡아서 그 피와 함께 제사 드립니다(수송아지, 숫염소, 어린 양, 또는 山비둘기, 집비둘기). 그런데, 이런 제물을 드릴 형편이 도저히 안 되는 가난한 사람이, 贖罪祭物을 드려야 할 때, 무엇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고운가루(곡식) 에바 1/10을 제물로 드리라 명령하셨습니다(‘한 에바’는, 약 22L, 약 2.2L 고운가루). 

무슨 말씀입니까? 가인이 피의 제사가 아닌 곡식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가인과 그가 드린 곡식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거짓 예배, 거짓 예배자가 된 데에는, 제물의 種類나 形式보다 더 중요한 다른 本質的인 문제,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형, 가인에 비하면 아벨은, 그저 羊을 잡아서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열납하여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兄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히 11, 4).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의 믿음의 실체가 도대체 어떠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아주신 것입니까? 

여기, 받아주셨다(개역, 열납하셨다)는 말은, (히) ‘샤아(העשׁ)’인데 주의 깊게 바라보셨다,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어떻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다 불살랐다; cf. 레 9, 24 & 왕상 18, 38). 왜,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가 드린 제물, 기름을 열납하셨을까요? 여기에, 우리들이 참예배자로 회복되는 길이 있습니다(그런가 하면 가인과 그의 제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로 샤아’ 쳐다보지도 아니하셨다, 관심조차 가지지 아니하셨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신호등을 건넙니다. 신호체계가 어떻게 작동됩니까? 連動信號로 作動하지요. 여기서, 파란신호등 받아서 출발해서 가면 다음 신호, 그 다음 신호, 혹 그 다음 다음 신호까지, 최소한 파란신호를 받으면서 진행할 수 있게 신호등이 작동합니다. 연동신호로 작동합니다. 마찬가집니다. 내 삶의 방식, 내 생각,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삶의 목적, 우선순위문제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시간이라고 해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도 똑같이 連動作動됩니다. 

예배할 때, 우리가 모양도 갖추고, 형식도 갖추어 드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삶의 연장인 겁니다. 外貌, 形式 때문에 예배가 바뀌는 것 아닙니다. 예배당에 와 있는 ‘그 나’가 누구입니까? 예배당 밖에서 평소에 살던 바로 ‘그 나’입니다. ‘그 나’의 생각, ‘그 나’의 가치관, ‘그 나’의 삶의 우선순위가, 예배시간에도 그대로 연동으로 작동 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또 그들의 제사가, 제사 그 자체만 이었을까요? 그들의 평소의 삶의 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함의 정도 문제가, 그들의 제사행위, 제물 속에 그대로 표출된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가인은 평소에 경건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평소에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제사에서도 그대로 연동으로 작동이 된 것뿐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유전현상이라고 하지요. 유전현상은 왜, 일어납니까? 유전자정보(DNA) 때문입니다. 자식 낳으면, 왜 자식들이 그렇게 부모를 빼닮습니까? 성격까지도, 걸음걸이까지도, 음성까지도, 빼닮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유전자정보 때문입니다. 사람을 형성하는 유전자정보량이, 무려 1,000페이지짜리 책 1,000권에 해당하는 정보량이라고 합니다(DNA 길이 2m, 60억개의 염기쌍).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예물)에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내 인생, 내 삶에 가지고 있는 유전자(DNA)가 ‘예배의 유전자(예배DNA)가 되어, 그것이 그대로 예배시간에 다 표출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섬기며 사는 지? 敬畏하며 사는 者인지? 우리가 드리는 禮拜, 禮物 속에 다 드러납니다. 달리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인생의 삶의 유전자 정보(DNA) 그대로, 예배 시간에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 한 시간이, 그냥 예배 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자체입니다. 내 삶의 유전자확인시간입니다. 친자확인 검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습니다. 열 달 뱃속에 품었다가 낳는 것뿐인데, 어찌 그리 똑같습니까?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그런 것입니다. 적당히 얼렁뚱땅 못 속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갈 6, 7)

여러 해 전, 휴가 때, 어느 교회 1부예배 참석한 적 있습니다. 마침 그날이, 대입수능고사 100일 전이라,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주일예배시간에, 수험생과 학부모를 강단 위에까지 불려 올려서, 기도해주고, 준비한 선물까지 나눠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싫어합니다). 마침,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엄마와 아들이, 수험생, 수험생엄마였던 모양입니다. 

그 두 사람,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강단 위로 올라가서 기도 받고, 선물까지 받아왔습니다. 그 다음 시간이, 봉헌시간이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보지 아니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크게 보셨습니다. 렙돈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돈입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 유통되던 최소단위의 화폐(동전)인데 1/8앗사리온입니다(한 앗사리온? 빵 한 조각 살 수 있는 동전. 빵 1/8조각 살 수 있는 동전/ 빵 1/4조각 값). 

자기 아들, 대학입학을 위해서 기도 받으러 나간 그 엄마가 헌금시간에 드린 헌금이 얼만지 아십니까? 그 자리에서 지갑 열더니,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꺼내서 헌금주머니에 넣더라고요. 물론, 그 아들은 헌금 드리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 엄마, 지갑 옆에, 현대자동차 Key가 놓여져 있었는데, 보아하니 최소한 중형차 이상 되보이는 자동차 Key였습니다. 이건, 신앙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祈福信仰도 못 됩니다. 깍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결혼식이나 상례에 가서, 그 앞에서 지갑 열어서 축의금, 부의금 내는 사람 있습니까? 그건 예의가 아니지요, 큰 실례입니다. 다 집에서 미리 준비해갑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무시하면 못씁니다. 가인은, 곡식 거두어 아무렇게나 제물 삼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자기 양의 첫 새끼(첫 산물, 구별된 제물)와 그 기름(값진 것,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거기에, 있으셨던 겁니다.

예배가, 우리 삶의 희망의 첫 출발입니다. 예배는, 내 인생, 내 삶, 내 우선순위 그대로, 연동으로 작동 되는 내 삶의 유전자정보(DNA)입니다. 참예배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삶의 고백이 있는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시다. 마음을 다하는 예배, 뜻을 다하는 예배, 힘을 다하는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가 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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