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창 1:1)

  • 잡초 잡초
  • 412
  • 0

첨부 1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창 1:1)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인생들의 커다란 의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정확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합니다. 이 말씀을 믿느냐 믿자 않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 판단이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나눔이 있습니다. 영생과 영벌의 나눔이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라는 표어로 한해를 시작하며 이 달은 창조주 하나님게 영광돌리는 달입니다

태초에 창조 하였다고 합니다. 태초란 말은 첫머리 시작 등을 의미 합니다.  창조의 시기인 태초는 영원에서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즉 영원으로부터 시간이 분리되어 나온 시간의 원점 바로 그 순간입니다. 어떤 것의 시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시작 곧 모든 것의 시작을 말 합니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절대적인 시작이요 시간 자체의 시작입니다.

나아가 태초라는 시간 즉 천지가 창조되던 때임을 직접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태초라는 시간의 단위는 하나님의 창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태초는 물질이 영원하지 않고 태초라는 순간 즉 시간과 함께 시작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책에는 저자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써야 합니다. 그림에는 화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그려야 합니다. 건물에는 건축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지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계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계획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설계자, 건축자, 창조자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엘로힘)은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른다(알라흐)는 말에서 온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을 가지신 대 우주의 주인 되시는 엄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어 온 인간이 그 앞에서 떨 수밖에 없는 장엄하신 신이요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는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온 피조물이 그 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다른 어느 것과는 비교 되지 않는 유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옛날 독일에 훌륭한 기독교인 영주가 있었는데 그는 라인 강변의 훌륭한 고성에서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은 지혜와 덕으로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한번은 그가 집에 없는 동안에 한 프랑스 귀족이 손님으로 왔다. 이 손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영주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 무신론자를 그의 성과 영토로 안내하였다. 그는 다른 것들 중에서 몇몇 매우 아름다운 광경들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매우 감탄하였으며, 영주는 '이것들은 모두 내 아들이 설계한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정원은 그의 아들에 의해 고상하고 훌륭하게 설계되고 가꾸어졌으며, 모두 아담하고 단단하게 건축된 마을의 집들도 그의 아들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그 신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난 후 감탄하며 말했다. '당신은 그와 같은 아들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겠소!' '내 아들이 훌륭한지 어떻게 알았소?' '하지만 당신은 내 아들을 본 적이 없지 않소?' '없지요. 하지만 나는 그가 한 일로 그를 판단할 수 있소.'
'마찬가지라오. 나도 하나님을 뵙지 못했으나 그분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보아 그분이 어떤 분이 신지 알 수 있다오.'  
창조의 위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들에 산보를 나가셨다가 발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어 보니 회중 시계였습니다, 그는 시계를 처음 보았습니다. 아주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그의 말은 이것이 어디서 생겨 났을까 가 아니라 이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는 우리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드심에 의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와싱톤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지 아니하자 부모님들 이 그에게 믿도록 하기 위하여 뒷동산에다 와싱톤의 이름을 따라 꽃씨를 뿌리고 꽃이 피어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을 때에 그를 데리고 산에 올라 이곳에 이러한 것이 저절로 생겨났으니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고 하자 와싱톤은 이것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저를 위하여 만드신 것이라고 함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너는 이 작은 일도 그냥 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이 우주는 그냥 되었다고 하느냐고 하자 그때에 자기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한 과학자가 창조의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자 친구 크리스천 과학자가 지하실에다가 천체의 모형을 만들고 우연히 이러한 일이 생겨났다고 하자 그 친구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자 자네는 이 작은 우주는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하면서 장엄한 우주에 대하여는 어찌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느냐고 하자 그 불신 과학자가 믿게 되었다고 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시니  창조가 말씀으로 된 것을 말 합니다.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오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말로서 만족하지 못하는 세계는 인간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고 하나 하나님의 세계는 언행을 나누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바라)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해서 사용하며 무조건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일차적으로는 기존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말슴의 창조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은 하나님의 재료 없는 중에서의 만듦을 의미하게 되고 여기에서 무에서의 창조를 가리키는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기원론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창조하신 재료를 사용 하여 창조하시기도 합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를 사용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니 완전한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선도 악도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바로 쓰면 유익을 줍니다. 곰팡이에서도 페니실린을 끌어내고 삼대에서는 베를 뽑는가 하면 대마초와 같은 해독 물질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좋았더라는 아닙니다. 인간의 범죄 이후에는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으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합니다.

어떤 젊은 자유기고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하여 여러 신문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의 그림을 사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캔사스 시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의 편집자는 그에게서 재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노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작품을 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교회 홍보물에 그림을 그리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 장소로 생쥐가 우글거리는 창고를 빌렸고,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들을 사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에 살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그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리하여 그는 '미키마우스'라고 불리는 만화의 주인공을 창조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월트 디즈니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온 아랍인 청년 무사 알라미는 자기 고국으로 돌아와서 낙토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여리고 계곡으로 갔습니다. 멀리 사해와 모압산지가 보이는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였습니다. 무사 알라미는 이 사막을 파고 지하수를 개발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절대로 이 마른 땅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창조 이후 아직까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모래밭이었지만 창조의 하나님은 여기서도 생명이 살 수 있도록 하셨으리라는 가능성을 믿고 그는 곧 지하수개발에 착수했습니다. 1주일을 파고 열흘을 파 보았으나 여전히 모래뿐이었습니다. 

한달,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났지만 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계속 여섯 달을 팠는데 마침내 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 물줄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물을 끌어 들여서 사막을 옥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그 주위에 거대한 농장을 만들고 농민학교를 세웠다. 수확된 바나나와 오렌지를 비행기에 실어 베이루트, 쿠웨이트로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른 땅에서 기적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재 창조의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스로스츠란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채찍으로 50번씩 여덟 차례나 맞았으나 그의 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찰이나 교도소에서도 그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인연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간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 2분 만에 변화되었습니다.' 

한 세균학 검사실에서 3백여 종류의 우유 견본 검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조수가 교수에게 일이 벅차겠다고 걱정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벅차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평범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더미 같은 일생의 과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다가 부담이 되어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해보면 쉽게 풀리는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끝까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오게 됩니다. 

하루 한 시간씩 집중적으로 성경을 일생 동안 공부하면 신학자가 될 수 있고 하루에 한 사람 전도하면 최대의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거북이처럼 걸어가야 함은 신앙은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자녀도 건강도 그리고 아내도 잃고 친구의 공격을 받았지만 믿음의 행보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면 후 일에 보람을 지닐 수 있습니다. “보라! 난 이겨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 패배, 고난, 슬픔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탕자를 찾고 계십니다. 머리에 과학의 모자를 쓰고 허리에 이성의 칼을 차고 등에는 재물의 배낭을 메고 손에는 쾌락의 지팡이를 짚고 사는 현대의 탕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재창조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하루에 한 발자국만 나아가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돈은 강하다. 왕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마르틴 루터) 

왜 진리가 가장 강하다고 했을까요? 재물, 권력, 인간 모두는 유한하고 가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진리는 불가변성이며, 영원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 철학, 이념, 주의(ism)도 모두 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물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은 끝까지 존재합니다.” 결국 낮은 이 세상의 가변성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변성은 영원성으로 변해야 합니다. 절망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소망의 소중한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불안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평안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여름에 땀흘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허무함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저 세상의 영원함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푯대 삼고 사는 인생과 비진리에 조정당하며 사는 인생의 차이는 큽니다. 낮은 곳의 가변성이 높은 곳의 영원성으로 변해야 된다는 필요성을 어거스틴은 절감했다합니다. 그러나 가변성이 영원성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변성의 세상이 영원성으로 고쳐지길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바로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오염되어 썩어져 가고, 변질되어 악취 나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야 합니다.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이 세상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연을 지배하며 정복하며 살 게 됩니다.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한 나그네가 프랑스 접경 알프스산맥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황량하고 메마른 불모지를 보며 탄식했습니다.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로군.' 그곳은 풀 한포기 없는 죽은 땅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광야에서 등이 굽은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도토리가 가득 담긴 가방에서 도토리를 꺼내 쇠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낸 후 도토리를 심고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노인에게 다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심은 도토리가 싹이 나면 이곳은 아름다운 숲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그네는 노인에게 무모한 일을 그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25년 후, 우연히 그곳을 방문한 나그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새들의 노래와 꽃의 향기가 가득한 축복의 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과 희생이 황무지를 축복의 땅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때 지배하며 다스리며 사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 바로 믿고 함께하는 모두가 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