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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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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무화과 나무 (마 21:18~22)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계실 때 신성과 인성을 겸하여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요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는 다른 분이 아니라 말씀이 곧 육신이 되신 분이심으로 그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시든 그의 신성은 절대로 소멸될 수도 없으시고 변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땅에 계실 동안은 그의 신성과 함께 또한 인성으로서의 인간예수의 속성도 있는 것입니다. 신비스럽게 감추어져 있었던 그의 인성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겪어야 할 모든 육신적인 고통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가실 때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시장하신예수 이것이 오늘 본문의 출발입니다.

 1.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주님은 시장하신 몸으로 길을 거니시다가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시장 끼를 채울 수 있는 열매를 바라시고 나무 가까이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는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1장 13절에는 “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엄격히 따지면 일 년에 열매를 두 번 맺습니다. 먼저는 4월이 되면 갓 겨울을 난 낡은 가지에서 작고 시원치 않은 열매가 맺히고 두 번째는 6월에 싹이 나서 9월에 완숙해지는 무화과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 감람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의 3대 나무이면서 과목입니다. 목재로서 효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크고 탐스런 꽃이 보기 좋게 맺히는 나무도 아닙니다. 
오직 좋은 열매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를 예수님은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하고 저주하신 것입니다. 열매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나무에게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무화과의 때가 아님을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 이제 처할 주님의 고통에 판단이 흐려져서! 
아니면 무화과나무에 대해서는 일반인 보다 모르셔서?

예루살렘에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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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며칠 후 유월절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예루살렘은 제자인 유다의 배신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합작으로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것을 예수님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19절 하반부입니다.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십자가의 사건을 아시는 예수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에 대해, 메시야이신 자기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이는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징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열매 맺을 때도 아닌 무화과나무를 열매 없음에 대한 본보기로 저주를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이미 열매를 맺을 시간이 몇 번이고 지났는데도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없는 우리// 오히려 없어야 할 죄의 열매만 가득한 오늘 우리들 어찌하여야 좋겠습니까?. 우리 중 어느 누구도‘저주’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전 숙정작업은 이스라엘의 그릇 된 예배의 고발이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가 나무에 대한 비유는 즉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전반에 대한 메시야의 상징적 고발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사귀가 나올 즈음에는 이미 그에 상당하는 열매가 맺혀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잎만 무성하고 열배를 맺지 못하는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당시 유대교의 실상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첫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경종입니다. 주님이 찾으신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열매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외식적인 율법의 준수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그들의 메시야를 배격하므로 그들에게 있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외식을 상징하는 잎사귀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하는 경종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로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멸망 받게 될 일에 대하여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마23:37-38).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다시 그 잎이 샘 돋을 때가 있음을 한 비유로 예언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마24:32)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저주하시어 그 뿌리까지 말라버린 길거리의 무화과나무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주님이 열매를 찾으신 무화과나무는 그리스도인을 상징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 열매이십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외관상의 형식은 모두 그럴듯하게 구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알맹이 없는 껍질과 같이 예배나 경건의 본질적 내용을 상실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위선적 신앙을 가진 자들은 실상은 죽었으되 살았다 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딤후 3:5; 계3:1)

  
2.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이 같은 광경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면서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첫째 조건은 믿음의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믿음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생깁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둘째 조건은 의심치 아니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고 의심치아니하면” - 이는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계속적인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스스로와의 싸움이 과거의 단 한 번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셋째 조건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1-22)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통일성이 있으면서도 각권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왕(王)이신 예수님을 그립니다.  마가복음은 섬기는‘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누가 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 누가복음은 인자복음, 요한복음은 독수리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21장 처음부터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 하십니다. 이는 구약 스가랴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2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사건을 통해서 종말이 임박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하는 한편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13절을 읽겠습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면은 그들이 준비한 희생제물은 하나님께서 받고 기도를 이루어 주셨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더 이상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믿음 없이 형식적으로 들여지는 제사/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희생제사의 형식을 갖추지 못할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어 우리와 그분과의 화해와 연합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는 결코 우리스스로가 실지로는 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 하나님의 뜻의 분별 및 순종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으로부터의 신뢰로 맺어진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의 승리를 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감당치 못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온전한 것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받아야만 구원에 이르는 우리/ 그러나 모습은 마치 율법의 형식만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저주가 임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열매 없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올라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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