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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들의 기적 (요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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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의 기적 (요 6:1~13)


I. 막다른 골목은 없다 

중세사람들은 포르투칼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포르투칼의 수도가 되어 있습니다마는 한때 스페인령에 속해 있던 리스본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항구도시의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이 바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이다. 이 너머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1492년 한 사람이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오르면서 함께 한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 너머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다.” 그가 바로 탐험가 <콜롬부스>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여정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절망과 좌절을 거부하고 희망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의 세계를 봅니다. 가능의 세계를 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빈들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기적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신년 첫 주일 설교 제목이 「빈들의 기적」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때로 좌절합니까? 문제 상황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문제를 만나지요. 지금도 우리 곁에 많은 사람들이 한편 걱정하고 한편 절망하고 있습니다. 정치도 사회도 불안하고 교육도 경제도 어렵고 미래도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모두 빈 들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때에 희망을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게 생겼다고 말할 때 오히려 기적을 꿈꿉니다. 

어떤 시골 청년이 서울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하자 그의 친구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서울은 물 한병도 사서 마신데. 잘 생각해.” 그때 이 청년이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거봐, 물 한 병만 팔아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지혜자가 길을 가는데 한 젊은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젊은이 왜 우시우?” “제가 이곳에서 넘어졌는데, 팻말을 보니 여기서 한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산다잖아요.” 지혜자가 다시 말합니다. “이보게 젊은이 그럼 3천번쯤 넘어지시구려.” 그가 삼천갑자 동방석입니다. 언제나 죽는 길이 있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II. 기적을 방해하는 요소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이적 중 그 네 번째 기록된 소위 오병이어의 이적입니다. 이 표적은 빈 들에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빈 들 기적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이라고 하는 제자가 나옵니다. 허기진 수천 수만의 군중을 보시고 주님께서 빌립에게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없겠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빌립은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만 먹게 하려해도 이백 데나리온이 더 들 겁니다.” 재빠르게 계산 해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계산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군중을 보았습니다. 어려움만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빌립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주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죽은자를 살리셨나이다. 주님만이 능히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음을 믿나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명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나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에 부딪칠때마다 우리의 부족한 자원만 바라보고 어려운 처지만 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보지말고 문제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5절에서 주님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물으신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믿음 테스트였습니다. 이어진 6절에 보면 분명히 이것은 “시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테스트에 대한 빌립의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컴퓨터처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답을 내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합리적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머리로 주판알 굴리기만 하는 사람이 많으면 능력있는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7절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여기 데나리온은 근로자 일당 정도 였으니까 2-300만원 월급쟁이면 한 십만원쯤이 됩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면 2천만원 정도 되나요? 결론 - 불가능이라는 거지요. 이것이 이성의 법칙, 세상의 법칙입니다. 이 땅엔 이성의 법칙이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믿음의 법칙이 있습니다. 

언제나 빌립같은 사람이 쓰는 단어는 “조금씩” “부족하다” “불가능하다” 뿐입니다. 

교회안에 빌립같은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어느 화가가 무서운 풍랑을 만난 배 한 척을 그렸습니다. 풍랑은 금방이라도 배와 선객들을 삼킬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두려워 떨기는 커녕 모두 여유 있고,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키를 잡고 항해하는 선장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풍랑의 높이를 계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 지금 곧 예수를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분은 지금 당신을 도와주시고자 합니다. 눈의 초점을 달리 하십시요. 당신의 인생의 핸들을 붙들고 계신 예수님을 보십시요. 문제를 바라보던 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야맹증에 걸린 사람은 눈의 초점이 흐려져서 밤에 길을 걸을 때 자꾸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시궁창에 빠지기도 하고 전봇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초점을 제대로 잘 맞추어야 합니다. 공중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는 앞만 바라보고 그 줄을 똑바로 걸어야지 술렁이는 군중들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면 줄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망과 어두움을 보는 인생살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과 소망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부정적인 안경을 벗어 던지고 긍정적인 안경을 끼고 사는 것 -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부정적인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무런 신앙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예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빈 들에서도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III. 빈 들에서 기적을 낳는 요소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도시락 하나로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5천배의 기적을 낳기까지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빈 들 표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리고 그것을 바친 어린 소년의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 보리떡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 개떡이라는게 있었습니다. 돼지에게 주는 쌀겨나 보릿겨를 부드럽게 빻아서 만든 살겨떡입니다. 이 겨떡이 개떡이 된 겁니다. 여기서 보리떡은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에게 간식으로도 주고 나귀에게도 먹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여기 물고기라고 번역된 “옵사리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다가 큰 고기가 잡히면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오지만 작은 고기는 다시 물 속에 넣어주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성경법에 따라 작은 고기는 다시 물 속에 넣어 살려줍니다. 그런데 가져오기는 너무 작고 그렇다고 다시 물 속에 넣을 필요는 없는 어중간한 크기의 고기가 있단 말입니다. 낚시꾼들은 이런 고기를 바닥에 던져둡니다. 그러면 고아나 과부 -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바닷가에 나가 주워다가 소금에 절여 자기들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이처럼 소금에 절인 조기새끼 같은 물고기가 옵사리온 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개떡 다섯 개와 절인 물고기 두 마리가 바쳐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 끼 도시락 식사입니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은 5천배가 아니라 만배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남자 장정만 5천명이었으니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1만명은 넉넉히 되지 않았겠어요? 

이 기적은 어린 소년의 작은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기적의 씨앗을 요구하십니다. 빈 들 표적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 소년이 예수님께 드린 이 개떡과 초라한 물고기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헌신이 5천배의 이적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언제나 기적은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 위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이적은 믿음의 그릇만큼 일어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빈 들 표적을 위한 필수적 요소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도 빈 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씨앗이 있습니다. 개떡이나 물고기와 같이 아주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도시락이 있습니다. 사실 이 도시락 하나가 5천명의 군중을 위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선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주의 손에 바쳐질 때 거기서 5천배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치기를 꺼려함으로 말미암아 허실되고 마는 재능과 은사와 달란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노래하는 재능, 가르치는 재능, 봉사하는 재능, 전도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섬기고 접대하는 은사, 긍휼이 여기는 은사, 치유의 은사, 지혜와 지식의 은사, 이웃을 세워주고 위로하는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내가 숨겨두고 움켜쥐고 있으면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 위해 바치면 기적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 물질, 지식, 시간 무엇인가를 기쁜 마음으로 바치기만 하면 주의 손에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린 소년은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초라하다고 위축되지 않았고, 아깝다고 인색하지도 않았고 그가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보기에는 너무 작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잡힐 때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릴 때 골리앗 장수를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는 삼백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십만의 미디안 군사를 격퇴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삼손의 손에 들려진 나귀턱뼈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 일천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내 손에 있을 때는 비록 작은 것이나 그리스도의 손에서는 큰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것은 대단히 가치 있고 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 - 예수 손에 붙잡힐 때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소년의 도시락 하나 + 예수님 = 5천명의 식사, 나 + 하나님 = 문제해결의 기적입니다. 이 시간 당신의 필요는 굉장한데 당신의 자원은 보잘 것이 없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는 항상 풍부한 자원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 편에 서십시오. 그분께 당신이 가진 기적의 씨앗을 바치십시요.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십시요. 하나님이 그 문제를 움켜쥐고 엘 샤다이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 주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저는 저 자신을 바라볼 때 배경도, 환경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보리떡이요 옵사리온 물고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없이 못났지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저 자신을 100% 드렸습니다. 이런 보리떡같은 저를 사용하셔서 한소망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최근엔 우리교회에 주신 비전과 가치를 위해 다시 한번 옵사리온 같은 저 자신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교회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주님의 심장속에 있던 바로 그 교회 말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비전과  가치에 자신의 꿈과 은사, 생명과 자원을 바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비전에 자신의 비전을 담고 생명을 드리겠다 결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개떡같고 물고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셔서 한국교회를 살리고 이 민족과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바로 그 교회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사실 당시 상황의 눈으로 보면 어린아이가 도시락 하나, 이게 간단한게 아닙니다. 이 어린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그러나 이 아이가 도시락을 바쳤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겁니다. 도시락은 이 아이가 가진 모든 재산입니다. 이 당시는 요즘같은 도시락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공산주의가 시작될 때 빵 한 조각을 얻어먹기 위해 정조를 팔았습니다. 도시락 하나를 얻기 위해서 지금 목숨을 걸고 대동강물을 건너고 있습니다. 

아마 천국에서 이 아이가 가장 속상한게 이걸 거예요. 목사들이 설교할 때마다 보잘 것 없는 도시락 하나를 어린아이가 바쳤다고 합니다. 야 니 같으면 도시락 하나 바치겠냐. 내가 허기진 배를 내가 참고 주님 앞에 나는 안 먹어도 주님은 드셔야 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빈들에 쓰러지더라도 주님만은 이 도시락을 드셔야 또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이라구. 그처럼 쉽게 내 헌신을 묵사발 낼 수 있겠니? 나의 소중한 헌신을 그렇게 짓밟아도 되는 것이야. 천국에서 이 아이가 몹시도 서운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도시락 하나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 앞에 드리는 그 정성을 가지고 여러분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짤라 보셨습니까? 나는 배가 고프고 나는 쓰러져도 좋다. 나의 주님에게는 이것을 드려야겠다. 나는 실패해도 좋다. 나는 망해도 좋다. 주님에게는 이것을 드려야겠다. 이 정성이 빈들을 풍성한 식탁으로 넘치게 했던 것입니다. 

빈들 광야기적은 씨앗은 바로 이런 어린아이 같은 결단과 헌신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헌신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겠지만 이 아이에게 도시락을 준비하는 한 여인의 따뜻한 정성입니다. 아이에게 도시락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지혜가 있었고 어머니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지만 우리가 문자로 읽는 이 성경 저 배후에는 빵을 굽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고기를 굽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이를 축복해서 “너 예수님 따라가야 된다. 예수님 말씀 놓치면 안된다.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기억해야 된다. 네 인생의 주님을 만나고 와야 된다. 네 구세주를 만나야 한다. 그 분이 기적을 행할 때에 너의 삶 속에 그 분을 만나게 되면 네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놓치면 안된다” 도시락 들려 주께로 보내는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어머니의 마음이 오늘 이 기적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도시락을 싸주는 어머니의 정성, 그 아이를 향한 축복의 마음이 있었길래 오늘 본문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이적의 통로가 되었던 안드레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빌립과는 달랐습니다. 주어진 문제를 자기 이성으로 풀어본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예수께로 가져왔습니다. 도시락 하나 가진 소년을 예수께로 인도했습니다. 

안드레는 인도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나중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는 베드로를 예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 찾아온 헬라인들을 예수께로 인도했던 제자가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문제가 있을때마다 예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제자였습니다. 바로 거기에 만사가 해결되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539장 1절) 

셋째, 빈 들 기적은 감사로 이루어진 이적이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자연스럽고도 태연한 식사 감사기도를 의미합니다. 즉 개떡 다섯 개를 놓고도 마치 5천명의 식사가 태산처럼 쌓여있는 것처럼 감사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5천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감사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당장 전세금 수천만원이 필요한데 단돈 십만원을 손에 들고 감사하라고 한다면 여러분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5천배의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이 감사는 감사가불 혹은 선불감사입니다. 이는 베풀어 주셨던 축복만을 감사하거나 도움의 통장을 손에 쥐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베풀어주실 축복을 영상으로 그리면서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믿음으로 미래의 것을 미리 잡아당겨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것은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하지만 주님은 얼마 후에 5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것을 벌써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소낙비를 보았습니다. 

보십시요.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실고 와서 “조금씩만 먹게 한다 할지라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인간의 계산으로, 인간의 자원만으로 살다보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타령이나 하고 “부족하다”만 노래하다 끝이 납니다. 

그러나 11절 12절을 보십시요.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원대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씩 주는 것과 원대로 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가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니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빌립의 방법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방법은 언제나 넉넉하고 남습니다. “원대로 주라. 배부르게 먹으라. 그리고도 남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 당신이 만든 답을 가지고 나오려고 하지 마십시요. 있는 것 -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십시요. 주님이 해결하십니다. 

2010년엔 한소망교회가 꿈땅 비전채플에 입당을 하게 됩니다. 빈손 들고 누구 한 사람, 어느 교회의 한푼 도움도 없이 「한국의 소망이 되자,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꿈이 큰 사람들 모이라」 한소망 - 이라는 교회 이름 하나 붙들고 교회를 시작한지 18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 남의 유치원, 학원, 공장을 주일만 모일 수 있도록 빌려 달라 애원하며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남의 유치원을 빌려 시작된 교회가 오늘의 한소망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개척지는 일산이다.」 그래서 능곡 벌판에 새로 세워지는 빌딩 지하실 한 켠을 계약금도 제대로 없이 덜렁 계약을 했습니다. 돈이 준비되었느냐? 묻는 빌딩주인에게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말입니다. 그 열악한 공간에 사람들이 터질 듯이 모였고 우리는 뒤늦게 일산 신도시 상가빌딩을 구입했습니다.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지어 주겠다던 어느 목사님의 호의도 마다하고 교인들은 우리의 눈물과 희생, 헌신과 피로 개척교회 일궈보자 다짐을 했습니다. 이때 교인들의 표어가 있었습니다. “우리 몸엔 예수의 흔적을 우리 아파트엔 한소망의 흔적을” 그래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며 전도했고 앞다투어 아파트를 담보로 내어놓았습니다. 

상가 예배당 빚을 갚기도 전에 예배당에 입추의 여지없이 1부 2부 3부 예배에 교인들이 넘쳐나 우리는 지금의 예배당 땅을 구입하고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건축 완공 보름 후에 IMF가 터졌고 우리는 30억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이때 온 교인들은 무슨 믿음, 무슨 배짱인지 어느 누구 하나 잘못될까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들 감사만 했습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이 기간 - 우리교회는 가장 급성장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교회는 중대형교회로 성장하며 21C에 들어섰습니다. 주님은 우리교회에 불신자 전도로 부흥하는 교회 모델을 만들라 알파코스를 주셨고, 셀교회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비전이 이루어지고 이 비전을 통해 한국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열방을 살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한소망 비전채플」을 세울 꿈땅 1만평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조용한 산자락을 구입했는데 꿈땅을 구입한지 채 1년이 안되어 우리 꿈땅을 중심으로 파주 신도시와 고양, 덕이 지역 아파트 숲이 들어선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구산동 지역에 분당급 신도시가 다시 들어선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큰 교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 신약성경에 있는 바로 그 교회를 원하는데 주님께서 아마 크게 쓰실 모양입니다. 꿈에나 그리던 땅에 한소망 가족이 함께 꿈꿀 수 있는 비전채플이 세워졌습니다. 

IV. 빈 들에서 일어난 기적 

한소망교회가 개척된 1991년부터 지난 18년간은 한국교회가 참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개척이 활발하기는 커녕 개척된 교회들이 문을 닫고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개척된 1990년대 초엔 한국교회가 전도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① 사탄이 종말론을 이용 - 종말의식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② 매스콤은 앞을 다투어 “십자가가 너무 많다. 교회가 너무 많다.” 떠들어 전도의 동기를 빼앗아가고 있었습니다. 
③ 천만성도 운운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④ 1만불, 2만불 국민소득 운운하며 교회안에서는 영적인 관심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었습니다. 
⑤ 성장된 한국교회는 이 사회 비판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분위기가 지난 18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보십시요. 한소망교회는 이런 영적 빈 들에 세워졌습니다. 오늘의 한소망교회는 분명 빈 들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두 기적의 현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은 모두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적과 기사, 표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으십시요. 여러분에겐 기적의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결코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요. 표적을 꿈꾸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지금까지 꿈도꾸지 못했던 이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광스런 사역자로 쓰임 받는 꿈을 꾸십시오. 여러분의 기업과 가정이 복을 받고 세계 만방에 뛰어나가는 꿈을 꾸십시요. 내 아들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꿈을 꾸십시요. 내 딸들이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쓰임받는 그날을 꿈꾸십시요. 

지금 상황이 빈 들이라고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문제를 보고 서 있지 마십시요.  빈 들에서 이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보십시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요. 이 빈 들 표적의 주인공이 되십시요.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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