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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여러분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행 20: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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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행 20:22~38)


2010년 한해 할렐루야 찬양대 찬양처럼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2010년이 놀라운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해마다 새해 첫 주일은 임원 임명주일입니다. 
형제 교회에 파송된 선교사 24명에게도 임명장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 태국으로 선교사로 나갈 조미옥목사님, 김창겸장로님, 전성환권사님이 파송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해마다 첫 주일에 임원 임명을 하는 것이 여러분 마음에 감격이 되셨습니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할 때 ‘내가 집사인가? 나도 일어나야 돼?’아마 어떤 분들 중에는 잠깐 짜증스러운 느낌이 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이런 형식적인 것은 좀 없으면 좋겠어. 그냥 임명했다고 그러면 되지.’이런 분도 있으리라고 싶습니다. 일어날까 말까? 그것도 부담스럽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도 좀 귀찮기도 하고.‘ 이런 마음이 드시는 분들도 틀림없이 있으실 것입니다.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임명하는 시간에 감격스럽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느껴보지 못하고 그저 늘 해마다 첫 주일에 하는 형식적인 임명식이라고 생각하고 임원 임명을 받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명자입니다. 
여러분, 사명없이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영광을 받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임명식을 해보면 약간은 귀찮아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든 안 일어서든 별 상관이 없어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만약에 대통령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직임을 주셨다면 아마 절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일이 힘들어서.” 이런 말은 입에서도 안 나올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회사에서 승진했다면 그래서 좀더 무거운 직책을 받았다면 아마 그 일로 인해서 여러분은 축하도 받고 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일은 더 많이 하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대해서는 왜 그만큼 생각이 안 가는 것일까요? 

오늘은 사명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본문의 말씀도 맞추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쁘고 감사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부담스러운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명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에 대한 이런 자세가 아름답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만약에 어떤 사명 앞에서 임명을 받는다고 해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그 일로 인해서 감격하고 가슴이 뜨겁고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까요? 생명을 바쳐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송구영신 집회 때, 유정옥사모님 박보영목사님의 짧은 간증과 말씀을 듣고 많은 성도들이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으로 사는 성도의 삶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모두에게 사도 바울처럼 내게 주신 사명을 위하여 나는 내 생명 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여러분이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순교도 마다하지 않을 이 사명감, 오늘 이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오늘 사명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고 사명의 복을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교회를 위한 사명을 맡기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실은 에베소에 가서 장로들을 만나고도 싶었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도무지 에베소에는 가지 못하고 밀레도 항구로 나오라고 해서 거기서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걸음이 상당히 바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바쁩니까? 
사정을 알고 나면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22-23절에 보니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예루살렘에 빨리 가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왜 그리 서둘러 가는 것입니까? 아니 서두를 일이 따로 있지 지금 환란 당한다는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는 것입니까?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에베소에 들러 볼일을 보고 갈만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심정으로 충분히 그럴 것 같은데 환란을 당한다는 예루살렘에 빨리 가려고 그렇게 만나보고 싶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에서라도 만나자고 불러내는 사도 바울의 심정, 이것이 사명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자신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성령께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명자는 환란이 있다 하더라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명자는 좋은 일에만 순종하는 자가 아닙니다. 환란이라 해도 순종하는 자가 사명자입니다. 순종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이삭을 내게 잡아 바치라고 할 때 언제 바치라고 안했습니다. 한 달 뒤에 1년 내에...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아니 일찍 일어날 일이 따로 있지, 아들 잡아서 하나님께 바쳐야 되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데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일찍 일어납니까? 사명자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사명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지만,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도 사명을 맡기고 가야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 몇을 세워서 에베소 교회를 담당하라고 맡겼습니다.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이제 결박 당해서 에베소에 다시 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장로님들에게 완전히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 임명식을 하려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부른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교회에서 직분을 맡거나 봉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사코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집사로 세우면 다른 교회 가겠다고 협박하는 분도 있습니다.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든데 가정 일도 힘든데 교회 일은 끔찍하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직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명이 힘들다고만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축복인 것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일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일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말라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정말 저주같은 것입니다.
아이 낳아 기르는 것도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저주입니다. 아이 낳아 기르는 것은 힘들지만 축복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많은 학생이 “공부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테니 공부해라.” 하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합니다. 공부가 힘들어도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힘들다고 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축복이 많습니다. 사명은 더 그렇습니다.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회, 엄청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맡겨준 일을 소홀히 하면 큰 일 납니다. 교회가 맡겨준 사명을 소홀히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후회되고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이라고 했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 주님께서 주신 직분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 일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대통령이 준 직책, 회사 사장이 준 직책, 힘들다고 바쁘다고 거절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은 왜 소홀히 여깁니까? 힘들지 모르지만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다. 사명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은 신앙적으로는 아직 철이 없고 어리기 때문입니다. 사명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 하나님이 주신 모든 힘을 다 엉뚱한데 써버리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순간이 두려운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헬스장마다 몸짱 만들기 열풍입니다. 그분들 정성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가서 뭐라고 할 것입니까? “뭐하다 왔니?” “몸 만들다가 왔습니다.” “그래, 한번 보자.” “땅에 묻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됩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된 사명, 믿음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복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귀한 줄 알면서도 그 사명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이도 있습니다.
사명은 너무 귀한데, 잘 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겸손한 분, 책임감이 강한 분인데 사명 앞에서 주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데 나같은 사람은 감당을 못합니다. 나는 부족해서 도무지 그것 감당을 못합니다. ”“이왕 하려면 잘해야 되는데 내가 가정 일도 직장 일도 교회 일까지 나는 잘할 자신이 없습니다.”이런 분들 중에는 그 동안에 교회 생활하면서 직분 있다고 하는 분들을 통해서 실망하고 그런 분들 때문에 교회가 오히려 어지러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상처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 같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못하면 못하는 것이지 괜히 하겠다고 명예욕에 사로잡히는 것 저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는 못하겠습니다. ” 이렇게 주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겸손할지 모르고 책임감이 강할지 몰라도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 사명을 도대체 무슨 힘으로 감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하는 줄 아니까 “나는 부족해요.” “나는 자격이 없어요.” “나는 할 수 있는 여건이 못돼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위하여 교회 장로를 세우신 것이 얼핏보면 아주 무책임해 보입니다. 신학교도 없었고 성경책 조차 없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이단은 너무나 많던 때입니다. 

29~30절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3년 정도 말씀을 가르치고 어떻게 교회를 맡기고 떠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계속 함께 있으면서 장로도 세우고 집사도 세우면 이해가 되지만, 그 장로들이 어떻게 교회를 지키고 제자 삼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학교라도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당시에 신학교가 있었습니까? 또 성경책이라도 있었으면 성경책이라도 보면서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분별하겠는데 당시에 성경책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몇 장로로 세워서 책임을 맡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맡기는 사도 바울도, 그렇다고 해서 장로로 책임을 맡은 그 사람들도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사도 바울은 다 알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사명을 맡길 때, 울었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헤어지는 석별의 정이 아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맡은 사명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맡는 그들이 또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무책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정말 믿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늘 함께 하실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도 예수님은 에베소를 떠나지 않으시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늘 함께 계시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 교회장로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3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절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그 장로들을 보고 사명을 맡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거나 여건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명 맡은 자의 조건은 능력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오히려 곤란합니다. 우리가 무능해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유능해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가족을 만나 왜 우리 교회에 오셨느냐고 물으면 상당히 많은 분들이 목사님의 설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그 말이 기쁨이었습니다. ‘내가 설교를 잘하는가 보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지.’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가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정말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들이 정말 들어야 될 음성이 있다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음성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 좋겠는데, 나중에 목사가 예수님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해버리게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담임하시던 김동호 목사님께서 한번은 교회 건물을 구입하려고 약 30억 원 정도의 은행 대출을 받으려 하였는데, 당시 교회의 교세를 생각하면 은행이 서로 대출해주려 할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답니다. 은행이 대출을 거절한 이유는 높은 뜻 숭의교회가 김동호 목사라는 한 사람의 인간적인 영향력 때문에 성장한 교회이기에 그 한 사람만 잘못되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는 교회라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높은 뜻 숭의교회로부터 김동호라는 사람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을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안식년을 떠났습니다. 안식년을 시작한 바로 다음 주일 교인이 약 천 명이 줄었답니다. 작년에 교회는 넷으로 분립을 하였습니다. 올해부터는 한 달에 석 주일은 담임 목사가 공석인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처럼 하는 것이 완전한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 동기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인데, 교인들의 눈에 담임 목사만 보이지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큰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김동호 목사님은 큰 교회의 담임 목사 지위를 포기하면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답을 얻었습니다.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명 감당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무엇을 믿고 당신의 피로 값준 교회를 맡기셨을까요?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길래 이 거룩한 교회의 임원이 될 수 있을까요? 선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능력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니까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것과 말씀으로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만이 누리는 복입니다.

찰스스펄젼 목사님께서 영국에서 목회하실 때, 미국 목사님들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직접 들어 보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그들은 조 파커(Joseph Parker)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City Temple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약 2천 여명이 모인 가운데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파커목사님의 설교는 감동적인 명설교였습니다.  예배당을 떠나면서 미국 목사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셉파커 목사님은 정말 위대한 설교가야!" 하면서 칭찬했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찰스스펄젼이 목회하는 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교회의 건물은 City Temple 교회보다 훨씬 더 컸으며 교인 수도 두 배 정도 많았습니다. 또한 소문에 듣던 대로 스펄젼의 목소리와 웅변술은 그들이 일찍 들었던 것 중에는 단연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목사님들은 곧 교회 건물이나 교인 숫자, 목사님의 목소리, 제스추어, 웅변술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펄젼 목사님을 파커목사님과 비교하려는 생각조차도 다 잊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났을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딱 한마디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위대한 구주이셔!" 
이 글을 읽고 제가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제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밤낮 울면서 말씀 가르치는 제자훈련에 전념하였습니다.
31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느라 매일 울면서 가르쳤을까요? 사도 바울의 사람이 되게 하려고 그리했을까요? 목회자가 받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의도는 사도 바울이 떠나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더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보다 예수님을 바라볼 제자들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과 온전히 교제하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세우는 일이 사도 바울의 간절한 목적이었습니다. 밤낮 울면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맡든 사명을 맡기든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 교회 일을 맡기셨을까?
주님이 친히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칠 때, 삶으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18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려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돈 문제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돈 문제가 가장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3-35절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교회 사명 감당하려는 사람은 돈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돈 문제로 실족하고 넘어졌습니다. 교인들도 교회나 교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베풀지언정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다 채워주시고 갚아주십니다. 

성도들을 절대로 비즈니스에 관여시키지 마십시오. 무슨 일 투자하면 돈 더 많이 벌겠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마십시오. 마귀가 반드시 그 일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한 사람도 나중에는 반드시 그 일로 시험들게 되어있습니다. 돈 문제가 하나님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세상입니다. 마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사는 자세를 가지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 중에 무서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람의 말이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또 무슨 말을 들을까 그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봉사하고 섬길 때 절대로 비판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부족해 보이면 주님께서 그를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 이상은 정말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싶어서 봉사하는데“교회에 온 지 얼마 되었다고 설치고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누가 일하고 싶겠습니까?“나이 먹은 사람이 앞에 서니까 보기에 안좋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사랑하기에 드리는 말씀인데”정말 그렇습니까? 그 말을 듣고 피를 토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다시는 봉사하고 싶겠습니까? ‘정말 주님이시라면 그랬을까? 내가 그 말을 들으면 어떨까?’ 정말 생각하고 생각하면 아마 주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실 것입니다. 기도만 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여서 말해 준다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상처주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혹시 사람들이 비판을 해도 무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 말 무서워서 나 이제 봉사 안하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은 오직 하나님이 평가하십니다. 사람들의 비판이 무서워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가서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나는 너에게 사명을 주었는데 너는 어째 아무 일도 안했느냐?’‘사람 말이 무서워서 그랬어요. 하도 말이 많은데 하나님도 아실 거 아니에요?’하나님이‘그래 이해가 된다.’그러실까요? 사람들이 말이 무서워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실 것입니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심판, 어느 쪽이 더 무섭습니까? 하나님 일 감당하지 않은 것이 훨씬 무섭습니다. 

여러분, 사람 말을 들었을 때 옳은 말을 하시는구나. 그러면 듣고 회개하고 바로 서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분이 나를 잘 몰라서 그러시는구나.’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시니까.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얼마나 칭찬받을까? ‘너는 말도 안되는 말을 듣고도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충성을 했느냐!’오히려 다른 사람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그게 상급인 것입니다. 왜 사람 말이 무서워서 일을 안해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데. 

성도 여러분, 사명의 복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주의 일을 소홀히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일을 귀하게 여기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과감하게 교회 사역에 참여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주님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010년은 먹고 살기 위하여 살지 말고, 자기 성공을 위하여 살지도 말고,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유가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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