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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회헌신예배]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사람들 (빌 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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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사람들 (빌 1:19~26)

   
오늘 당회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에 나타난 당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조직교회와 미조직교회가 있습니다.  헌법 제2장 제9조에 보면 ‘지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항에 “당회가 있는 교회를 조직교회라 하고 당회가 없는 교회를 미조직교회라 한다.”고 했습니다.   헌법 제10장이 당회에 관한 법률입니다.  당회는 지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 부목사, 장로 2인 이상으로 조직하되 당회조직은 세례교인 30인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목사는 담임목사를 말합니다.  담임목사와 장로2인 이상이어야 하고, 세례교인이 30명 이상이 있어야 당회가 있는 조직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장로는 세례교인 30명 당 1명을 선출할 수 있으나, 최초에 장로를 세울 때에는 세례교인 30명이 있으면 2명을 선출할 수 있습니다.   장로 2명이 있어야, 목사와 2명의 장로로 당회를 구성하고 조직교회로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당회는 부실해지면 폐 당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당회를 조직한 후에 시무장로가 1인도 없으면 폐당회가 됩니다.  장로 2인이 미달되거나, 세례교인이 30인 미달이 되는데, 4년 이상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당회가 폐지될 수 있습니다.   4년 이내에 세례교인이 늘어나서 30명 이상이 되어야 하고, 2명 이상의 장로를 세워야 폐 당회를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68조는 당회의 직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1)  당회는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통찰하며 세례, 입교할 자를 문답하며 세례식과 성찬식을 관장한다.  
2)  당회는 교인의 이명, 세례, 입교, 유아세례 증서를 교부하며 접수한다. 이명증서를 접수한 때는 즉시 발송한 당회에 접수 통지를 해야 한다.  
3) 당회는 예배를 주관하고 소속 기관과 단체를 감독하고 신령적 유익을 도모한다.  
4) 당회는 장로, 집사, 권사를 임직한다.  
5) 당회는 각종 헌금을 수집할 방안을 협의하여 실시케 하며 재정을 감독한다.  
6) 당회는 노회에 파송할 총대 장로를 선정하고 교회 상황을 보고하며 청원건을 제출한다.  
7) 당회는 범죄한 자를 소환 심문하고 증인의 증언을 청취하며 범죄한 증거가 명백할 때는 권징한다.  
8) 당회는 지교회의 토지, 가옥 등 부동산을 관리한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몇 가지 분야에서 목회자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의 가장 큰 분야는 설교자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사는 예배를 인도하는 강단에서 보람을 느끼는 법입니다.  한 시간 예배를 인도하려면 그 전에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하여 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특별히 설교 준비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담임목사로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두 분 부목사님들의 협력을 받아 준비하지만, 담임목사로서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연말이 되니 여러 예배가 많습니다.  성탄절 새벽촛불예배, 성탄절 낮예배, 항존직원 은퇴예배, 송구영신예배, 신년성찬예배가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순서를 짜고, 기도문을 만들고, 순서 담당자를 확정하고, 예배의 시간을 조절하고 확정해야 합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예배를 드려도 맡은 순서자가 오지 않는다든지, 한 사람이 시간을 많이 사용한다든지, 때로는 방송의 차질이라든지, 실내 분위가 잡히지 않아 예배가 흐트러지고 은혜가 떨어질 때면, 속이 타들어갑니다.  여러 교우님들은 때로는 그러려니 하고 참고 넘어가시지만, 담임목사는 속이 탑니다.  

그래도 목사는 강단을 통하여 말씀을 준비할 때보다,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 성도님들이 결단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피곤을 다 떨쳐버리고 다시 다음 주일예배를 준비하게 됩니다.  주일 중보기도 하시는 분들이 뜨겁게 기도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새힘이 솟아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오늘 말씀 사역에 힘을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나와 같이 부족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를 가장 소중한 자리에서 사용해주신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가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목사는 교인 가정을 돌아보는 심방을 통해서 보람과 감격을 느낍니다. 심방사역이라는 시간도 많이 소모되고, 체력도 소모되고, 때로는 고된 사역이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을 마주대하고 앉아 가정의 문제를 듣고, 개인의 신앙적인 고민을 들으면서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상담할 때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귀한 일에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럽고, 우리 성도님들의 상한 심령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에는 하루에 20집을 심방한 적도 많았는데, 담임목사로서는 하루에 5-6집을 심방하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심방사역보다는 설교사역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각종 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으로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 중의 당회가 가장 중요한 회의입니다.  목사가 설교자로서 보람을 느끼든지, 심방 사역으로 성도들을 영혼을 돌아보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당회하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하면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당회나 제직회를 진행하면서 무슨 보람을 느낀다고 하느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당회나 제직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그 날의 분위기에 따라 경색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법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 있어 당회가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지만, 저에게는 당회하면서, 제직회 하면서 어려운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제자훈련이 있은 다음, 우리 장로님들이 제자훈련으로 변화된 이후에는 당회 운영에 어려움이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목사의 좋은 협력자요, 각 분야에서 열정으로 헌신봉사하시는 분들입니다. 다 실력이 있고, 재력도 있으시고, 가정적으로도 다 본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현재 시무하시는 장로님들이 위로는 원로, 은퇴하신 장로님들을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려고 하며, 중요한 일들은 함께 의논하며, 선임장로님들을 존경하고 잘 모시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1천회 당회를 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였는지, 담임목사가 아닌 사람들은 그 감사한 마음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목사가 기뻐하고, 장로님들이 기뻐하였다고 하면 우리 하나님도 매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좋은 협력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독단적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함께 의논하고 좋은 안건이 있다면 당회에 내어놓아서 더 좋은 의견을 도출하고, 모든 당회원들이 알고 협력하는 가운데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와 심방, 각종 회의 운영은 곧 목회입니다.  목회의 가장 큰 두 기둥이 있다고 하면 설교와 행정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열심을 내면, 여러분도 열심을 내고, 목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면 여러분도 함께 성령 충만을 사모하게 되고, 목사가 읽는 책들을 여러분도 간접적으로 알게 됩니다.   나는 목사님이 없어도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고 하실지 모르나, 그것은 아닙니다.    이런 관계와 사실을 조금 더 확대하면, 우리는 사도 바울을 외면하고 신앙생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사도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큰 것을 봅니다.  신앙의 대상은 우리 주님이지만, 신앙생활의 방법과 태도는 사도바울로부터 아주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바울을 지지하고 좋아하는 성도들도 많았지만, 유대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이들은 바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 출신으로 예루살렘 교회 출신들은 야고보의 영향을 받아 율법주의 기독교를 정통교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람이란 그의 사는 목적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세운 목적만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귀한 목적을 세운 사람은 존귀한 사람을 살고, 천박한 목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하면 천박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 그는 아무런 가치도 없은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1:15-16절에서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전파를 위하여 태어났다고 확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살아갈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경로를 통하든지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들이 돌아오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빌1:12에서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내가 당한 일이”란 감옥에 갇힌 일이요, 자유스럽지 못하게 되었고, 복음전파가 막힌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그 일이 복음전파에는 진전이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면서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전파하게 되었고, 황제에게 나아가서 기독교가 사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총이 있음을 증거하여 이방 세계에 좀 더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도바울을 싫어하거나 경계하는 이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우리가 나설 차례라고 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하니, 그것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빌1:15에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존경하는 이들은 우리가 또 하나의 사도바울이 되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나섰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바울을 업신여기면서 전도에 열을 내었습니다.  

빌1:17에서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순수하지 못한 다툼이란 말은 라이벌 의식, 시샘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왔는데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 왔으니,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들이 먼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19절에서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고로”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새번역으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얼마나 쉽고 정확한 번역인지 모릅니다.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바울이 풀려나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바울이 풀려나서 빌립보교인들과 재회하여 누릴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이 영적인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하는데,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도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20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간절한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재판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감옥에 더 수감되든지, 재판의 결과 사형에 처해지든지, 아니면 풀려나든지 간에,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왔고, 장차 우리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어떤 일에도 거리낌이 없이 살려고 힘썼습니다.  

로마의 군인들 사이에서 수감 생활하든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재판 자리에 나아가든지, 이제 풀려나든지, 더 수감되든지, 어떠한 상황이라도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끝까지 복음전도자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남기를 원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의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일보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라는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다고 하면 우리 안에는 주님이 주인이시고, 구세주가 되시고, 주님이 보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성전 삼으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거하시는데, 사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게 사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갈2:24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죽음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서 꿈틀 거리기 때문에 주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보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고 하는 것은 정말 위대한 신앙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생각, 이런 확신,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는 우리 몸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고, 영광이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살아도 주님만을 위하여, 죽어도 주님께 영광이라는 생각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19절의 말씀처럼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도들의 중보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성도들의 기도로, 합심하는 기도로 힘을 얻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아주 숭고한데, 그의 사는 생활을 보면 형편없고, 뒤죽박죽이라고 하면 구원받은 사람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법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하는 일인데 하지 않았다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고후1:14절에 보면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주님 앞에 가서 서게 되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목사로, 장로로 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복음을 위하여 담대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 몸에서 주님이 존귀하게 되고, 주님이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옥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좋은 예배당에 있습니다.  먼저 수고한 주의 종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는 이렇게 평안한 가운데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주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죄와 허물을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나 죽으사”라는 복음 성가를 불러보겠습니다.  

“사나 죽으나” 

1.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2.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후렴)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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