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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노아의 방주 (창 6: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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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 (창 6:13~7:5)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15)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16)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경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호랑이 해입니다. 호랑이처럼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호랑이처럼 어떤 장애물도 두렴 없이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호랑이처럼 자기 분야에서나 일이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신앙에서나 누구도 흔들 수 없도록 반석 위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경인년 신년 첫 해 설교를 노아의 홍수로 시작합니다. 신년이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희망과 축복을 전해야 하지만 창세기 강해를 순서대로 하다보니 어떻게 신년 첫날 죄악된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는 말씀을 선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따져보면 12월 31일과 1월 1일, 무엇 다른 게 있습니까? 12월 31일의 태양은 어둡고 1월 1일의 태양은 찬란합니까?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작년에 했던 일을 새해에도 똑같이 반복합니다. 지난 해 보았던 얼굴을 새해에도 보게 되고, 지난 해 기분 나빴던 사람은 새해에도 보면 기분이 나쁩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경계는 달력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입니다.

진정한 새해는 언제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만이 새해가 시작됩니다. 자기 인생을 심각히 반성하고 새롭게 살아보겠다는 각오를 한 사람에게만 새해는 밝아옵니다. 변화와 결단이 없으면 나는 여전히 지난해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은혜 받을 때만 새해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한자숙어에 괄목상대(刮目相對)란 말이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본다는 뜻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선비는 3일만에 만나도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합니다. 그가 그 3일 동안에 진리를 깨달아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매일 같이 새롭게 만남으로 변화가 있는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매일같이 경험해야지 몇 년 전 예수나 그때 받았던 은혜만 붙잡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간증이 매일같이 새롭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노아 홍수에 대한 말씀을 신년 첫주 설교로 나누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알아야 정신을 차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반성도 없이살고, 또 흥청망청 살던 사람에게 어느날 암 선고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정신이 들면서 자기 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잘살아 왔는지 심각한 반성이 시작됩니다. 

인생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스포츠가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90분이면 끝나고 야구는 9회를 지나면 끝납니다. 그래서 그 정해진 시간에 승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위기라고 생각하면 극단적인 처방도 합니다. 우리 인생도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똑같지 않고 각자가 다르고 그 시간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인간이 영원히 살지 않고 그 정한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야 인생에서 일시적인 것이 무엇이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 쓸모 있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해서 중요한 것에 자기 인생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는 우주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또한 우리 인생에 갑자기 닥칠 죽음의 홍수에 대한 경고입니다. 죽음의 홍수가 갑자기 몰아쳐 올 때 우리는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가 의지할 방주가 있습니까? 새해를 시작하며 위기 앞에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금년도는 정말 결실 있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신앙과 과학

노아 홍수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또 다시 신앙과 과학이라는 문제를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창조론을 주장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신앙인들이 노아 홍수를 전 지구를 덮었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함으로써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지구의 연대를 6천 년 길게는 1만 년을 넘지 않는다고 하면서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지층이나 화석에 대한 기원을 이 노아홍수에 모두 돌리고 있습니다. 고산지대에서 발견되는 해저지층이나 조개류의 화석을 노아홍수 때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지각의 변형이나 기후의 대격변의 원인을 노아홍수에서 찾습니다. 

공룡의 멸망의 원인 또한 이 노아홍수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전 지구를 덮을 정도의 물은 어디서 왔느냐? 홍수 후 그 물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공룡은 그 방주에 탔느냐? 그 때 못 타서 멸종된 거냐? 지구상에 동물류와 조류만 해도 종류가 수만 종인데 그 방주 안에 다 들어갈 수 있었느냐? 1년 동안 배 안에 있었는데 그 먹이나 배설물의 양이 엄청났을 텐데 어떻게 처리했느냐? 8명의 식구가 다 관리할 수 있었느냐?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여기에 답하고자 기상천외한 이론도 주어집니다.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성경은 과학서가 아니라 신앙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생의 문제나 의미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책입니다. 질문이 다릅니다. 자동차의 역사나 동력전달 장치 등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과학과 기술서적이라면 이 자동차 주인은 누구고 이 자동차를 만든 목적이 무엇이며 이 자동차를 바르게 운전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묻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질문들은 궁금하긴 해도 어리석습니다. 성경이 답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나 성경이 필요했던 인간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 수 있는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에만 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학적 수준과 지리적 인식에 맞추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가 부족해서입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지식수준을 가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의 눈높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적 오류는 없습니다. 목적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에게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건 서쪽에서 떠오르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홍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며 여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첫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가 가인에게서 형제살해에 이르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 대에서 폭력과 살인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노아시대에는 천상계까지 타락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6장 11절에서 13절까지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부패하여) 강포가(포악함이) 땅에 충만”하였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국방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도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들이 무너지는 이유도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아모스 1장과 2장에서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들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그들의 죄에서 찾으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암2:6)

이때 고발되었던 죄목들은 상호 계약을 파괴하는 신뢰성 상실, 잔인한 폭력적 행위나 인간성 파괴, 재판상의 불법,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불의하고 몰인정한 조치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그 이유는 동일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창18:20) 소돔과 고모라가 단순히 성적인 타락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있었고, 결국 이 불의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사회의 죄성에 대해서 예민하게 파악하고 경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지난 해 1년 내내 문제가 되었던 ‘용산참사’ 문제가 연말에 가까스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억울한 자의 부르짖음입니다. 부패함, 불의함, 폭력성, 무정함이 압축된 사건이 용산참사 사건이었고, 이 죄악들은 바로 노아홍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되었던 것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노아홍수는 특정 국가에 대한 심판이 아니고 전지구적인 심판이라는 점에서 성경에서 유일합니다. 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품을 철저히 파괴하기로 결정하신 사건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온갖 정성을 다해서 작품을 만들어놓았는데 이 작품이 자기에 마음에 들지 않고 철저히 자신을 배신했을 때 작가는 그대로 살리느니 다 파괴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은 철저했습니다. 홍수는 노아가 6백세 되던 해에 시작하였습니다. 40일 동안 엄청난 비가 내렸고 창조 때 하나님이 가두어 두었던 하늘의 창들이 열려 하늘 위에 있던 물이 다 쏟아졌고 땅 아래 가두어 두었던 깊음의 샘들이 열렸습니다. 다시 창조이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아라랏 산을 비롯한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내리기까지 1년 하고 열흘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직 노아의 방주에 올라탔던 동물들과 새들 암수 한 쌍식과 노아의 식구 8명만 구원받았습니다. 나머지 생물과 인간들은 다 죽었습니다. 7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 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함으로 보여줍니다. 누구도 그 어떤 생물도 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시고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보려하였지만 그것이 성공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노아 대에 벌써 노아는 술 취하고 이를 부끄럽게 만든 함은 그 아들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벨탑과 같은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 우주를 심판해야 하는가? 노아홍수를 통해서 딱 하나 변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8장 21절입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그 향기를 흠향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우주적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포기입니다. 왜요? 이러다가는 심판이 끊일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죄에 대해서 인내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나 초대교회가 우주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사모했지만 2천년이 지나도록 그 때가 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따지자면 노아홍수가 수백 번 왔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참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찬양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22-23) 

우리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잘 나서도 아니요 하나님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심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심판이 없다고 해서 이 위기의식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주십니다. 

노아홍수가 있기까지도 충분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노아 방주를 짓는데 걸린 시간은 120년, 100년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크기를 볼 때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노아 방주는 15절에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라 합니다. 오늘날 도량으로 환산하면 길이가 약 150m, 폭이 25m, 높이가 15m로 삼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지으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사람들은 노아에게 묻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홍수가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4:38-39) 그들이 노아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비웃었습니다. 자기 일에만 바빴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자기가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아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3:9) 도끼를 가지고 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자신의 형편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정신 차려야 할 때입니다. 새해라고 하지만 벌써 3일이 훌쩍 지났고 한 달도 금방 지날 것입니다. 비상한 각오와 결단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노아시대 사람처럼 불의의 홍수를 맞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로부터 최후 심판에 이르는 성서의 사건들을 벽화로 그렸습니다. 그중 노아 홍수와 관련된 벽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노아와 그 방주보다는 그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더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다가 떨어지는 사람들, 다른 배에 서로 올라타려고 싸우는 사람들, 높은 산과 나무에 올라탄 사람들의 모습들입니다. 이들은 결국 다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노아홍수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아홍수를 묘사하고 있는 오늘 성경은 심판에 그 초점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지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셨다”는 말만 몇 번 반복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론 식으로 압축해서 표현할 뿐이고 하나님의 관심은 그 패역한 시대에 의인 노아의 가족과 모든 생물들을 한 쌍씩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리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방주의 규모와 크기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하나님이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 6장 14절에서 16절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모든 동물과 새들도 노아가 일일이 찾아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7장 8절과 9절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노아의 방주에 올랐던 동물들 중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대설교자 스펄전이 “달팽이는 불굴의 인내를 통해서 드디어 방주에 올랐다.”고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였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7장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와 모든 동물들이 들어가매 그 문을 닫아 넣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방주는 방향키도 없습니다. 창문은 위쪽으로만 나 있어 하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배안에 있는 생물들을 불쌍히 여겨 바람이 불게 하여 지면을 마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8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도록 명령한 분도 하나님입니다. 8장 15절과 16절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하나님은 심판을 명하시지만 결코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따로 있고 그 심판의 와중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한 생명을 더 구원하시려고 안달하시는 분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양면성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예외 없는 심판을 내리시는 필연의 하나님이 있고, 그 속에서 생명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저는 이런 두 속성의 충돌이 우리 삶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판사나 검사라고 생각해보십시오. 판사나 검사로서 아버지는 설사 자기 아들일지라도 엄격히 죄에 대해서 심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입니다. 그러니 또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또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두 속성의 충돌이 바로 이와 같고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홍수는 한 편 하나님이 일으키신 심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주를 멸망케 하는 엄청난 재앙과 맞서 싸워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투쟁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이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생명을 보존하고, 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방주를 만드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구원 방주에 올라타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주에 타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외면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자가 될 것입니다.

노아의 순종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요구하셨던 배는 엄청난 크기의 배였기에 노아는 오랜 세월 동안 그 큰 배를 지어야 했습니다. 노아가 배를 지었던 곳은 바다도 아닌 육지였습니다. 7장 17절에 물이 많아져서야 배가 떠오를 수 있었다고 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홍수는 오랜 후에 있을 일이기에 노아는 의심이 들만도 했건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노아의 순종에 대해서 6장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7장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를 살렸던 것은 그의 순종입니다. 노아의 한사람의 순종은 그의 가족도 살리고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도 살렸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형편도 노아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아시대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은 물질중심, 경쟁, 이기심에 기초한 자기 법칙을 정하고 그렇게 살아야 구원이 있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구원과 축복이 있다고 외치며 나아갑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장차올 하나님의 심판을 믿습니다. 그 심판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자가 그 심판의 홍수를 이겨낼 것입니다.  

금년 한 해 무엇보다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의 잉태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마리아가 믿고 순종했을 때 그의 몸에서 구세주가 탄생했고, 그 구세주를 통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도 살고 많은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내 판단과 뜻보다 주님의 뜻과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 내 의지보다 주님의 마음 주님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필요보다 주님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노아가 결국 구원받고 옳다고 인정받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결국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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