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되게 하소서 (행 2:1~4)

  • 잡초 잡초
  • 508
  • 0

첨부 1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되게 하소서 (행 2:1~4)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10년, 경인년의 첫 주일입니다. 새해를 맞는 모든 성도들과 가정에 그리고 하시는 일들 위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처음처럼’을 아시지요.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셔야 합니다. 신영복님의 ‘처음처럼’이란 작은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처음’이란 말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무한한 희망을 내포하고 이TSms 참 좋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참이슬’보다 낫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게시의 말씀에서 나무랄데 없는 에베소 교회에 단 하나 ‘처음 사랑’이 없음을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람, 처음의 모습은 우리가 늘 되짚어 보아야 할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동안 교회 성장을 세계에 자랑하던 한국 개신 교회가 근년에 양적 질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우리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는 목사인 저 개인도 지난 한 해를 몹시 힘들고 어렵게 지났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처지에서 2010년이란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처음’이란 단어를 주셨습니다. 

순수한 교회의 처음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교회도, 유명인사들이 모여있는 유명한 교회도, 재정이 차고 넘치는 풍성하고 힘있는 교회도 아닌 초대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처음교회’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처음교회가 교회의 원형이요.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2010년의 표어를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되게 하소서’라고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생활 목표를 (1)다 같이 한 곳에 모이자. (2)성령을 충만하게 받자. (3)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자. 라고 성경의 표현대로 정하였습니다. 이 한해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활 목표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표어가 부족함 없이 성취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몸 말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 2장 1절로부터 오순절 사건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오순절 사건은 큰 사건이고, 작은 오순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건들이 사도행전 곳곳에 네 번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4장 31절을 보시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이렇게 작은 오순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 14절 이하에도 보면 사마리아에 작은 오순절 사건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 44절로 48절에 보면 고넬료의 집에 이 오순절 사건이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 사람의 집에도 오순절 같은 사건이 있어서 모두가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19장 6,7절에 보면 에베소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오순절 사건이 사도행전에 네 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다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단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사람이 산에 가서 기도하고, 계시를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오순절 사건도 적어도 백이십명 이상의 사람이 집단적으로 함께 체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다같이 한 곳에 모인 사라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 한 곳에 모인 사람들은 기도하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형제, 여인들, 기타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백이십명에 이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돈 많은 사람들도 아니고 신분이 높은 분들도 아니었습니다. 대개는 하류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출신, 세리출신, 병들었던 환자들, 여자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세상적으로 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은 최초의 최고의 은혜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런 사람을 들어 인류 구원의 방주인 기독교의 주요 멤버로 사용하여 교회라는 구원선을 출발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도 신분이 낮거나, 무식하거나, 돈이 없거나, 약하거나를 탓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믿음으로 모여 기다리고 기도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가 모이기를 게을리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다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내용은 복음이지만 기독교의 원동력은 성령입니다. 여기,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어도 동력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동력이 있어서 달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구원의 복음을 가진 최상의 종교이지만 동력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하고 훌륭한 성도와 좋은 교회의 시설이 있다하여도 교회의 원동력인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고 움직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같이 한 곳에 모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한해 동안 모이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주일에배, 오후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속회, 금요찬양예배등 모든 예배에 열심히 모이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우리 교인 중에는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충만하게 받자’입니다. 헬라어로 ‘플레도스’라고 하는 이 충만함은 누가의 전용어입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출생을 중심해서 되어지는 사건 속에 마리아나 엘리사벳, 그리고 시므온 같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말은 다른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이 말은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어떤 때에는 가시적으로, 어떤 때에는 물질적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가 충분히 체험할 수 있도록, 어떤 때에는 누구든지 알수 있도록, 어떤 때에는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몸에 그리스도가 잉태되어 있음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 초자연적인 일들입니다. 아주 특별히 강권적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시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구원받고 하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생의 역사요 은혜의 역사일 뿐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중생하고 성화하는 성령의 역사를 충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충만이란 무엇이냐?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쓰임 받는다면 뜻입니다. 신학적용어로 좀 구별해서 말씀드리면, 이것은 은혜적 역사가 아니라 은사적 역사인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은사적 역사입니다. 비슷한 것 같으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모두가 다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충만이 구원의 절대조건일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도 화끈하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봤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렇치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시련을 이기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이 충만함을 주시기도 합니다. 순교자가 순교하는 순간에 충만함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핍박 가운데서 담대하게 전할 때에 충만하게 주십니다. 이것은 은사적이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충만함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공관복음적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라고도 표현합니다. 어쨌든 은혜와 은사로 구별지어 말할 때에 이 충만은 은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성령의 역사를 충만이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이 교회를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 조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교회를 위하여 올해에는 반드시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있게 한 성령의 충만하심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하심이, 처음 교회와 같은 우리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활목표의 세 번째는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자’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말씀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4절에 보시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라(4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모두가 벙언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의사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언어가 중요하고, 그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의 본문에 방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방언은 서로 말이 통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십시오. 지금 여기에는 각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 통역을 세우기로 해도 한 사람으로 모자랍니다. 몇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방언을 함으로써 모두가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민족적 편견이나 우월감이나 고집이나 문화적 장애를 다 극복하고 마음과 마음이 복음 안에서 통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완전 소통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특징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이나 14장에도 보면 이 방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방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방언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할찌라도 성령을 받음으로 모두가 알아듣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다락방 방언의 특징입니다. 이상한 소리 하는 것, 적어도 사도행전적 방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exact communication, 아주 효과적인 소통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함께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저들이 방언으로 말한다기 보다는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들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놀란 것입니다. 재미있게 표현을 하면 입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니고, 귀가 방언을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방언하는 사람의 특별한 믿음도 아니요, 특별한 재주도 아니요, 특별한 기적도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베푸는 기적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말하는 자와 듣는자 사이에서 통역을 해버린 것입니다. 서로 소통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입니다. 따라서 방언의 근본은 성령의 충만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대로 말할 뿐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사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스스로 듣게 된 것입니다. 처음 교회는 언제나 모여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언어가 통역없이 문화적 장애 없이, 장벽 없이 그대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처음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처음 교회를 오순절 교회, 오순절 다락방 교회라 부릅니다. 오순절 교회는 말씀의 역사가 소통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어떤 말씀을 듣든지 내 마음에 그대로 들어와서 백퍼센트 믿어지고, 그 말씀에 의지하게 될 때에 이것이 바로 오순절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을 한 시간 내내 들었는데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못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게하고, 마음 문을 열게하고, 자기 우월감이나 교만을 다 버리게 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대로 통하게 하는 것이 오순절 다락방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교회는 2010년에 이런 교회되기를 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한 청년이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릴 필요를 거부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혼자서도 교회에서 만큼이나 예배를 잘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느 겨울 저녁, 목사님은 그 고집쟁이 청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앉아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교회 출석 문제를 화제에 올리기를 일부러 피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목사님은 벽난로 속에 타고 있던 석탄 덩어리 하나를 꺼내어 난로 밖에 따로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석탄은 이내 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벽난로 속에 있는 석탄은 여전히 붉은 빛을 내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청년은 그제야 깨닫고 ‘목사님, 이번 주일부터는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난로에서 꺼내 놓은 석탄은 얼마 못가서 꺼지고 맙니다. 하지만 난로 속에 있는 석탄은 난로라는 보호막과 주위의 불씨들로 인해 계속 타오를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아무리 좋은 신앙인일지라도 꺼내 놓은 석탄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거나, 뒤숭숭하여 헷갈릴때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우리교회도 처음 교회처럼, 오순절 다락방같은 모습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곳 교회를 중심으로 ‘다같이 한 곳에 모이기를’힘쓰는 한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모여서 사모하고, 기다린 사람들에게 바람같이, 불같이 임하신 성령께서 이곳에 모인 우리들에게도 충만하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성령의 충만하심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세상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에 관심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세우는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다면 다툴 일이 무엇이고 통하지 않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통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형통하는 것입니다. 이 한해 만사형통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