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날이 새어갈 때에 찾아오신 예수님 (요 21:1~14)

  • 잡초 잡초
  • 496
  • 0

첨부 1


날이 새어갈 때에 찾아오신 예수님 (요 21:1~14)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자기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 역사에 대해 실패한 역사와 성공한 역사의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는 자기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명백한 결론을 얻게 됩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 같이 자기 자신의 실패한 역사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한 베드로가 아니더라도,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은 결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즉시 생업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분간 모여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 『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아니했습니다. 마침내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다른 제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아무 목적 없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우발적으로 한 말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들의 본래의 생업으로 돌아가자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던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 두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 나타났습니다. 디베랴 바다에는 시몬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누구도 예수신줄 몰랐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2010년이라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새 연호의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찾아오신 예수님은 

Ⅰ. 실패한 역사의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21장 4-5절에 『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 『 날이 새어갈 때에 』의 프로이아스는 이른 아침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어두움이 아닌 이른 아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날이 새어갈 때, 곧 새벽 미명에 제자들이 고기 잡는 현장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빛으로, 부활의 빛으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자신의 복음 전도의 활동무대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한 복음 전파의 격전지라서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갈릴리 바다를 지으신 분입니다. 
바다 가운데 물고기를 지으시고 그 물고기를 자신의 능력으로 통치하시고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알고 보면 진정한 주인을 맞이한 갈릴리 바다입니다. 태양도 자신의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려고 나타나야 될 시간입니다. 

이 무렵 예수님은 바닷가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나셨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치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물리적 작용 없이 제자들 가운데 서셨던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 『 얘들아 』의 파이디아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은 부모가 자식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매우 친근하고 격이 없는 사이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 고기가 있느냐 』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 없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거침없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1) 영이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본문 21장 2-3절에 『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한 것은 아무런 목적 없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을 얻기에 부족합니다. 
이미 저들의 내면세계는 완전히 자신들의 본래의 삶의 현장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앞장을 섰고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를 따랐습니다. 

2) 육이 실패한 자들입니다. 

본문 21장 3절에 『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본 후에도 또 다시 세상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배 위에 올랐습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물으심에 고기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도 게네사렛 호수였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에 앉아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4-5절에 『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등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들의 영적 감각은 둔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21장 4절에 『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마 17:22-23). 저들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던 예수님의 약속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마26:32). 
예수님을 떠난 인간들의 한심함이 여기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원시 아담의 후손들의 무력함과 무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원시 아담의 회복입니다. 율법의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예언의 기다림에서 해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Ⅱ. 실패한 역사를 복고시키기 위하여 찾아 오셨습니다. 

본문 21장 6절에 『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분명했습니다. 틀림이 없는 축복의 현장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습니다. 

1) 물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선지자적 축복). 

본문 21장 11절에 『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고 했습니다. 
가득히 찬 축복이었습니다. 큰 고기의 축복이었습니다. 축복이란 위로부터 주신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 『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지하고 교만합니다. 내 머리가 좋아서 출세를 하고 인물이 좋고 운수가 대통해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들의 수요장단과 화복길흉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도 않은 축복을 사람들은 억지로 조급하게 받으려고 서두릅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조급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식이 아닙니다. 
그 결과 그는 평화무드가 전혀 보이지 아니하는 오늘의 중동 전쟁의 전범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 자손들이 세운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대적 세력으로 그 정체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받으면 화가 됩니다. 예수께서 찾아오신 결과 그들은 가득 찬 축복, 들 수 없는 축복, 감당할 수 없는 축복, 큰 고기 153마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2) 찢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왕적 축복). 

본문 21장 11절에 『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찢어지지 아니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물이 찢어지면 잡은 고기를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받은 축복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놓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는데 도적을 맞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내가 살려고 집을 지었는데 살기는 다른 사람이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포도원은 내가 재배하였는데 수확은 타인에게로 가버림은 축복이 아닙니다. 약혼은 내가 하였는데 결혼은 타인이 해버리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축복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받은 축복을 빼앗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받은 축복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향유할 수 있어야 축복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해야 합니다. 

3) 받은 것을 선용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제사장적 축복). 

본문 21장 9-10절에 『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했습니다(요 21:12). 받은 축복을 선용하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악용입니다. 주님께 드려지고 그래서 주님과 함께 누리는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잡은 고기가 아닙니다. 내 그물도 아닙니다. 내 바다, 내 고기도 아닙니다. 주님의 바다요, 주님의 고기요, 주께서 잡아주신 고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체는 완전한 부활체입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미각의 기능, 소화의 기능, 호흡의 기능을 가지고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4) 복직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21장 15-17절에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이들을 부르시고 하신 말씀은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7절에도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0절에 『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들을 양들의 목자로 다시 복직을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망의 2010년 새벽미명에 찾아오신 예수님이 지금 여기 서 계십니다. 온갖 나의 실패한 역사를 복고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인간들의 실패한 역사는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실패한 역사를 복고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 앞에 회개하므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나의 실패한 역사를 복고 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나의 영이 살고, 나의 육이 살고, 나의 사명의식이 살아나고 나의 나 된 자리를 찾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 집에 있는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사의 자리로, 장로의 자리로, 집사의 자리로, 권사의 자리로, 찬양대의 자리로, 교사의 자리로, 구역장의 자리로, 기관장의 자리로 다시 복직을 명받았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할아버지의 자리, 할머니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 아내의 자리, 남편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 자식의 자리, 손자의 자리, 삼촌의 자리, 조카의 자리로 복직을 명받았습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자신이 받은 자리로 복직을 명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요한도 자기의 운명과 같지 않을까 하여 『 주여, 이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 요한은 너처럼 순교당하지 아니할 수도 있다 』는 뜻으로 본문 21장 22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요한은 베드로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각각 독립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각자는 예수님과 각각 독립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 감사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