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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심하라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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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라 (마 14:22~33)


I. 풍랑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시는데 
첫째는 각양 병든 자를 고치신 사건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몸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몸이 예수님 앞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세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온 인간의 생명을 친히 만드셨고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기사 가운데 자연을 변화시킨 기적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두 번에 걸쳐 나오지요. 이미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똑같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만 배에 태워보내셨고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가다가 풍랑을 만난 사건입니다. 

인생의 풍랑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① 우리가 잘못해서 만나는 풍랑, 불순종하고 실수해서 만나는 풍랑이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언젠가 폐암으로 수술을 기다리는 교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침대 곁에 담배가루를 수북하게 쌓아 두었어요.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철없는 중고등학교 시절 담배를 한대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담배를 끊었다가 피우고 또 끊었다가 피우기를 수십번, 이제는 급기야 담배란 놈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게 생겼다고 넋두리하는 교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② 그 외에도 까닭 모를 풍랑이 있습니다. 누구의 실수도 아닌 것 같은데 알지 못하는 풍랑입니다.  

착하고 존경받는 가정에 뇌성마비 아이가 태어납니다.

가령 뇌성마비 천재시인 송명희가 오래전 새로나온 시집 두권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책 머리에 “목사님 목디스크로 너무 괴로워요. 저를 위해서 한번만 기도해 주세요”라고 써 보냈습니다. 주옥같은 시들을 읽어 내려가며 송명희 시인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내게도 이처럼 까닭 모를 풍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파도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파도를 타며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써어핑을 즐기는 사람은 산더미처럼 굽이치는 파도를 친구처럼 즐기며 살아갑니다. 나이야가라 험준한 계곡에서도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파도를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에 아우성이었고, 베드로는 파도를 타고 걸어가다 풍랑을 보고 물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결을 타고 유유히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풍랑에서 늘 괴로워하며 살아가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아침에는 승리했는데 저녁에는 신음소리로, 어저께는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오늘은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저께나 오늘이나 풍랑을 밟고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II. 본문

본문 시작하는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보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재촉하사”로 번역된 “아낭카조”란 말은 억지로 가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크고 놀라운 이적의 장소를 억지로 떠나게 하시므로 예수 외에 그가 행하신 일이나 축복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가운데 커다란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죽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니 안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니”라는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우선 이 말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던 바로 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말고 안심하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그리고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영어로 “I AM” 즉 구약 출애굽기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주님이시거든 나도 주님처럼 물 위로 걷게 해 주십시오” “오라”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보고는 물 속에 빠져들지요. 주님께서 즉시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배 위에 올라타시니 풍랑이 잔잔해집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께 절하며 주님을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하는 이야기로 오늘 본문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사건입니다. 

「도시락 하나로 오천 명을 먹인다. 메시야가 왔다. 그것도 갈릴리에 왔다. 바로 여기 계신 예수님이 메시야다. 이 분을 왕으로 삼는다면 모든 경제문제 끝났다.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경제대통령이로다. 이 분이 독립운동을 해 주신다면 로마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민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군중들 사이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동요에 휩싸일 수 밖에요. 떡을 먹는 군중들보다 떡을 나누어주는 제자들은 신이 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너는 우편에 나는 좌편에... 갈릴리의 촌부들이 벼락출세를 하게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지요. 

군중들의 들뜬 마음도 가라앉히고 제자들의 허황된 꿈을 깨뜨릴 생각으로 지금 군중들을 강제로 흩으셨고 제자들은 억지로 배를 태워 갈릴리 바다에 보내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여기서 제자들은 잔뼈가 굵어 졌습니다. 이 바다를 건너는 것쯤이야 예수님이 아니 계셔도 너끈히 건널 수 있는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성경은 고난이었다. 원문으로 바사노스(βασανος)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죽을 지경으로 어려운 시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우리들은 장관자리 하나씩 할 줄 알았는데 이제 죽게 생겼습니다. 가슴 부풀어 있었는데 죽으면 이 모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문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문제만 남게된 것입니다. 고난이 인간의 실존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신음하고 있을 때에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제자들이 아우성 대는 것을 아셨습니다.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예수님 같으면 기도 중이었으니까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 겝니다. “아버지 사랑하는 내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를 잘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한다든지, 일찍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분이시니까 “바람아 잔잔하라. 풍랑아 잠잠하라.” 풍랑을 꾸짖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급히 산에서 내려와 바다 위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에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을 찾아와 위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문제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 문제를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문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안타까이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분을 이름하여 임마누엘 - 높으신 하나님이 낮은 사람들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라. 할렐루야!

III. 밤 4경 물 위로

1. 밤 4경에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밤을 나눌 때에 1경 2경 3경 4경으로 나누었습니다. 군대에서 보초를 서게되는데 보초가 교대하는 시간이 1경 2경 3경 4경입니다. 4명의 보초가 밤을 세우게 됩니다. 양을 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4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정도를 일컫습니다.

모두가 잠자고 고요히 쉬는 바로 그 시간! 예수님이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세요.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배가 한번 두번 열번을 뒤집혀져도 그 누구 보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절망하는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셨습니다. 아무도 몰라주고 보아주지 않는다고요. 예수님은 지금 알아주십니다. 당신이 인생의 4경을 헤매던 사경을 헤매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2. 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데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 이성주의자들은 ‘물 위로’라는 말의 전치사를 묘하게 풀이해서 예수님께서 해변가를 거닐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잘못 보아서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과 26절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고 기록하는데 성경 원어상 기록이 조금씩 다릅니다. 25절을 “바다 위로” 혹은 “바다 쪽으로”라고 되어 있고 26절은 “바다 위에서” 걸으셨다고 되어졌습니다. 이를 두고 제자들의 착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육지에서 배는 이미 수리나 떨어져 들어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그냥 걸어오신 것이 아니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오셨다고 그래도 믿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물 위로 걸어오신 것이 아니고 두 팔을 저어서 날아오셨다고 그래도 나는 믿습니다. 그분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자연의 질서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셨다 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물 위로 걸어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신 예수님, 지금 이 시간에는 바람을 타고 오십니다. 파도를 짓밟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문제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과 시련들을 머리에 이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고난을 짓밟고 문제를 짓밟고 어려운 환경을 밟으며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크리스챤들이 누구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게 생겼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제부터 살게 생겼다고 얘기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 망하게 생겼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능히 세상을 승리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문제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데 우리는 발로 짓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환경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환경을 디디고 일어서는 사람들입니다.

IV. 베드로의 도전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태도가 어떠했을까요? 베드로를 제외한 11제자는 풍랑이는 바다 한 가운데 배 안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못난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감에도 불구하고 부러운 듯이 쳐다만 보고 있는 제자들 말입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이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 나도 오라 하소서. 오라! 야고보가 나도 오라 하소서. 너도 오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물 위로 걷는담’ 주님을 앞에 두고도 그들은 도무지 도전장을 내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없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도 인정합니다. 간구하면 응답해 주실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나도 엄청날 땐 그들은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실패가 두려웠던 것이지요.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똑같은 상황 속에서, 똑같은 제자들이, 똑같은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열한 사람들은 구경꾼처럼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한 사람만이 바다 위를 걸어가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이 시간 여러분들이 접어두었던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이 시간 펼쳐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드리면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그 일들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커서 도전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곧 도전장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병으로 신음하며 오랫동안 고생해 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포기 직전에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이셨던 주님을 믿고 이 시간 여러분의 질병을 주님 앞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하찮은 일에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계십니까? 빈 항아리에 포도주가 넘치게 하셨던 주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황이라고 고민하는 가운데도 믿음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 벌떡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열한 제자와는 달리 베드로를 보십시다. 오라! 하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베드로는 흥분했습니다. 바다 위로 걸어 오너라. 발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도전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시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이 오라 말씀하시면 나는 이미 간 것이나 다름없다. 주님이 축복을 선언하셨으면 기쁨으로 받아 간직하면 내 것이 된다. 가리라! 베드로는 풍랑이는 바다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주님처럼 바다 위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배에서 일어나 파도가 흉흉한 바다 위로 과감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보였으나 그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허깨비처럼 여겼습니다. 오로지 파도 위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 파도마저 다스리시는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라! 무서워하지 말고 오라. 믿고 오라. 오직 믿음으로만 오라. 말씀 붙들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죽을 것이라는 감정적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내게는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말씀이 있다”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천지는 변하고 파도와 바람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니 가겠다. 이것이 기적의 비밀이었습니다.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실패도 성공도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는 일은 성공이요 말씀이 없이 하는 일은 실패입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는 자신의 재주나 능력으로 물 위를 걸으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로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믿음이 좋다는 한 청년이 은혜로운 집회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여름철 폭우에 강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너무나도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었다면 나도 넘실대는 강물을 건널 수 있으리라. “주여 믿습니다! 100번 외쳤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발을 풍덩 담그는 순간 쑥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 살려! 옆에 있던 청년들이 밧줄을 던져서 겨우 살려 주었습니다. 나는 왜 베드로처럼 걷지 못할까? 믿음 없음을 한탄했다는 얘기지요.

은혜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라 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간 것이지, 자기 생각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강물을 자기 생각으로 건너보려고 했던 게지요.

주님이 오라 하지 않는 일을 하면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근거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성공이나 실패는 불행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일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모두가 위대한 것입니다.

V. 믿음이 작은 자여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시작한 일에도 실패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바다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왜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오늘 본문 30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뚜벅뚜벅 주님만 보고 걸어갈 때는 바다 위를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파도가 휘청~ 지나가며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파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흉흉한 바다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운동장처럼 걸어가던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렁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받침대가 제거된 듯이 베드로가 물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를 보던 그 눈이 문제의 파도를 보는 순간 문제 속에 빠집니다. 파도에 빠집니다. 

이때 예수님은 31절에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물으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 - “올리고피스토스” 이 말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마태는 사용한 적이 없는 말입니다. 믿음 분량, 믿음의 차원이 왜 여기에 미치지 못하느냐? 믿는 자들에게 믿음을 보충해 주는 말씀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즉시 주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 저마다 한 마디씩 했을 겝니다. 내 저럴 줄 알았다구. 제 분수를 알아야지. 자기를 살피지 않고 날뛰니까 저 꼴 좀 보라구. 이것이 바로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입니다. 견딜 수 없는 조롱입니다.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경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조롱해도, 친구가 나를 비웃어도, 내 부모가 나를 도와줄 수 없어도, 예수님이 불가능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고 책망하셨나요? 만용을 부리다가 어쩔뻔했냐고 꾸짖으셨나요? 제자이면 제자답게 행동하라고 냉소하셨나요? 예수님 안타까이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왜 믿음이 없느냐? 왜 의심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때로 믿음이 있다할지라도, 말씀 듣고 달려간다 할지라도,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건강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사업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행복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천부여 의지할 곳 없어 주님 앞에 나옵니다. 항복하고 나오면 주께서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VI.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서양 전설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중동에 한 행상이 사막에 들어섰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자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인생은 언제나 바른 길을 가야 하는 법이요” 하고 지나갔습니다. 석가모니께서 나타나셔서 “인생은 고행이라오”하고 지나갔습니다. 마호멧이 나타났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 앞에 굴복하시오”라고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이 행상 이 나그네의 손을 붙들고 “내가 이 길을 너와 함께 동행해 주마” 그래서 그 길을 예수님이 함께 손 붙들고 사막을 지나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책망하거나 나무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멀찍이 바라만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내 곁에서 나를 붙들어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제자들이 풍랑 만나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풍랑 만날 것을 모르고 갈릴리 바다로 보내셨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뻔히 풍랑 만날 걸 알고 예수님이 동행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보내셨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왜 풍랑 만날 걸 아시고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로 가게 하셨습니까? 

오늘 이 본문의 사건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베드로 물에 빠진 실패를 통하여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을 거닐어 보는 위대한 성공을 통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당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바람을 잔잔케 하신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시련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역사의 흥망성쇄를 움켜쥐신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살고 죽는 문제, 생사화복을 주장하신 분이십니다.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면 빠지고 잠기는 것이 자연의 질서와 법칙이지요. 그래서 누군가 그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고 자연을 꾸짖을 수 있다면 그분은 그 자연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33절에서 고백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풍랑속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절하며 가로되 실패의 종착점에서 예수 만나면 가장 위대한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의 종착점에서 예수를 잃어버리면 그 인생은 최고의 실패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실패도 성공도 위대해야 하는 법입니다.

32절을 보십시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풍랑이 멎었으니 안심하라가 아닙니다. 파도가 그쳤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지금 아직도 바다는 굽이치고 있습니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사업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내 몸은 여전히 아파 있을 수 있습니다. 내 가정에 문제가 아직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이 그 문제를 보고 계시니, 주님이 내 손 붙들어 주셨으니, 주님 손 붙들고 이제 우리 가정으로 사업터로 돌아갈 것이니 안심하라 평안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과 오늘 본문에서 바람을 잔잔케 하신 사건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전엔 예수께서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바람에 대해 어떤 말씀도 어떤 조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 것 바로 그것이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신 것 그것이 평안입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요.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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