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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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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모두 함께 성탄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이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함께 참여하는 세계인의 명절날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제 기독교와 예수와 성탄절은 이 지구촌 구석구석에 다 알려지고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 그리스도인들이 더 즐기는 날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이제는 널리 알려진 날이 되었습니다. 어느 절에서는 “축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합니다!” 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은 절도 있습니다. 어느 새신자가 등록하였습니다. 절에서 교회로 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주지스님께 고맙다고 전화를 했더니 “뭘요 같이 먹고 살아야지요”라고 하더랍니다. 이제는 성탄절이 상업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성탄절은 상업하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술집 하는 사람들이,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에는 재미 그 이상의 의미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본문을 요한복음 3장16절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성경구절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잘 알려지고 애송되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고 담겨진 말씀입니다. 여기서 네 가지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근본적인 복이고 은총의 복이고 복중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지고의 사랑”입니다. 지극한 사랑입니다. 누구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서 다 주셨습니다. 다 주시고서도 또 남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더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넉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루를 천년같이 인내를 하십니다. 인내는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정신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포기해 버립니다. 포기는 관심도 사랑도 마음도 떠나버린 상태에서 나옵니다. 조금만 마음이 남아 있으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내하십니다. 하루가 천년같이 기다리십니다. 

그 사랑을 표현한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곧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다 싫다고 뿌리치며 집을 나가는 아들을 아버지는 나무라지도 매를 들지도 차마 큰소리도 치지 않으십니다. 집나간 아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밤마다 잠도 안 옵니다. 삶이 즐겁지도 않고 행복함도 없습니다. “에이 잊어버리자” 마음먹다가도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또 생각이 납니다. 더 염려가 됩니다. 더 그리워집니다. 그렇게 기다리는데 마침내 아들이 돌아옵니다. 병든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병신같이 병들어 돌아왔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돌아왔습니다. 보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식을 만나니 분노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형은 불평하였고 멀리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심통 부렸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 사랑의 모습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이고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성탄절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두 번째 복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열 개에서 하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주는 것입니다. 다 주고도 또 줄 것이 없는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이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고 제도로도 아니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최고의 보물을 아낌없이 주시면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비교해 보면 우리 사랑의 수준은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 수준은 아주 저급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 중에서 지극히 일부분만 주려고 합니다. 그것도 주는데 여러 번 망설이고 재고 주저합니다. 그리고 일부만 주고서도 오래 기억합니다. 뼛속깊이 새겨 놓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은 곧 잊어버립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준 사람은 오래 기억하고 받은 사람은 곧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받은 사람이 잊어버리고 인사를 안 하면 배은망덕이니 은혜를 모른다느니 서운해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모들이 서운해 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조금만 알아주지 않으면 곧 바로 서운해 합니다. 불효자라느니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고 서운해 합니다. 부모가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부모는 자식을 다 그렇게 키우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키워서 효도 받으려고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받았고 그 사랑을 받아 자랐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서도 자기는 자식에게 과한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배은망덕 한다느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고 서운해 합니다. 우리의 수준이 저급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다 주셨습니다. 그것도 제물로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이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사랑을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고 표현하였습니다.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사랑하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고 사랑입니까. 이것이 두 번째 사랑입니다. “독생자까지 주셨다.”  


 세 번째 복 “그를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는다” 

구원은 10원에서 1원이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 등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고 자꾸만 구원 구원하니까 인도한 사람에게 묻기를 “기왕 주시려면 1원을 보태서 10원을 주시지 왜 9원을 주셨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질문에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도한 사람이나 등록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1원을 십일조로 미리 떼셨기 때문에 구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구원의 의미가 상당히 크고 넓습니다. 구원은 지옥에서 구출 받는 것을 말합니다. 불구덩이에서 탈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1원을 더 보태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불구덩이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안에 내 가족들이, 내 자녀들이, 내 이웃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모두 불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얼마나 위급한 경우입니까. 거기로부터 구출하고 탈출시키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고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복음이고 길이고 생명이고 진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에서 구원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불구덩이에서 속수무책으로 갇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불구덩이가 지옥입니다. 거기로부터 구출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출시키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 먼저 믿은 사람들은 그 위험한 바다와 불구덩이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출해 내고 구원해 내는 사람들은 용기가 있어야 하고 뜻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구출해 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참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난 집에 들어가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 오는 소방대원들이 있습니다. 참 용기 있는 분들입니다. 직장과 직원이기 이전에 목숨을 걸고 불구덩이에 들어가 갇혀있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 오는 것입니다. 철길에 뛰어 들어가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지탱되고 건강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어떤 노인회에서 여행을 떠나서 배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에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어느 할머니가 바다에 추락했습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사람 살리라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누구도 뛰어들지 못하고 그냥 서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할아버지가 뛰어 들어가 그 할머니를 구출해 내서 배 위로 무사히 올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든 노인들이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입니까. 용기가 없으면 자기 목숨을 담보삼고 그렇게 뛰어 들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배위로 올라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가 날 떠밀었어.” 누가 떠밀었든 스스로 뛰어들었든 누군가를 건져냈으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십시오(눅 16:19-31). 부자는 세상에서 풍부하게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잔치를 베풀고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비단옷을 입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그 부잣집 문전에 기거하는 거지였습니다. 이 거지 나사로는 매일 배가 고팠습니다. 먹어도 또 배고프고 헐벗었고 몸에 병까지 나서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했습니다. 최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부자는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사람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꼭 배부르게 먹어야만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만 있어도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거지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그것이 거지의 근성입니다. 세상에서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둘 다 죽었습니다. 둘이 죽어서는 입장이 정반대로 뒤바뀌었습니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마치 반전 드라마와 같습니다. 아주 극적입니다. 죽어서 입장이 순식간에 뒤바뀌었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불타는 곳에 갔습니다. 입이 타 들어가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런데도 마실 물이 없습니다. 거기에 물이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 아닐 것입니다. 입이 타 들어가는데 물은 없고 언제까지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시간개념도 없습니다. 영원히 그렇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옥 설명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지옥입니다. 지옥도 천국도 영원한 세계입니다. 

이윽고 눈을 뜨고 보니까 천국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내 집 문전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물 좀 갖다 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이 부자가 물 따위로 그렇게 목말라 애원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물 좀 달라고 애원을 하고 내 혀를 물로 적셔 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막연한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구를 했습니다. 나사로를 내 형제들이 사는 곳으로 보내 내 형제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세상에는 목사도 있고 교회도 있고 전도자들이 있어 그들이 전하여 줄 것이라고 하였지만 부자영감은 그 사람들의 말은 안들을 것이고 죽었던 나사로가 가면 그들이 나사로의 말은 믿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부자가 착각을 한 것은 그곳은 지옥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모르니까 누구를 세상에 보내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곳 지옥의 장면을 그대로 표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곳은 개념의 세계가 아니고 실제상황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와 자녀와 이웃들이 그 지옥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지옥으로부터 구출해야 하고 구원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구출을 위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기만 하면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누구든지 환영하는 곳입니다.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는다”는 사랑입니다. 


 네 번째 복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 

천국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 뿐만이 아니고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은 영생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감히 영생을 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이고 축복이고 열매입니다. 인간의 최고 기대와 바람은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불안해합니다. 중병에 걸리면 또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장수보다 더 큰 복은 천국이고 천국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생입니다.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네 번째 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는 영생이고 영원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을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 영원의 세계에는 말 그대로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곳은 갈등이나 슬픔이나 눈물이나 죽은 이 없는 하나님의 영원의 세계입니다. 그 영원의 세계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거기가 천국이고 거기가 영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런 의미가 주어진 날입니다. 이런 복이 주어진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에 보내실 때 요란하게 보내셨습니다. 700년 전부터 그가 오시리라고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구출을 받으며 영생을 얻는다고 장담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그 멸망은 넓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고 불구덩이에 갇혀서 고난 받는 것을 말하고 회복 불능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갇혀 있는 시간이 얼마인가 하면 영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지옥도 영원의 세계입니다. 멸망의 세계도 영원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든 그곳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탄절은 이런 뜻이 들어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절정의 날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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