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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마라라 부르지 말라 (룻 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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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라 부르지 말라 (룻 1:19~22)
  

어느 날 조용한 마을 베들레헴에 초라한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두 사람은 모녀지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였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습니다만, 변하는 건 강산만이 아닙니다. 십 년이면 사람도 변합니다. 두 여인 중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인생은 십 년 동안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나오미는 본래 베들레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있었고,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십 년을 지나는 동안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십 년 전 나오미의 가족들은 대대로 살아온 고향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나게 된 것은 흉년 때문이었습니다. 흉년은 너무도 극심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본래 가뭄과 기근이 자주 드는 곳이었습니다. 그 동안 잘 견디면서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자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가난도 잘 견디던 분이 어떤 순간 갑자기 <도저히 못 참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그런 대로 잘 살아온 부부가 어느 날 갑자가 <이 사람과는 못 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갈라설 궁리를 하게 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늘 기도하면서 잘 견디던 사람이 갑자기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기도를 중단합니다. 교회에 발길을 끊습니다. 여러분, 절대 이런 충동적이고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사단이 쾌재를 부르는 순간입니다. 이 때 감정에 따라 처신하면 사단만 기쁘게 하고 맙니다.

나오미의 가족들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실 그 땅에 흉년이 드는 것은 다반사였고, 전에는 잘 참고 살았는데, 갑자기 <도저히 못 참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떠날 결심을 굳혔습니다. 정든 고향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사람들은 극구 만류했습니다. <힘들어도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만류한다면 한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도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면 침착성과 예리함을 잃어버리고 판단을 그르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를 아끼는 이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어려움을 겪을 때 신앙의 길잡이가 될만한 분들의 충고를 받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신앙과 인생의 길잡이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을 비롯한 교회 어른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오미의 가족들은 결국 사람들의 손길을 애써 뿌리쳤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비단 정든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쳤기 때문만은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압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들어도 약속의 땅을 지켜야 합니다. 과거에 아브라함도 흉년을 만나 애굽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내 사라를 애굽인들에게 빼앗길 뻔한 위험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을 벗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나오미의 가족들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을 떠나는 마음은 결코 편안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 돌아온 결과는 너무도 참담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함께 한 남편을 잃은 슬픔은 너무도 컸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두 아들이 결혼을 해서 식구가 늘자 남편을 잃은 슬픔도 어느 정도 가시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은 모두 모압 여인들이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안 되는 줄 알면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본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방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장 3-4절을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혼인을 금한 민족은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모압은 가나안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모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3장 3절을 보면 모압도 하나님의 총회에 속하지 못할 백성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모압의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떠난 나오미는 안 되는 줄 알면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하는 실수를 또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두 며느리를 맞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나오미는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압 땅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자. 이 늙은 몸이라도 고향 땅에 눕히자. 이제 내게 무슨 낙이 있겠는가? 이 모압 땅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모압 땅은 우리 가족을 삼키는 죽음의 땅이었다. 모든 게 베들레헴을 떠났기 때문이었어. 이제라도 돌아가야지. 정든 고향 산천이라도 바라보고, 고향 사람들이라도 만나 거기서 살다가 죽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두 며느리를 불러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오르바는 울면서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아무리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십여 년 동안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은 나오미의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2009년을 돌아보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것을 남기셨습니까? 아니면 나오미처럼 많은 것을 잃으셨습니까? 베들레헴으로 가면 안 될 줄 알면서 간 나오미의 가족처럼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가시지는 않았습니까? 떠나서는 안 될 믿음의 자리,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시 나오미가 모압 여자들을 며느리로 맞은 것처럼 안 되는 줄 알면서 하신 일은 없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 행동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픈 마음으로 예배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연말을 맞는 우리 마음에는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후회가 있습니다. 아쉬움도 너무나 많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별로 한 것이 없이 흘려보낸 아픔이 너무도 큽니다. 

나오미를 본 베들레헴 사람들은 그녀의 초라한 행색에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나오미가 맞느냐?> 알아볼 수 없도록 변한 나오미의 모습에 사람들은 탄식했습니다. 십 년 세월은 그녀에게서 가족과 아름답던 외모, 그리고 기쁨과 웃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본문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는 털썩 땅에 주저앉아 사람들의 손을 잡고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함께 이웃에서 살던 이들은 나오미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도록 했을까요? 나오미란 이름은 <희락, 기쁨>이란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생애에 이제 다시는 기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오는 그녀에게 희락은 없었습니다.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쓰고 괴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은 마라라고 부르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내 인생도 쓰다, 내 인생도 괴롭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연말을 맞이하는 마음이 허전하고, 소중한 것을 다 잃은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우리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저는 반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라라고 부르지 마시고, 오히려 <나오미>라고 부르시길 바랍니다. 기쁨, 희락이라고 부르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존재를 뜻합니다.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면 그 인생도 정말로 마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생각은 결과를 낳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천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인생도 천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인생도 존귀해집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렇습니다. 아이에게 <못난이>라는 자극을 주면서 키우면 아이는 정말로 못난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 <나는 못난이>라는 패배적 자의식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사랑과 존중을 받으면서 <소중한 사람>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어린이들은 커서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다고 자부하면서 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마라처럼 쓸지라도 자신을 <나오미>라고 불러야 합니다. 나오미가 될 줄로 믿어야 합니다. 나오미가 되길 소원하십시오. 나오미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믿음대로, 기도대로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마라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나중엔 다시 나오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데리고 온 며느리 룻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나오미의 가문을 잇는 아기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녀의 말년에 다시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는 순간 마라의 고통은 사라지고 다시 나오미가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도 나오미가 되는 복을 받길 원합니다. 2009년을 마라의 아픔을 가지고 맞이하신 모든 교우들이 나오미가 되어 기뻐하고 찬송하는 축복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마라처럼 돌아온 나오미가 어떻게 다시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첫째로 그녀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다 잃은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선 그녀가 돌아온 것을 반기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또 보아스 같은 마음좋은 친척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자기 밭에 와서 곡식을 줍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일군들에게 명하여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녀로 하여금 많이 주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오미에게는 며느리 룻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마당에 그녀는 며느리라기 보다는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든지 친정으로 돌아가서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남은 시어머니를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자신의 행복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룻은 이미 모압의 우상을 섬기는 여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슬픔을 이겨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따라왔습니다. 

나오미에게 룻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가족들 대신에 새로 주신 가족임을 알았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되면 룻도 행복해질 것이고, 낳은 아기는 자신의 가문을 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오미가 나서서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룻을 보아스와 만나게 했고, 그 결과 두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오벳을 낳았고, 나오미는 오벳을 안고 기뻐하였습니다. 이 오벳은 후에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2009년 한 해 동안 아쉬운 것도 많지만, 새해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아직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 친지들,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성도들, 직장 동료들, 아직 우리를 도울 사람들이 많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변의 사람들이야말로 다시 시작하는 밑천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의지하십시오. 서로 기대십시오.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는 버팀목들이 되십시오. 서로에게 인생의 밑천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나오미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나오미가 다시 기쁨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다시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오미는 다시 웃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실수로 인한 고통까지도 새로운 기회가 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유명한 책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쁜 일 가운데서는 우리에게 속삭여 말씀하시고,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는 소리내어 말씀하시지만, 고통을 통해서는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신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나오미는 모압에서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라를 나오미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를 통과할 때 물이 없어 고통을 받다가 힘들게 샘을 발견했는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 샘이 바로 <마라>인 것입니다. 그 곳의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샘에 던지게 하셨고, 그렇게 했더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도 단물로 바꾸십니다. 마라 같은 쓴 인생도 단 인생으로 바꾸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 말씀대로 사십시오.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라 같은 쓴 인생도 단 인생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에서 <엘림>으로 인도하셨는데, 그 곳에는 물 샘이 열 둘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고, 그들을 더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머물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뿐입니다. 2009년 한 해 동안 아쉬운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께로 다시 가까이 오십시오. 탕자가 돌아오듯 다시 오십시오.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세 이레 특별새벽기도회>와 <원 플러스 원 집회>를 통해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길 바랍니다. 2010년에는 우리 모두의 삶이 나오미의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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