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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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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어느덧 종착역입니다. 시간은 조금도 기다려주지를 않습니다. 정해진 길로 묵묵히 달려갈 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딴에는 잘 한다고 한 일인데 정말 내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을 위해서 한다고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나는 한 일도 없는데도 혼자서 칭찬만 가득 받아들고 오히려 민망하고 쑥스러웠던 일도 있습니다. 대충 대충한 일에는 칭찬이 따르고 정성을 다 한 일에는 비난이 가득해서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온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도 헛수고로 끝나기도 하고 오히려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때, 교회적으로도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길을 우리 모두 지나왔지만 그래도 그 어려운 길을 잘 견디고 이기며 오늘까지 왔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좋은 환경을 갖춘 곳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고 새롭게 꿈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새롭게 한 가족이 되신 모든 분들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어려운 때 교회의 귀한 중직들을 맡아서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척 힘들고 지칠 수 있건만 여전히 공동식사와 교회 청소를 위해 수고하신 구역 식구들과 구역장님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남녀 전도회장님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린이교회학교와 중고등부 교회학교를 맡아서 수고하신 부장 선생님들과 모든 선생님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특히 재정적으로도 가장 힘들 때 오히려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빈틈없이 업무를 처리해주신 재정부원들 고맙습니다. 그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느낍니다. 부족한 종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함으로 여기까지 함께 동행하신 모든 성도님들, 오히려 제가 지치고 낙심될 때 거꾸로 저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시간은 이렇게 수고한 모든 분들을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모두 함께 인사를 나눕시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아픔 속의 헌신들을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로 갚아 주실 줄로 믿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께 달려와 질문을 던지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해서입니다.
아니라고,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그냥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애써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떤 세상이 내 앞에 벌어질까를 몹시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다시 태어나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무엇으로 태어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천국과 지옥이 우리들 앞에 펼쳐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정말이라면 과연 나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천국일까 지옥일까? 지옥에는 정말 가기 싫은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천국에 갈 자신이 없기에 더더욱 죽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어떤 모습으로든 다 죽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아야 되겠다. 여기 한 사람이 그래서 길을 나서고 있는 예수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이 누군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자기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비석에 몇 줄 써서 이름을 기록해 놓으면 영원히 그 이름이 남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는 책이 있다고 요한 계시록은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기록한 자기 책과 생명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책만 있을 뿐 생명책에는 그 이름이 올라있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아니라고 몸부림을 쳐도 지옥행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는 그래도 착하게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의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착하게 살았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더러운 걸레와 같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무명의 한 사람은 그 질문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으로 끝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여긴다는 것은 벌써 출발부터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님이 다시 묻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을 너에게 알리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이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베드로가 증언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교훈하시고 깨우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세주로 믿을 때 비로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장에게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주로 믿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관한 한 나의 공로는 없습니다. 물론 상급을 말할 때는 다릅니다. 우리의 수고에 따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는지 정성을 다했는지 충성과 헌신을 다 했는지 여부가 상급을 논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이다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때는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것이 유일한 판단 기준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누가 나를 비난하고 욕한다 해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살은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내 생명을 끊어요?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라고 하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내 스스로 없애요? 그러니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게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속상하고 절망스러워도 자살이란 단어는 내게 없다고 굳게 믿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영생의 길은 오직 한 가지 주 예수를 믿는 것뿐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간직하고 주님의 은혜 아래 살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답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만 드러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선한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영광을 다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시비 거리를 없애는 효과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가 아닌 선한 선생님으로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하게 접근을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십계명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서 실천해야 할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라도 다 이런 대답을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율법학자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 이들은 정말 티가 날 정도로 그렇게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것도 남들 앞에 보란 듯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 외에는 다 하지 말라, 말라,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 안 하면 되고 간음 안 하면 되고 도둑질 안 하면 되고 거짓 증언 안 하면 되고 속여 빼앗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물론 마음으로야 죽였다 살렸다 수도 없이 했을지라도 겉으로만 안 그랬다면 난 안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짓 증언이나 속여 빼앗지 않는 것은 좀 더 수고가 따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는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나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 사람 역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남들은 어쩔지 몰라도 나는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도 보면 “나 혼자만 했다. 나밖에 없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할 때 나만 해서 속상하다는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가 도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혼자서 하려니 힘도 들고 일의 능률도 안 오르고 그랬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어떤 때는 왜 이 일을 나 혼자서만 해야 하나 그런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남들은 못하는데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내가 수고한 만큼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니 감사합니다. 내가 힘들었다면 힘든 데도 결국 해냈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요 아픈 몸을 가지고 끙끙거리며 했다고 한다면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고 혹 나를 귀하게 여기사 고쳐주실 지도 모르기에 더욱 감사한 것이요 이렇게 감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감사거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감사와 기쁨이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데 이 사람은 어땠습니까? 이 사람은 그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진짜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만 한 했으면 뭐 합니까? 마음으로 미워하기만 하여도 살인했다고 예수님 말씀하셨는데 우리 마음에 누구에 대해 섭섭하게 여기고 누구를 내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하고 용납하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살인이요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내가 거짓 증언하는 것이요 그로 인해서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게 바로 속여 빼앗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그건 이웃 사랑의 상실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대로 하지 않은 것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이웃 사랑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까? 정말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를 보시니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르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재물은 많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고 하셨고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고 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까지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하니 내가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다 지켰다고 큰 소리를 친 것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결국 여기서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진짜 사랑이 네 마음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있다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되어라,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였다고 하지만 그럼 재물이 없는 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 쓸 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의 것 내 것이라고 하며 움켜쥐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으면 하늘의 보화를 내게 주셔서 그 보화를 지닌 채 주님을 따를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있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면 빈껍데기가 되는 줄로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을 움켜쥔 채로는 결코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는 하늘의 보화도 우리에게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요? 주어도 잡을 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더 큰 사랑을 내게 베풀어주십니다. 은혜가 넘치게 만들어 주십니다. 주를 위해 가진 재물로 함께 나누면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니까 항상 내가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내가 먼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어려움을 보고 내게 있는 빚을 보면 남는 것은 더 큰 어려움과 빚밖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주를 위해 수고하는 모든 자와 원수와 같은 이들을 섬길 자로 알아 물질과 사랑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어 우리의 창고를 채우시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서도 복을 받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의 최고의 보화라고 해도 하늘의 보화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채워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부하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주는 자입니다. 물질로 섬기면 물질로 넘치도록 채우실 것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면 사랑을 넘치도록 받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주고 나누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모든 수고에 대한 공치사를 스스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공치사를 하면 그래서 받게 되는 사람들의 칭찬으로 상급이 끝나고 맙니다. 결코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악한 마귀는 우리 마음에 속삭입니다. 왜 너만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은 뭐하고 너 혼자 하는 거야? 하기야 너는 가진 게 없으니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그런다고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만 무시당하는 것 같고, 힘은 힘대로 들고……. 하지만 속지 마세요. 

그게 다 내 마음에 속삭이는 마귀의 말에 우리가 넘어가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할 때는 그에 필요한 힘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감당할 능력도 주시면서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못 한다 안 한다고 하지도 마시고 이왕 하는 일 나 혼자면 어때요? 오히려 찬송하며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더욱 값진 것으로 주신단 말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보잘 것 없고 부족하다고 해도 오히려 감사함과 기쁨으로 섬기며 나누며 흩어 구제하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힘든 것 바라보지 마시고 내게 힘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게 있는 어려움을 보지 마시고 나를 돕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게 있는 빚을 바라보지 마시고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것에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쓰고도 남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기 무명의 한 사람은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재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니 재물이 많다고 해서 왜 근심합니까? 왜 돌아갑니까? 그래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많다고 해도 그게 어디 내 것입니까?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흩어버리시면 내게 남아있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또 하나 여기 예수님께서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궁극적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참된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고 했을 때 그가 근심하는 것은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나마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라 그리고 나를 따르면 너는 내가 또한 책임져주마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리석게 내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따지고 보면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인 줄 알고 거기에 매여서 쩔쩔매지 마시란 말입니다. 결국은 마음입니다. 섬기고자 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를 기뻐할 때 주님이 그런 우리를 또한 섬겨주십니다. 당연히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사랑으로 섬기며 베풀며 함께 하고자 하는 자들 위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내가 섬기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섬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이요 내게 있는 것이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손에 들려드리게 되면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킨 아이의 작은 도시락처럼이나 큰 역사의 산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의 섬김이 우리에게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의 어린아이의 드림이 우리들에게 또한 있어야 되겠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고백 또한 우리들의 입술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주시는 바 모든 쓸 것을 채우시며 넘치도록 안겨주시는 주님의 모든 것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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