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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우리의 달음질은 계속된다 (빌 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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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달음질은 계속된다 (빌 3:7~16)


오늘 마지막 쉰 두 번째 주일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세계 68억 3천만 명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단 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나를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로서 유일합니다.  

에베소서2:10말씀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그 자체를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창세기1:31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떤 결과를 만든데 있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상속을 받아 나갔던 탕자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십니다. 

그에게서 어떤 것도 더 바라시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탕자의 형은 이것이 못마땅해 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그 많은 은혜를 다 탕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참 볼품없는 모습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바다에서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시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시는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로하시고 큰 복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3장 13절과 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삶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1.특별한 조건은 없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형제들아”하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 모두를 향하여 부르는 호칭입니다. “형제들아” 이 부름 속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현실에 대하여 다소간의 불만을 갖는 것은 불평등하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출발의 기반에 너무 차이가 많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그 삶의 현재와 결과는 당연히 격차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불공평하고 감사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갖기도 하고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나는 왜 머리가 좋지 않을까? 
나는 왜 능력이 부족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은근히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대로 살게 하셨습니다. 

남을 흉내 내어 남들처럼 살라고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누구나 동일한 조건입니다. 
받은 달란트의 량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맡기신 역할이 좀 다를 뿐입니다. 
그 위치에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이것을 주님은 몸의 지체로 표현하신 교회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처럼 위대하게 산 것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빌립보서3:4-6에는 자신의 삶이 남들 못지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통 이스라엘 사람, 베냐민 지파의 자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율법에 열심 있는 바리새파에 속하여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남다른 열정이 있어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소위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허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가지고 있으면 역겨운 배설물, 똥과 같은 것이라 다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의 부르심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 날 주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날의 주님의 명령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선상에서 출발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전 것은 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출발지점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여러분 마라톤 출발 지점에 선 선수들을 보셨습니까? 
어느 누구도 advantage(애드밴티지/유리(한 입장)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도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생각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로, 장로님의 아들로 태어난 친구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남들은 다 저만큼 앞서 있는데, 나 혼자 출발지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슬펐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아라. 우상숭배자의 아들이지만 내가 믿음의 조상이 되지 않았느냐?”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특별한 대처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릅니다. 
“형제들아” 

2.과거는 다만 유산일 뿐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만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유산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현재에 투자를 할 수 있는 기반일 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그 유산만 생각한다면 그는 앞으로 뻗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예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날에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 내가 어떻게 달리느냐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합니다.” 

1)좋았던 과거라는 유산도 잊어버려야 겸손하게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습니다. 

제2차대전 이전에는 스위스가 전 세계 시계시장의 90%를 점유했습니다. 
스위스의 기술은 정확도와 아름다움 면에서 단연세계최고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시계개발자들이 전자수정시계를 제시하였습니다. 태엽을 감을 필요가 없이 배터리로 돌아가는 시계입니다. 태엽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유지보수의 필요성도 적었습니다. 
하지만 주요 시계제조업체들은 이 혁신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에 얽매인 나머지 시대가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머지않아 스위스의 시계업계는 세계시장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스위스시계업계들이 이 변화를 받아들여 “스와치”라는 예쁘고 저렴한 시계를 출시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어도 새로운 도전 앞에 겸손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2)쓰라린 과거라는 유산도 잊어버려야 건강하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되지 않는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가시와 같아 늘 마음에 괴로웠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꼭 찾아와서 그날의 설교를 비판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죄책감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둘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를 걷다가 공사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철근과 건축자재들이 어지럽게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서 있었습니다. 
“공사 중에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공사 책임자 백” 
이 팻말을 보는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공사 중이라잖아.” 
“아하, 그 성도 지금 공사 중이구나. 그래서 내 통행에 방해를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동안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어했던 것도 “공사 중이라서 그랬구나.”
그러면서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 후에는 그 사람을  만나면 속으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성도님, 공사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이 오늘의 당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3.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14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노라.”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저 앞에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너무 집착해서 미래를 놓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안된 것도 억울한데 그것 때문에 기회까지 놓친다면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2003년도에 중국 북경의 한 봉제공장 안에 교회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지사정을 잘 아시는 선교사님의 추천으로 시작한 일이라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끝났다 하여 봉헌식을 하러 간 우리들은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함께 가신 30여명의 교우들은 교회건물을 구경도 못하고 다만 몇 분만 교회 건물 안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고 나왔습니다. 북경의 종교당국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일행은 한 공원을 찾아가서 봉헌예배와는 관계도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중국을 가신 분들과 함께 북방선교후원회를 조직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기보다 북방선교의 길을 적극적으로 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로 오늘의 몽골과 중국선교의 길을 계속 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문을 닫으시면 반드시 다른 문을 열어주십니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우리 스스로 끝이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진전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계속 전진하기 위하여 몇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목표설정입니다. 

“푯대를 향하여”-우리는 바라보아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4가지 비전이 있습니다. 다리, 중심, 성장, 선교가 그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사역은 이 4가지 주님이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전진할 것입니다. 왜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희망입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쓰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기대할만한 결과가 있습니다. 

쥐를 가지고 실험한 결과가 있습니다. 
쥐들의 태도가 삶의 의지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구팀은 쥐 한 마리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큰 물통에 넣고 빛을 완전히 차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쥐가 그 속에서 헤엄을 포기하기까지 몇 분이 걸리는지를 쟀습니다. 결과는 3분이었습니다. 
이 연구팀은 또 다른 쥐를 같은 물통에 넣고 이번에는 방안에 한 줄기 강한 빛을 비추어주었습니다. 그러지 쥐는 36시간 이상을 헤엄쳤습니다. 
빛을 보지 못한 쥐보다 무려 720배나 오래 버틴 샘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희망입니다. 
달려가는 자는 반드시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희망을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희망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희망입니다.  

3)열정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걸어가지 않습니다. 누워서 놀며, 쉬어가며 가지 않습니다. 삶의 열정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열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의 열정이 있습니다. 
헌신의 열정이 있습니다.
모이는 열정이 있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있습니다.
일에 집중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열정이 희망을 희망으로 만듭니다. 

최근에 몽골선교사 김종진 목사님을 서울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 적지 않은 여건이 꽤 괜찮은 교회였습니다. 사실 파송한 교회 목회자로서 그 교회 담임자로부터 이러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 적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본인이 들어오겠다고 하면 반대할 수 있는 이장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제가 몽골선교를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교회에서 파송해주셨는데 제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하여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용납될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몽골선교는 반드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진 선교사들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우리의 달음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시기하지도 원망하지도 맙시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희망을 가지고,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앞서가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우리의 영원한 승리의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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