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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생각의 변화 (막 5: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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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생각의 변화 (막 5:24~34)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본문은 한 여인이 병 나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경을 보고 무엇을 느끼나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여인은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다녔지만, 의사들에게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가진 재물도 다 소비해서 이젠 거지가 되었습니다. 12년을 병이 몸에서 떠나지를 않고, 오히려 좀 더 심해졌습니다. 정말 징그러운 병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한계’에 달했다고 합니다. 또 ‘절망’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보았고, 쓸 수 있는 돈을 다 사용했지만 문제는 해결 되지 않았습니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보다 더 오래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많이 있던 재산도 다 허비해 거지같이 되었습니다. 아마 가정도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고통은 더 심해졌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불행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만 있다면 우리는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밝은 미래가 없다면 인간은 차라리 죽어버리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이 여인은 모든 방법이 막힌 ‘절망적’인 단계에 처해있는 ‘불행한’여인입니다.   더구나 이 여인에게 주어진 고통은 단순히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혈루증은 유출병의 일종으로 ‘부정한 병’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무리 속에 섞여 살 수 없고 진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서 예배할 수도 없었고, 누구든지 만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나는 사람은 다 부정한 사람이 되고 그가 만지는 물건마다 다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여인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한 채 육신의 병과 소외의 아픔으로 이중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① 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여인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 여인을 ‘믿음’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듣지 못했으면 이 여인은 절망 중에서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이 여인에게 신기한 일이라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아마 말한 사람도 그 소문을 다 믿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병을 고칠 것이라는 믿음이 소문을 듣고 생겼습니다.  믿음을 만든 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입을 꼭 닫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이 여인처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온갖 세상이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문을 말해야 합니다. 성경을 이야기하고 신앙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절망 중에서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학교 주위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저녁 여러 명의 학생들이 이방 저 방에 놀러 와서 술 먹으면서 놀았습니다. 술을 먹고 노래도 부르고 때로는 큰 소리로 싸우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 당시 순진한(?) 나에게는 낯선 것으로 다가왔고 그런 사람들이 좀 겁이 나기도 해서 별로 가깝게 지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나 혼자 열심히 교회만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한 학생이 술에 취해서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왔습니다.  ‘손형 나는 교회 다니는 손형이 부럽다. 나도 손형처럼 같이 교회 가고 싶다. 그런데 왜 같이 가자고 말을 해주지 않느냐 섭섭하다’ 그때 나는 많이 놀랬습니다. 술 먹는 사람은 교회가고 싶어 하지 않는 줄 알았거든요.

② 하지만 또 기억할 것은, 예수님에게 나아온 사람은 이 여인 한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소문’을 전해준 사람은 예수님에게로 같이 나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이 여인만이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동의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동의(同意)하는 것입니다. ‘맞아 예수님은 할 수 있어’ 라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참 신기하지, 거짓말 일거야. 말도 안되?’ 정도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에게도 똑 같은 일을 예수님이 할 수 있어.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소문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나요?  오늘, 이 시간 나에게도, 성경에 기록된 일이, 이 여인에게서 일어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하나요? ‘그렇게 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거짓말이 아니야.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긍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난 할 수 있어.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야 긍정적인 생각이 인생을 바꾸는 거야”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인은 자기의 긍정적인 생각으로 병을 고쳤나요?  아니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쳤나요? 
  
여인의 병을 고치는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그 무한한 능력을 나에게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나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것처럼 쓰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믿음’은 나의 것입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를 불행의 구덩이에서 건지는 능력있는 믿음은 내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다.  지금 예수님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워 싸 밀고 있었기에, 서로 몸이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지만 아무 일도 경험하지 못하는 동행이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접촉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문을 같이 듣고, 자기 눈으로 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능력은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합니다.  믿음으로 만진 옷자락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려운 현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③ 믿음은 행동입니다. 여인은 무리를 뚫고서 예수님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여인은 집에 앉아 있지만 않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내 병을 고칠 수 있겠다 라고 믿었더라도 집에만 앉아 있었다면, 사람들이 에워싸 미는 틈을 뚫고 들어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여인은 여전히 병과, 절망과, 불행중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으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본문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할 때 여기 ‘댄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합토"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그냥 손을 대었다'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다, 쥐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일부러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잡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잡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는 사람이 남의 옷에 슬쩍 스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손짓으로 만져본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내가 이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는 말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질병을 치료받는 결정적인 두 가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7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기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듣고’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손을 대다’라는 단어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나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병을 치료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구원의 사건, 치료의 사건을 기록할 때마다 성경에 꼭 두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듣고’,‘믿고’ 라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요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의 사건은 두 가지, 듣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을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롬10:17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멀리하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일으키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이 여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낸 구원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들의 모든 죄와 문제들을 다 해결하셨습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너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인생 모든 문제의 해결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3:16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ㅡ아들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동의함으로, 또 행동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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