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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롬 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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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롬 15:12~13)


오늘은, 2009년 송년주일입니다. 송구영신 예배가 나흘 남았지만, 한 해를 보내시는 소감이 어떠신지요?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所望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恒常 準備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 15-16상).

오늘 말씀, 로마서 15, 12-13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져야 할 所望, 나아가 온 列邦이 두게 될 所望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이 누구이십니까? “이새의 뿌리(다윗의 아버지),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입니다. 이새의 뿌리이신 그 분이 누구십니까?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열방 :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방언의 백성들에게 유일한, 궁극적인, 소망이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아시지요? 우리나라가 OECD 30개 국가 중에서(국제경제협력개발기구, 우리나라는 1996년도에 29번째로 정회원국이 되었다;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국가들 모임), 부끄럽지만, 자살 사망률 1위 국가입니다. 지난 2004년 이후, 5년째 계속해서 OECD 30개 국가 중에서 자살 사망률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회가, 죽을 만큼 큰 병이 들어 있다는 이야깁니다. 

1위라는 자리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지난 2004년도에 비해서 그 수가 지금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수치보다 더 염려스러운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사회 40代 중년 남성들(우리 사회 중추적인 家長들, 사회 핵심 맴버들)과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드신 60代 남성들(나름대로 人生을 결산하고, 의미 있는 남은여생을 막 시작하셔야 하는 연세지요) 소위 ‘4060’세대들이, 자살 사망률의 1/3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동안, 유명 연예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취업난이나 학업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10대․20代의 죽음만 우려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연예인, 10대, 20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 4060세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張三李四 평범한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 노라 하는 우리 사회의 유명 인사들도 모두 50, 60대입니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냐며 바위에서 몸을 던진, 전직 대통령의 죽음(63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健康한 答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회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 만연된 이 시대의 普遍價値 속에서 소망을 찾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1. 우리 시대는, 참 소망이 무엇인가를 되묻고, 참 소망을 붙잡아야 할 때

이쯤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의 삶을 멈추고, 과감하게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참 소망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북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에 버금가는 태평성대를 누리던 주전 8세기입니다. 富國强兵한 시대입니다. 貿易이 활발하던 시대입니다. 

그 잘 나가던 시대, 선지자는 느닷없이 북 이스라엘의 패망을 선포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는 겁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律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호 4, 6).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핍 된 것이, 국가패망의 원인이었다는 겁니다. 

참 소망을 갖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病‘의 원인입니다. 죽음의 이유입니다. 나아가 패망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이미 천민자본주의에 뿌리를 둔 맘몬니즘(돈을 신으로 섬기는 삶)이 팽배한 지 오랩니다. 재물이 物神(맘몬)으로 둔갑하여 우리의 생각과 행동,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개발, 끊임없는 성장, 성공, 양심 없는 쾌락이, 우리 시대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지가 이미 오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義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현대판 바알종교(풍요의 신, 성공)을 섬기느라 정신없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존재, 삶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이 성공과 돈, 물질에 있는 줄 알고, 막상 거기까지 가보니 거기에는 행복도 없고, 인생의 의미도 없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너무 큰 상실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人生에, 뻥 뚫린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새로운 가치,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의 외침이 있었지만, 그 예언의 말씀은 일관되었습니다. “내 백성인 너희가 나(하나님)를 버렸다. 도리어 우상을 숭배하고 있구나….” 돌아오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일관되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야웨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출 20, 2-3). 이 말씀이 全部입니다. 

우리사회는 그 동안 경제성장을 위해서, 숨 가쁘게 달려오기만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전력 질주할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편승하면 안 됩니다. 경제성장 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단연코 1등한 나라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가지셨던 평생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국이 잘 사는 나라를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을 인정합니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밑바탕이 되어서,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하는 데, 세계 역사상 최 단시간, 30년 이라는, 유례없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日 100년, 美 180년, 英 200년).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제성장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리어 經濟가, 物質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버린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민의 절반이 무주택자라고 합니다. 특히 수도권은 집이 없어서 난리잖아요.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도 미분양 아파트가 많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해괴망측 한 일).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은 110%입니다. 110%라는 것은, 산술 치로 보자면 우리나라 가정 모두가 집 한 채씩 갖고도, 무려 128만 채가 남아도는 집입니다. 그런데 왜 집이 없습니까? 소수의 집 부자들이 집을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 통계를 보니까, 법인도 아니고 개인 소유인데 혼자서 1,083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필요이상의 많은 집을 소유하는 것은, 주택난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社會的인 罪惡이라는 이야깁니다(정의가 못 된다는 것). 선지자 호세아와 동시대 선지자였던 ‘아모스’가 사회정의를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오직 正義를 물 같이, 公義를 마르지 않는 江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 24).

그러면 부자들에게만 문제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목표, 방식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집을 한 채 마련하려면, 전국 평균은 19년이 걸립니다. 서울에서는 29년, 강남에서는 44년 걸립니다. 대학 나와서 취직하면 남자의 경우 보통 28살 정도 됩니다. 월급 받아서, 최소한 먹고, 최대한 저축한다 해도, 서울에서 집을 사려면 60가까이 되어야(57)합니다. 

강남에서 집 사려면 72살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 이야깁니다만, 어느 라디오 방송 인터뷰 방송에서, 우리나라 대기업 중견기업에 다니는 30대 젊은이들의 삶의 목표 1순위가 ‘내 집 마련’이라고 했습니다(歷史意識?, 삶의 哲學?, ‘하나님의 나라와 그 義’라는 삶의 우선순위가?). 우리나라 대기업 중견기업에 다니는 30대들의 삶의 목표가 그렇다면, 저는 우리나라 희망 없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참 소망이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소망을 바꾸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 소망이시다는 것은, 주님의 하나님나라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의 멍에(십자가)를 메기 위해서, 이 시대의 물질지향적인 普遍價値를 拒否하고, 말씀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아멘입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 평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가르치신 ‘하나님나라 복음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그 하나님나라 복음말씀이, 成就될 것을 기다리는 데서 주어지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히브리서 11, 1이하 말씀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했습니다. 여기 바란다는 것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내 소원’입니까? 내가 세운 ‘인생의 목표’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바라는 것들'의 실체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입니다(아브라함).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 복음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바라고 희망해서, 그 말씀이 말씀그대로 우리 삶에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누리며 사는 그 기쁨이 충만케 된다는 겁니다. 그 평강은, 무엇입니까? 그 평강 역시, 내가 품은 그 소망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 때,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기쁨도 없고, 평강도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 기쁨, 그 평강은 가짜입니다.

2. 우리는 또한, 거짓 소망에 붙잡힌 영혼들을 품는 뜨거운 가슴 가져야.

사도 바울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서 열방을 다스리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온 列邦이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恩惠의 福音 證言하는 일, 使命을 마치기 위해서, 자기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주시는 권면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가 마땅히 (믿음이) 弱한 자의 弱點을 담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좀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믿음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기보다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내 강한 믿음을 주장하고, 드러내고, 자랑하는 기회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둔 자는, 그리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그리스도께서도(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강조어법) (軟弱한) 우리를 받아 주셔서, 우리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서로 서로, 그 중에는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포함하여) 받으라”명하셨기 때문입니다(롬 15, 7). 

예수님께서 연약한 자, 죄인, 병약한 자, 버림 받은 자, 소외 된 자, 불쌍히 여기셔서(스플랑크니조마이) 그들을 용납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연약한 자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십니다. 罪人을 정죄하지 맙시다. 잘못한 형제, 가족, 이웃을 정죄하지 맙시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해 줍시다. 그를 받아 줍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처럼 연약한 자를 수종 드는 자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심지어 아직도 믿음이 도무지 없는 자를 섬기고, 자신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되, 善을 이루고 德을 세우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우리의 강한 믿음 때문에 榮光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 법칙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깁니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약한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합니다. 또 大人들(큰 사람들, 강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하셨습니다. 힘들지만,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마 20, 25-28).

우리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연약한 자를, 죄인들을, 품는 사람이 되십시다. 왜 입니까? 그리할 때, 열방까지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탄하신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고, 다시 베들레헴 들판, 자기들이 지키던 자기 양 떼에게로 되돌아갔던 목자들처럼,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 마구간에서 탄생하셔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연약한 형제를 예수님처럼 가슴에 품어 않읍시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슴에 품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열방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 所望을 두게 하기 위해서, 그는 구약의 4가지 말씀을 그의 가슴 속에서 언제나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1) 시편 18, 49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異邦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변이방나라들을 정복한 후, 그 승리로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
(2)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신 32, 43 모세가 죽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설교하면서 한 노래의 결론).
(3)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시 117, 1).
(4)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사 11, 10). 이 말씀이, 사도 바울에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이 말씀이 불타기 원합니다. 불태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 나아가 온 열방이,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는 놀라운 축복이 일어나기를, 하나님 기대하고 계십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2009년 송년주일 예배드리며, 온 열방의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소망을 둡니다. 주여, 우리의 영원한 소망 되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가족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 이 나라, 이 백성, 우리 교회, 모든 열방의 소망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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