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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인생의 선한 목자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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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의 선한 목자 (시 23:1~6)
 

이스라엘 민족은 본디 유목민족이었습니다. 선민이 팔레스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유목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을 정복하였으며, 그 때부터 백성이 저마다 토지를 소유하고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축을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병행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목축지로 유명한 곳은 중부 고원 지대로서 땅이 거칠고 돌이 많습니다. 그 고원지대는 벧엘에서 헤브론까지로서 길이가 46킬로 정도이고, 폭이 지역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략 22.5킬로에서 27.3킬로 정도 되었습니다. 

고원지대에는 풀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풀을 뜯기 위해서 멀리까지 나가는 일이 흔했습니다. 또한 좁은 고원의 양편에는 땅이 급격하게 꺼져서 거기서부터 바위투성이인 광야가 시작됩니다. 양이 혼자서 그곳에 갔다가는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행방불명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맹수들이 양을 잡아먹으려고 틈을 노리고 있고 도적이나 강도가 양을 훔치려고 기웃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목자들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틴에서 목자의 생활은 매우 고된 일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쉬는 날이 없이 주야로 양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켰습니다.

팔레스틴을 여행한 어느 여행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높은 황무지에는 밤이 되면 하이에나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때 목자는 조는 일 없이 멀리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서 있다. 낮이 되면, 목자는 흩어져서 풀을 뜯는 양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한 마리 한 마리를 살피고 있다. 이 같은 광경을 보노라면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이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목자라는 이름을 주고 신의의 상징으로 삼았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목자에게는 끊임없는 경계와 불굴의 용기와 인내심과 강한 사랑이 자질로 요구되었습니다. 한편,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목자와 양에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을 몇 곳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대대로 전하리이다”(시 79:13)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선한 목자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양에 비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7)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성경 구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매우 특별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목자는 오로지 양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양들은 목자가 있음으로서 보살핌을 받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목숨을 버리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면서 동시에 당시 목자들이 양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적이었는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렇다고 모든 목자가 다 헌신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품삯을 받고 남의 양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양이 제 것이 아니므로 맹수가 달려들면 양을 보호하기 보다는 자신의 안전이 먼저였습니다. 그리하여 위급한 일을 만나면, 적극적으로 양들을 보호하지 않고 양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것은 그가 삯꾼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시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그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동이었고, 골리앗을 죽이고 일약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던 그 때까지도 목동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들을 칠 때 매우 특이한 목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 양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 35절에 보면, 다윗이 어떤 목자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다윗은 자기가 먹이는 양들을 절대로 맹수에게 빼앗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맹수가 새끼를 물고 가면 기어코 쫓아가서 물리치고 도로 찾아왔습니다. 이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는 각오가 없이는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참으로 선한 목자였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양들을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자기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을 일컬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같이 고백하는 다윗의 심령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안전과 만족과 행복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7)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그 분의 말씀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양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말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상사는 사람들이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 생명, 내 가족, 내 재산, 내 능력, 내 사업, 내 직장, 내 시간, 모든 것을 다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 있는 사람은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부족함과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기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해결해야 하므로 피곤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애쓰고, 누가 자기 것을 빼앗아가지는 않을까 염려하느라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소유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모신 성도들은 삶 전체를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여러분, 양이 뜯어먹을 풀과 마실 물을 위해 걱정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것은 양들이 할 일이 아니라 목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물속의 물고기들을 먹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와 바람과 햇빛을 주셔서 모든 산과 들에서 식물들을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미리 먹을 것을 모아다가 저장해 둡니다. 그러나 사슴이나 노루와 같은 야생 동물은 추운 겨울에 양식을 얻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합니다. 양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양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목자에게 맡기고 삽니다. 양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다 목자의 책임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삶 전체를 목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늘 만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표현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광야와 같아서 언제 무슨 위험이 다가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악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한 자들이 정치와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세력을 이루고 선량한 자들을 괴롭힙니다. 법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스바냐 3장 3절에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 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인간사회의 실상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들은 악한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세 있는 자들을 보면 항상 무장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습니다. 조폭들을 보면 항상 떼를 지어서 다닙니다. 저들은 혼자서는 불안해서 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은 어디를 가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소유된 성도들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시편 121편에 보니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2절에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양떼를 뒤에서 몰지 아니하고 항상 목자가 앞장서서 인도합니다. 이는 목자가 사전에 위험한 곳을 파악해서 안전한 길로 양떼를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직후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회상하면서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신 1:33)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40년을 지냈던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신명기 8장 15절에 보면,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굳은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는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신명기 30장 20절에 보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29장 11절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없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지치고 피곤할 때 힘과 용기를 주셔서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고 하셨습니다. 이 생수의 강은 곧 성령을 가리킨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늘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간증하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이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실까?”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서 자주 실수하지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벧전 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함께 하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4절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사노라면, 항상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바친 번제를 흠향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기쁨과 슬픔, 풍요와 빈곤, 건강과 병약, 사랑과 미움, 출생과 죽음, 번영과 시련, 등이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하였습니다. 

병원에 가 보면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경제위기를 만나서 실직을 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를 만났을지라도, 성도들은 다윗과 같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양들을 인도해서 가노라면 때로는 산을 넘기도 하고 물을 건너기도 하고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적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이 지은 시편인데, 그 5절로 7절에 이같이 노래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낳은 아들로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과 달리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의 행복한 삶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스마엘 상인에게 종으로 팔려 머나먼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누명을 쓰고 수년 동안 옥에 갇혀 죄수 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 요셉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버리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셨으므로 그 누구도 요셉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감옥의 책임자에게 인정을 받아 모든 사무를 맡아서 보고 죄수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자, 바로의 꿈을 해몽할 기회를 주셔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는 다윗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바람에 수년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던지 다윗은 요나단에게 말하기를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 20:3)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셨으므로 사울 왕이 해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곤경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광명한 아침이 오듯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나면 풍성한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은 패망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야말로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 주시고 잔에 가득 기쁨의 포도주를 채워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러한 은총이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임하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은총은 한 때 임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진심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성도님들께서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의 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시편이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신앙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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