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딤후 4:9~22)

  • 잡초 잡초
  • 872
  • 0

첨부 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딤후 4:9~22)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이 시는 '겨울 사랑'이라는 문정희 씨의 시(詩)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사치스럽고 낭만적인 겨울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사명이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연속성을 띠고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받은 사명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늦가을 차디찬 로마 감옥에 갇혀 순교를 앞에 둔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사후(死後)에도 자신이 전하던 복음을 계승하여 전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자신의 개인적 여망이 아니라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수행해야 될 디모데의 삶은 복음전파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①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하고 ② 고난을 감수해야 하고 ③ 자신의 직무에 전심전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세상을 후회 없이 살아온 사도 바울은 자신의 한 순간의 결정이 영원을 결정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속히 올 것을 당부했습니다. 

투옥 생활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명의 연속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이 고통스럽고 외로울 때 만나보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도와 동역하던 사람들이 제 갈 길로 모두 떠나버리고 누가만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바울을 아프게 했던 데마(Demas)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했습니다(딤후 4:10). 
데마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외로울 때 바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동역자들을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올 때에 ①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② 드로아 가보에 집에 둔 겉옷과 책,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③ 구리장색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④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⑤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의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습니까? 

Ⅰ. 겨울은 항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21절에 『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고 했습니다. 
지중해 전역은 겨울철, 즉 10월에서 4월 사이에는 파도가 높아서 항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지중해를 건널 때를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 자신이 백부장에 의해 로마로 압송될 때였습니다. 
사도행전 27장 10-11절에 『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고 했습니다.
상황은 바울이 말한 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27장 14-20절에 『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습니까? 

Ⅱ. 디모데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9절에 『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고 했습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21절).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보고 싶은 믿음의 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여타 사람들과 차별화된 관계였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에 『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디모데를 향한 사도 바울의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왜 그토록 보고 싶어 했습니까?
디모데는 바울이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2절에 『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라고 했습니다. 

① 디모데는 눈물의 종이었습니다. ②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보는 것으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③ 디모데에게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④ 디모데는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4-5절에 『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고 했습니다. ⑤ 디모데는 자신의 계승자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6절에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습니까? 

Ⅲ. 디모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9절에 『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고 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딤후 4:10). 데마는 초기에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골 4:14; 몬1:24). 그러나 후에 세상을 사랑하여 실패한 자였습니다. 
'이 세상'(톤 닌 아이오나)은 '현재 시대'를 뜻합니다. 이것은 데마가 현재의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데마는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두 절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6:24; 딤전 6:17).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마는 바울 밑에서 신앙생활하기가 힘들어서 상대적으로 신앙생활에 부담이 없고 쉬운 곳을 찾아 당시 문화의 도시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는데 그리스게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언급되는 사람입니다. 그레스게는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갈라디아로 보냄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Lenski, Hendriksen).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달마디아는 아드리아 연안 동쪽에 있는 일루리곤(Illyricum)에 속해 있는 한 지역으로서 바울이 이미 개척해 두었던 곳이었습니다(롬 15:19). 디도가 달마디아로 파송된 것은 그곳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에 보냈다고 했습니다(4:12). 바울은 디모데에게 로마 감옥에서 맞을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겉옷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죽 종이에 쓴 것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구약성경과 로마 시민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유대교 경전에 근거한 합법적인 사실을 재판의 자료로 제시하기 위한 칠십인 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바울 자신에 대해 해를 많이 보인 사실을 언급하면서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을 말하고 디모데에게 그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 집에 문안하라고 했습니다(4:19).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4:20). 여기 에라스도는 로마서 16장 23절에 나오는 에라스도와 동일 인물입니다.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견하고 어서 속히 오라고 한 것입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습니까? 

Ⅳ. 디모데가 마가를 데려와야 되기 때문 입니다. 

본문 4장 11절에 『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했습니다. 
마가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울이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습니까? 바울은 마가가 자신의 일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1) 마가의 캐릭터입니다. 
(1) 좋은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신앙의 어머니 마리아의 감화를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행 12:12). 
(2) 그의 집은 별실 다락방을 가질 만큼 부유했습니다(눅 22:12-13). 그의 집은 120문도가 성령을 받던 장소였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힐 때 그의 출옥을 위해 기도하던 집도 바로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행 12:12).

2) 마가는 베드로에게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바벨론은 로마를 말합니다. 
마가는 베드로에게서 감화를 받고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에 살았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그의 집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설교 운동에도 동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를 가리켜 『 내 아들 』이라고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3) 마가는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입니다. 
마가가 바울을 떠난 후 약 10년이 넘도록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의 1차 투옥 때에 마가도 함께 옥중 생활을 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4장 10-11절에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는 『 나의 동역자 마가 』라고까지 했습니다.

그 후 마가는 베드로를 섬겨 로마에 있었습니다(벧전 5:13). 그 때 바울이 다시 로마 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연약으로 고난의 공동체에서 이탈해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마가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와 함께 갇힌 고난의 동지로, 사도의 아들로, 사도의 일에 유익한 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실수 때문에 주님이 그를 버리지는 아니합니다. 받은 은혜를 회복시켜 유익하게 쓰고야 마는 주님이십니다.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는 바울이 옛날에 실수하여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마가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보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대가 어느 모습
어느 이름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도
그대의 여운은 아직도 내 가슴에
여울되어 어지럽다
따라 나서지 않은 것이
꼭 내 얼어붙은 발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붙잡기로 하면 붙잡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안으로 그리움 삭일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을
그대 향한 마음이 식어서도 아니다
잎잎이 그리움 떨구고 속살 보이는 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랴
무슨 죄가 되겠느냐
지금 내 안에는
그대보다 더 큰 사랑
그대보다 더 소중한 또 하나의 그대가
푸르디 푸르게 새움을 틔우고 있는데"

이 시는 '겨울나무'라는 이정하 씨의 시(詩)입니다.
주의 재림이 임박해서 일어날 큰 재난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막 13:18).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 24:20). 
겨울은 활동이 불편한 계절입니다. 그러나 겨울은 봄을 대망하는 계절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2009년 한해를 마감하는 연종주일입니다. 낡은 것을 겨울에 비유했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노년입니다. 항해가 불가능한 인생의 노년의 겨울이 오기 전에 주의 일을 합시다. 눈이 밝을 때 성경 보고 다리가 온전할 때 교회 출석을 잘하고 청력이 있을 때 설교 잘 듣고 사지백체가 기동이 가능할 때 온 몸을 바쳐 교회를 섬깁시다. 

주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이 보고 싶은 사람이 됩시다. 주님이 대신 문안해 줄 것을 부탁받은 사람이 되어서 전하고 권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됩시다. 
마가처럼, 디모데처럼, 신앙의 족보가 있는 명가를 이루어 나갑시다. 성경 제일주의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개혁주의자는 아닙니다. 신학의 원리와 신학의 전통에 따라 개혁주의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운동에 필요하다고 하면 누구든지 데리고 와야 합니다. 우리 모두 겨울이 오기 전에 데리고 옵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