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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사죄와 용서의 도 (요일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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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용서의 도 (요일 4:11~12)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의 다섯 번째 청원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원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 죄 용서와 사람들 서로간의 용서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 용서를 빌기 전에 우리 자신은 과연 남을 얼마나 온전히 용서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키고자 하신 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또한 자기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기 위한 가르치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여쭙기를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친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절을 지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거듭 거듭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먼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더 나아가 12절에서 쓰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합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 어느 때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본성과 영광과 위엄을 육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지 그 일이 어떻게 진척되어가고 있는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입증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 열매가 어떻게 맺혀져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이미 앞서서 여러 차례 형제사랑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3:10) 했고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4-16) 했습니다. 또 쓰기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요일3:18-19) 했으며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3-24)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했습니다. 본문 직전에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했고 또한 본문 뒤에도 계속해서 쓰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19-21)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했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4-15) 했습니다. 

모든 사도들에 앞서 주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 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마5:44).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형제에 대한 미움은 살인행위와 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그 대표적인 실천의 하나가 용서입니다. 용서는 적극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소극적인 행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러기에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수억 원, 수십억 원, 아니 수백억 원은 선뜻 낼 수는 있어도 원수 같은 자 하나 용서하는 일은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도 무슨 대규모 자선사업이 아니셨습니다. 그가 하신 일은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그 용서의 사역에 힘입어 하나님께 용서를 빌 수 있게 된 우리에게서 마땅한 도리로 가르치신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마땅한 도리를 가르치시려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남이 나에게 한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결코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용서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표지라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할 줄 모르면 아무리 자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외적으로 교회 안에서 중한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무서운 채찍질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매일 매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 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마5:44) 하신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위에는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잘못한 사람의 사죄도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인정하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 줄 아는 것이 또한 서로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권면하는 말은 제삼자가 할 수 있는 것이지 남에게 해를 끼친 본인이 그 피해자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당하고 억울함을 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의 잘못을 당사자에게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를 갚기 위해 모든 노력,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물질적 피해를 입혔으면 물질로 보상해야 하고 명예를 더럽혔으면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라 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용서를 빌 때 먼저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용서를 빌 때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침과 사죄의 뜻을 밝히며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여부와 용서의 정도를 가해자가 주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해자의 뜻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또 맡겨야 합니다. 

가해자가 주님의 용서의 가르침을 악용해서 용서를 받으려고만 하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사죄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쉽게 용서를 얻어내면 또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떠들고 다닐지 모릅니다. 아마 십중팔구 그럴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그럽게 용서해도 뉘우칠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며 용서를 빌 줄 모르는 자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자들이라고 알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들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심판과 처결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한 뒤 이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25-32) 

이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닷새만 지나면 새해입니다. 우리 모두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거짓을 버립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된 우리들 사이에서 참된 것만을 말합시다. 분노할 일이 있어도 그 때문에 죄를 짓지 맙시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하루해가 아니라 한 해가 저무는 마당입니다. 

해 넘기지 말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음으로 해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했는데 해가 바뀌도록 분을 품어 마귀에게 큰 틈을 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했는데 우리가 지금 성령께 큰 근심을 드리고 있는 것 아닌지를 곰곰이 짚어봅시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가운데 악독하게 떠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합시다.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새문안교회가 새 성전을 건축할 준비를 하고 있고 또 <새문안 새 생명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다 마귀가 지극히 싫어하는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맹렬히 반대하고 방해공작을 할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일을 방해하기 위해 교인들 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싸움과 파당의 씨를 뿌릴 것입니다. 이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귀에게 지는 일이고 우리의 두 가지 대업을 좌초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함께 지혜와 힘을 모을 줄 알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라 하신 주님께서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며 그 바른 이해를 통해 우리 모두 사죄와 용서의 도를 지키고 우리의 신앙이 우리 교회 안에서부터 사랑과 용서와 신뢰와 평화를 심는 차원으로 승화되도록 힘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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