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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 (시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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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 (시 146:1~5) 

 
우리 속담가운데는 유달리 원망과 핑계를 돌리는 속담이 많습니다. 가장 잘 아는 것 중에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것도 그렇고 “맹인이 앞 못 봐서 개천에 빠져놓고 애꿎게 개천을 탓한다.” 는 속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대표적인 말은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 되는 사람은 불경기를 탓하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학생은 머리를 탓합니다. 기술자들은 연장을 탓하기도 합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운수를 탓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내가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팔자소관이라 핑계 삼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이 <탓>이라는 것이 자신의 실패와 무능력을 벗어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고 임시방편적인 도피처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이 <탓>에 빠져 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망과 핑계에 반드시 뛰 따르는 것이 <피해논리>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던 이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평소 자신들과 교제하던 예수님이 얼른 와 주시기만 하면 오라비가 나을 것이라고 여겼던 두 자매는 급히 연락을 취했지만 주님은 얼른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 오라비가 죽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들의 힘이 되었고 의지가 되었던 오라비를 잃게 된 두 자매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 온 주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고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오라비가 죽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일종의 <피해논리>입니다. 이 피해논리라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느냐하면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는 데서부터 옵니다. 생각이 잘못 되었고, 보는 것이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절망할 때 즉, 소망이 없을 때 이 피해논리는 더욱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 속에서 소망이 보일리가 없는 것이고, 핑계와 탓하는 것 중에서는 소망을 바라 볼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인간은 아는 만큼 사는 게 아닙니다. 가진 것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소망만큼 그는 살 수 있고, 그가 가진 소망만큼 행복한 법이다 이 말입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가진 것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단지 지금의 고통 보다 더 큰 행복이 주어 질 미래가 있고 그 소망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나사로의 입장에 돌아가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는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병이 있었습니다. 병도 보통 병이 아닌 아주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더구나 아주 가난한 거지였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걸해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감사할 만한 외형적인 조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감사는커녕 조상을 탓하며 부자를 원망하며 가난을 저주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노동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병을 앓고 있으니 못 할 노릇입니다. 사업을 하려고 해도 자본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해도 집이 없습니다. 오직 혼자였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같으면 이럴 때에 잘 하는 짓이 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혐오하면서 불 질러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안 한 여자가 이 세상의 남자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범죄행위를 계속했습니다. 철저히 과거에 매여서 과거를 원망하고 과거 때문에 절망한 것입니다. 

 나사로가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회상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망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나사로에게 주어진 선물이 무엇이었습니까? 안식이었습니다. 위로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상처가 있다는 것은 때로 큰 위로입니다. 내가 상처가 있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막2:17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상처가 있다면 주님을 찾을 것이요, 아픔이 있다면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게 소망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패트 윌리암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에 매여 회상 속에 사는 사람은 마치 백미러를 쳐다보며 운전하는 것과 같다.” 무슨 말입니까? 백미러는 가끔씩 꼭 필요할 때 힐끔 힐끔 쳐다보기 위해 있는 것이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운전을 하면서 백미러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운전한다면 차는 도랑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있다는 것, 미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그런고로 인생이란 소망의 문제요, 미래의 문제란 말씀입니다.

 현시대를 타락의 시대라고 모두가 걱정합니다. 도덕적으로 특별히 여러 면에서 타락의 징조가 있고,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우리 모두가 걱정하지 않습니까? 특히 젊은 사람들의 타락을 보면서 절망적인 미래를 예측하곤 합니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자살하는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서 우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여러분,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영적타락입니다. 영혼의 부패에서 오는 극단적인 행위가 자살입니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절망으로 내몰았나를 생각하면 거저 가슴 아플 따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절망해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절망했기 때문에, 소망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미래가 보장되고 환하게 장래가 보이면 당장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도덕적 문제, 윤리적 문제이기 전에 소망의 문제요, 종교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라, 아무리 바로 살아라 하고 가르쳐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문제는 미래입니다. 확실한 미래가 보장될 때, 확실한 소망이 생길 때에 바른 도덕생활이 나오는 것이고 훌륭한 윤리적 생활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꼭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절망했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임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절망과 소망, 실망과 용기......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보면 오직 믿음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착각하기를 환경 때문에 절망하기도하고 여건 때문에 소망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여건에서도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여건과 현실 앞에서도 절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심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요, 믿음이 있다면 어떤 질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 이 말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의 계략으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립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당한 요셉은 그렇게 비참한 운명이 되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만 후에 요셉은 천하를 호령하는 권좌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한편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맹수에게 갈가리 찢겨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한탄하며 13년 동안을 울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슬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셉도 끌려가면서 괴로워했습니다마는 뒤늦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진 드라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역시 슬퍼할 일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보다 더한 난센스가 있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팔아먹은 것으로 인하여 훗날 동생 앞에 섰을 때에 벌벌 떱니다. 동생이 보복할 것이고 절대로 무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럴만합니다. 상식적으로 그렇듯 억울하게 저를 팔아먹었는데 저가 지금 권좌에 앉았으니 가만있겠습니까? 그래서 ‘죽었다.’ 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만 그런데 이것 또한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요? 요셉은 믿음으로 이미 모든 것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형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형님들이 나를 팔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를 이 쪽으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자, 이 현실을 놓고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 그리고 요셉, 이들의 이야기를 전부 믿음의 문제로 봐야합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요, 동시에 그 믿음의 질이 문제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도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있는 것을 몰라서 없다고 생각하며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실망이란 언제나 믿지 못하는 거기에서 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한다면, 이 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절대적인 믿음에 있습니다. 그 믿음이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에서 시인은 밝히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인은 생전에 그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평생에 그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거니와 도울 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이러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 때문에 피곤하십니까? 무슨 일로 고통 받고 있나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생각해보면 어차피 지난 일입니다. 과거에 매여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양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 하는 자 /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 너를 자녀 삼으셨네. /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 주 만 바라 볼 찌라 / 주 만 바라 볼 찌라

 이제 2009년도는 다 지나갔습니다.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 후회스러운 일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후회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내년이라고 하는 새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 주어질 그 날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뜻있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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