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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합리적인 신앙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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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신앙 (고전 13:1~3)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캠퍼스의 크리스천들은 대략 두 파로 나뉘었는데 한 파는 소위 성령파이고 또 한 파는 말씀파였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 ‘나의 말과 전도함이 사람의 권하는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 또 다른 쪽에서는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성령파냐 말씀파냐를 구분할 수 있는 한 가지 편리한 방법이 있었는데 찬양을 부를 때 손을 들고 하는 사람은 성령파이고 손을 들지 않는 사람은 말씀파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런 농담마저 유행했습니다. ‘성령파가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게 보기 싫으면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라. 그런데 낮게 달아라.’ 손을 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이제 이런 구별방식은 이미 옛날 얘기가 됐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찬양할 때 손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고 굳이 그리스도인이 성령파냐 말씀파냐를 나누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됐습니다. 교단에 소속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향을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순복음교단에 속해야만 성령파인 것이 아니고 침례교단에 속해야만 복음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장로교에 속해야만 칼빈주의 신학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세계화시대가 된 것처럼 신학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가 공유하고 교류하고 또 서로 섞이는 그런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은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도 가르치시고 성령의 능력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은사가 있는 부분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은사가 없는 것을 천대한다든가 그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자기중심적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정말로 구별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포용적인 신앙이냐 배타적인 신앙이냐가 될 것입니다. 이십 일 세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미국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분은 그렇게 예측했습니다. ‘이십 일 세기에 세계의 종교적인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다.’ 우리가 배타적인 신앙을 지양하고 포용적이 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저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 이외에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될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굳이 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될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의 뜻과 기독교의 목적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구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신앙이냐 비합리적인 신앙이냐가 될 것입니다. 합리성.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신앙과 연계시켜서 생각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십세기적인 개념입니다. 이천년 전에는 아마 합리성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만일 존재했다면 예수님도 그 단어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사도바울도 그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첫째는 내게 중요한 것이 남에게도 중요한 것으로 전달된다는 뜻이고 둘째는 나의 열정과 나의 정성이 남에게도 의미가 전달된다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불합리적인 신앙은 내게는 중요하지만 남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고 오히려 내 열심, 내 정성이 남에게 불편함이 되고 방해가 되고 해가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것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느냐. 먼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의를 행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구제하면서 나팔 불지 말아라, 금식하면서 슬픈 모습 하지 말아라,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구제든 금식이든 기도든 그건 아무나 예사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정성과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구제하고 보이기 위해서 금식하고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은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 본받지 말라 그런 사람들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안식일 규례에 대해서 목을 매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밀알을 손에 비벼서 먹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혁신적인 발언이고 이천년 전에도 사람들은 그 말씀에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그런 해석을 하셨다면 이러한 예수님이 원리는 어디에 또 적용될 수 있을까. 

이건 오늘날 우리의 신학적인 작업이 여전히 필요한 부분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많은 것들이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 복이 되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건강과 경건과 가정의 축복과 또 이런 모든 것을 위한 것인데 우리는 그 원래 의도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얽매고 사람을 제한하고 정죄하고 사람을 천대하고 심지어 생명을 부인하는 그런 식으로 몰고 가는 그런 몰상식한 신앙의 모습을 볼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한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법이나 형법의 차원에서 돌을 던진 것이 아니고 율법의 차원에서 돌을 던지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열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대한 열심히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는 게 아니고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여인을 돌 던지려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죄인을 건지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사람의 돌로부터도 죄인을 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이든 거룩함이든 열정이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명을 구하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면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고 정죄하고 돌 던지고 제한하고 이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정말로 내 믿음이, 내가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남들에게도 귀중한 것으로 전달되고 내 모든 신앙적인 정성과 헌신과 열심이 남들에게도 의미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열쇠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내가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할 때 그것이 남들에게 전달되고 남들에게 의미가 이해가 됩니다. 

반대로 내게 사랑이 없을 때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일지라도 남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싫어하고 저항하고 거부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전도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죄의식을 느낄 정도로 아, 내가 전도를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그러나 전도에 열심히 있는 만큼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사랑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아무리 바른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수반되지 않을 때에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소리 나는 구리와 같아서 사람들이 싫어하고 귀찮아하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한마디를 하더라도 사랑과 함께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수반되어서 복음이 증거될 때는 사람들이 당장 받아들이지는 않더라고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존중합니다. 적어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수반되지 않았을 때는 사람들이 벌써 먼데서부터 압니다. ‘저 사람, 지금 나에게 작업하려고 온다.’ 그건 우리가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작업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국 병을 고치는 치유가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병 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 병이 낫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믿는 사람들, 이미 열심히 믿는 사람들,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고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내가 옳은 말, 거룩한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말은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설교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 가능하고 전도도 강의도 가르치는 일도 양육도 제자훈련도 이 모든 것이 입으로만 전달되고 사랑이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것은 믿음과 사랑을 반드시 구별해서 누구는 믿음이 있는데 사랑이 없다 그런 뜻보다는 결국 진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얘기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냐 행위냐를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행위로 구원받느냐 그건 단순한 얘기이고 진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게 돼 있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품이었다, 감정이었다, 내 의지였다, 이런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말은 구제든 적선이든 또 자선이든 간에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선행위도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동기로 그것을 할까요? 의무감 때문에 할 수도 있고 죄의식 때문에 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선활동 ․ 구제가 반드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사람들은 ‘아, 난 당신의 사랑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돈만 달라.’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얼마나 합리적인 말씀인지 몰라요.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믿음이 없어서 실수를 하는 경우도 많고 믿음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서 실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의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실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예를 많이 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실수하는 사람도 있지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수하는 사람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수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고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생기면 되지만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수하는 사람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고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사도바울은 합리적인 신앙생활의 길을 보여준 것입니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현대적인 용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말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이라든가 이런 말보다는 결국은 내게 귀중한 것이 있다면 내게만 귀중해서는 안됩니다. 남에게도 귀중해야지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나눠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내게 정말로 귀중한 것이 있을 때 남들에게도 나누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수직적인 면이 있고 수평적인 면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면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수평적인 것은 사람과 우리의 관계인데 수직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광신적일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헌신 ․ 복종 그런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 요한 ․ 야고보가 그물을 버리고 심지어 자기의 아버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것처럼 수직적인 차원에서는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헌신 ․ 열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평적인 차원에서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남을 배려하고 내 뜻이 남들에게 전달되고 남들도 그것을 귀중히 여겨야 내 수직적인 것의 귀중함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나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광적으로 여기고 그리고 그것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믿음이 없어서 실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믿음이 있는데 실수하는 것은 더 비극적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은 더 피해가 큽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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