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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화평을 위하여 (마 5:9,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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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을 위하여 (마 5:9,21~26)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설교하신 교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가리켜서 교훈 중의 교훈이고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8복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초기에 갈릴리 호수가 어느 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해서 이를 산상수훈이라고도 말합니다. 수훈이라는 말은 그 내용이 후세에도 전수되어 뭇 사람들이 교훈 받을 만한 주옥같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6장20-26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평지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평지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8가지 복을 말씀하는데 이 복은 잘 사는 복이 아니고 성공하는 복도 아닙니다. 이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이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 잡힌 특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여덟 가지의 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화평을 이루는 삶입니다. 즉 피스 메이커가 되는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 여덟 가지 복중에 일곱 번째 복이 “화평을 이루는 삶”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화평을 이루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평입니다. 평상시 사람들은 중요한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덜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인 줄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이 갑자기 병이 나 보십시오. 그때에는 성적이고 과외고 다 잊어버립니다. 그저 건강을 위해서 뛰어다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화평은 네 가지가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인간과 하나님은 원래 부드러운 교제를 이루었던 관계였습니다. 그러다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담이 쳐지고 장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갈 때에는 제물을 들고 찾아가서 제물을 통해서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화해를 위해서 짐승을 잡았고 제물을 드림으로 그 제물을 통해서 만나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던 해 유월절 명절에는 12만 마리의 양이 제물로 드려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때 예루살렘 하수구에는 온통 양의 핏물로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죄 없는 양들만 죽임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예수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다시는 양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는 화해를 위해서 화해의 제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화평을 헬라어로 “에이레네”(eilene)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 (shalom)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의 개념은 개인의 안녕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회복을 이루는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화평을 이룬 사람이 예수님입니다(엡2:14)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이 화평을 위해서 제물 되셨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벽한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제물 되어 죽으심으로 성전중앙을 가로막았던 휘장도 뜯어내시고 성소와 지성소의 칸막이도 뜯어내시고 제물을 잡아 바치던 제단도 뜯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사 9:6, 눅 2:14, 요 14:27).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삶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내가 주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안에 오셔서 거하시는 일입니다. 그 상태가 완전한 평화의 상태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평화해야 합니다. 그때 내게 영적인 평화와 정신적인 평화와 마음의 평화와 삶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이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2. 죄로부터의 화평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사람은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받게 됩니다. 이 죄는 사람을 사정없이 얽어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창살 없는 감옥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죄는 나를 사정없이 불화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은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도망갑니다. 죄가 사람을 얽어매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나갔다가 귀국할 때 누구나 공항 심사대를 통과하게 됩니다. 심사관들은 누구나 다 붙잡고 짐을 뒤지는 것이 아닙니다. 몇 사람만 골라서 심사대에서 짐을 조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골라내는가 하면 걸음걸이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물건을 숨겨서 들어오는 사람은 걸음걸이가 이상해진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밀실에서 전문가들은 CCTV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펴보다가 고급물건을 가지고 들어오는 여행객을 용케 찾아냅니다. 그들의 짐을 뒤지면 틀림없이 밀수품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걸음걸이부터 이상해지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지 않는데도 스스로 이상해집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억압합니다. 부자연스럽게 합니다. 불안하게 합니다. 죄로부터 멀어져야 자유해집니다. 그때 내안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평화하려면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안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부흥사 무디는 병에 들어있는 공기를 모두 빼내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모두 별 방법을 다 말했지만 신통한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디가 대답하였습니다. “병 안에 들어있는 공기는 무슨 방법으로도 다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병속에 물을 가득 채우는 길 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죄를 제거하기는 어렵습니다, 죄를 안 짓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내안에 성령을 충만하게 채우는 길뿐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 죄로부터 평화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강력한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로부터 화평한 사람입니다. 


3. 자신과의 화평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면 다음에는 나 자신과의 화평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불화하면 내 마음도 내 영도 내 삶도 불화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신과 마음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자살자들을 보십시오. 자신과 얼마나 불화했으면 자살을 하겠습니까. 남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마음이 불화하니까 남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고민자들은 모두 자신과의 관계가 불화해서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까 밤잠을 설치고 먹지도 못하고 우울증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 삶은 지옥의 삶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도 내 영도 평화하게 되어 결국 나 자신이 평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네 마음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평화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4. 관계의 평화 

마음의 불화나 죄의 불화나 하나님과의 불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불화는 반드시 이웃과의 관계의 불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평화한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도 평화를 이루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 누구와도 평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죄는 먼저 하나님과 불화하게 하고 마음을 불화하게 하고 마침내 누구와도 불화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욕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마5:22-23)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 중에 한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관계의 평화를 말씀하시는가 하면 평화가 깨진 상태가 가장 위험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형제에게 노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함이 커지면 분노하게 되고 분노가 커지면 살인을 져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자는 지옥불에 던져진다고 강하게 말씀하셨는데 욕은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로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마음에 참혹한 상처를 받으면 그 치유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치기 힘든 병이 마음의 상처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다 잃습니다. 기쁨도 행복도 즐거움도 모두 상실됩니다. 마음의 상처는 그만큼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싸움을 하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싸워야 합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으면 치유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싸울 때는 상대방의 감정을 상할 정도까지 싸우지 말고 화가 나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 자신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관계의 악화가 무서운 것입니다. 

김삿갓은 사후 150년이 지난 오늘도 사랑을 받습니다. 그가 갓을 쓰고 살아가는 사유가 있습니다. 그의 본명은 김병연입니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 가문 출신입니다. 그가 갓을 쓰고 방랑자가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 란 때 반란군에게 항복한 할아버지 김익순의 부끄러운 과거를 모르고 자랐습니다. 20세 때 영월에서 백일장이 열렸을 때 김익순의 죄를 묻는 문제가 나왔을 때 김삿갓은 통렬하게 김익순에 대해서 비판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그 장본인이 자기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충격을 받고 그 후로 삿갓을 쓰고 방랑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형제에게 욕하거나 라가라 하고 욕하는 자는 심판받는다고 했습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갈등의 요소를 줄이는 일입니다. 불화의 요인을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원인을 자꾸 만들면 안 됩니다. 화해를 했으면 그 화해의 열매를 오래 지속시켜야 합니다. 화해하고 회개하고 또 갈등을 유발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화해를 결심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제물을 들고 가다가 형제에게 화해할 일이 있으면 제물을 놓고 먼저 형제에게 찾아가 화해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화해를 결심하고 먼저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각오하면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습니다. 형제간의 불화와 갈등도 먼저 내가 결심하면 얼마든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도 풀 수 있습니다. 결심하면 이룰 수도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로마의 압제가 심각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를 잃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은 로마를 전복하고 자유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폭동도 반란도 일으키며 독립을 꾀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반란이었고 폭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란자들이나 폭동자들은 십자가에서 무자비하게 처형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를 이해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의 감정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네 집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감정도 이해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비상시간에 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감정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다만 안타까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이해하셨습니다. 눈앞에서 저주하는 모습을 보시고 연민의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 뿐 그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화평을 이루는 방법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배반한 사람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배반할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와 사연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 욕을 한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나를 욕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욕먹을 짓을 했던지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상대방의 감정과 처지를 이해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해치는 사람의 필요와 문제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평화가 이루어지고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가를 치루는 일입니다. 화목이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평화를 위해서 다 주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려면 내 자존심과 내 자아를 포기해야 가능합니다.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는데도 내 자존심을 세우고 손해 하나 보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먼저 대가를 치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교회들이 불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 대가를 치루지 않고 상대방이 포기하기를 바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는 싸우는 곳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보니 교인들끼리 아랑곳 하지 않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한 사람 유심히 보더니 내리면서 한마디 하였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우리들이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형제 그리고 이웃은 돈 보다, 자존심 보다, 내 체면 보다 더 중요한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 내 체면이나 내 자존심을 내 세우는 동안 이 좋은 관계들을 다 잃게 됩니다. 이들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고 내 체면을 더 소중히 하고 내 자존심을 더 소중히 여기면 이 좋은 사람들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은 돈을 더 중요시해서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불화한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내 자존심을 더 소중히 여기는 동안 관계들이 깨지고 하나님과의 평화도 깨진 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관계의 평화는 돈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뉴턴은 미래지향적인 과학자입니다. 어느 날 책상 앞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눈앞에서 빙빙 돌며 귀찮게 하였습니다. 좆아도 또 와서 얼굴 주위를 빙빙 돌며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뉴턴이 화가 치밀어 올라 파리를 잡아 창문을 열고 내 던지며 한마디 하였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왜 내 얼굴 주위만 돌면서 나를 괴롭히느냐.”

내 부모와 내 형제와 내 주님과 내 하나님과 내 이웃은 내 자존심보다 체면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고 소중한 지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관계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내 좁은 자존심 안에 갇혀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갈등하며 살아가고 마침내 하나님도 떠나 살고 주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내 형제가 원수가 되고 부부가 원수가 되어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평화이고 화해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가를 치루기 위해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평화를 이루게 되었고 내 자신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브로더스(Broadus) 라는 사람은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일 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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